위닝일레븐 이야기

in #kr5 years ago (edited)

3c23af4c78ba619e222b83df12289b6624617a2f32e668202b3fd2d12f87539fdc3b9e5ef3a5cc1da7595d264c697774d9340a8126101bdba98a7ef3e950ab71e7ce03acdc4bd519eb30d6928e9ae16d62c3a674d0dda43f66140bd18ac17c6294958159e5c3cde75ddf95dbe9017edb.jpg

우리 세대에서 위닝 일레븐이라는 게임이 가졌던 위상은 다른 세대의 당구나 스타크래프트와 준하거나 또는 그 이상일 것이다.

이 게임은 유전자를 타는 게임이다. 당구나 스타크래프트는 정석대로 연습을 하면 연습량에 비례해서 실력이 올라가는 구간이 꽤 길지만 위닝 일레븐은 아주 초보 단계만 벗어나면 그닥 플레이 시간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랑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짬을 내 위닝일레븐을 하러 플스방에 가던 게 우리 세대의 흔한 모습이었는데 1년 내내 똑같은 시간 게임을 같이 해도 이기는 놈은 계속 이기고 지는 놈은 계속 진다. 축구공은 둥글고, 그래서 축구 게임이라 단판 기준으로는 가끔 잘 하는 사람이 지는 경우가 오히려 많이 나오지만 오판삼승 누적으로는 안 되는 사람은 절대 안 되는 그런 게임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 게임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함께 시작한 친구가 있다. 재능이 월등했던 이 친구는 집에 플레이스테이션을 보유한지 근 십년이 된 녀석들을 다 재치고 금세 고수가 되었다. 나중에는 게임 방송에도 몇 번 나오더라. 당시 게임을 시작한지 고작 3개월 지난 시점에 이 친구가 이 게임의 특징과 주의 사항을 간파하고 나에게 말해주었던 조언들이 있다.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시리즈를 거듭해도 이 게임에는 어떤 특징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조언 중 하나는 15년이나 지난 어제 집에서 혼자 위닝을 하다가 깨우치게 되었다. 마치 무림 비급을 읊조리고 죽은 스승의 가르침을 한참 뒤에나 이해하는 수준 정도 될려나.

​나는 농담이 아니라 이 친구와 위닝을 하다가 연패를 해서 절교했다. 아마 게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부 같은 것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늘 전교 1등을 하던 그 모습, 수능 전날 플스방에서 자정까지 게임을 하고도 탑티어 의대에 들어간 이 친구의 존재가 아마 내 어딘가를 찔렀겠지. 이 친구 눈에, 자기보다 두뇌가 훨씬 떨어지는 인간들이 변별력을 주겠다고 고심해 만든 수능시험지는 얼마나 허접하게 보였을가. 출제자의 의도도, 내가 드리블이나 슛을 할 방향도 훤히 꿰고 있었을 것이다.

절교를 해버린 탓에 후일 다시 위닝을 붙어보지 못해서 아쉽다. 나는 위닝이라는 게임을 꽤 좋아했는데, 그것은 내가 썩 재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과탑이나 군대 소대탑, 로스쿨 기수탑 정도 할 실력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부터 나보다 위닝을 잘 하는 사람은 일부러 구하지 않는 이상은 꽤 만나기 어려웠다. 옛날에는 8:0이나 9:0으로 져본 적도 있는 무슨 벽처럼 느껴지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 게임을 하면 내가 훨씬 더 잘 하는 것으로 뒤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 그렇게 뒤집으면 대부분 그 이후에도 내가 쭉 이겼다. 아마 내 인생에서, 재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습량(게임을 그렇게 많이한 게 자랑인가는 별론으로 하고)으로 그렇게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위닝일레븐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는 의외로 지금 직업에서 선방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그런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둔재가 나름 동네 고수 정도는 할 수 있던 위닝일레븐을 떠올리며 용기를 가질 때가 많다. 고작 게임이라고 하지만 밥 먹듯 이 게임을 하는 넓은 풀에서 어쨌든 열심히 해 상위권까지 올라 간 사례가 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려 15년 뒤에야 이해할 수 있던 그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기도 한다.

절교한 그 친구와 다시 위닝일레븐을 해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아마 십중팔구 내가 지겠지만 그래도 해볼 수 있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여전히 느껴지는 벽에 타고난 재능의 절대적인 힘을 느끼던, 의외로 작아진 격차에 세월과 인간의 덧없음을 느끼든, 어느 쪽이든 느끼는 점이 있을텐데.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Sort:  

매우 공감가는 글이네요. 위닝이란 게임이 참... 그리고 그에 파생된 여러가지 관점들까지.

@tipu curate

감사합니다 ㅎㅎㅎ
한번 풋살이나 플스방에서 또 뭉쳐야 하는데 ㅋㅋㅋ

^^

보팅 감사드립니다 ^^

Hi @admljy19!

Your post was upvoted by @steem-ua, new Steem dApp, using UserAuthority for algorithmic post curation!
Your UA account score is currently 4.444 which ranks you at #2305 across all Steem accounts.
Your rank has not changed in the last three days.

In our last Algorithmic Curation Round, consisting of 97 contributions, your post is ranked at #48.

Evaluation of your UA score:
  • Some people are already following you, keep going!
  • The readers like your work!
  • Try to work on user engagement: the more people that interact with you via the comments, the higher your UA score!

Feel free to join our @steem-ua Discord ser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