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일기] 자백하지 말걸 그랬나 후회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들다

in #drug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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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25일 (금) 마약일기

경순 감독이 나와 나영정씨를 집으로 초대했다. 경순 감독은 국가보안법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주제로 영화를 찍고 있다. 나는 영화의 주요 인터뷰 대상자중 하나였다. 경순 감독은 내가 걱정되었나보다. 하지만 경순 감독은 내 촬영 분량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에게 내가 피해를 입히는구나. 그저 죄송스럽다.

밤 8시쯤 만났는데 새벽 1시까지 경순 감독과 술을 마시며 실컷 수다를 덜었다. 지금으로서는 떠드는 것이 가장 큰 위로이구나. 경순 감독은 한겨레가 너무 비겁한 결정을 했다고 함께 화를 내주었다.

“아니. 일단 직무를 정지시키고 최소한 판사가 어떻게 판결을 하는지 지켜보고 징계 수위를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겨레는 법과 원칙도 없어요? 그러면서 무슨 진보 언론의 대표랍시고 행세를 해?”

한겨레는 최근 몇 년 사이 대중의 많은 비판을 받는다. 사실 난 그럴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한겨레를 옹호하곤 했던 사원이다. 그덕에 욕도 많이 먹었지만, 대중들이 한겨레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들도 많기 때문에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내가 가장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한겨레가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겨레가 초심을 잃었다고 비난하는데 내가 내부에서 지켜본 한겨레는 여전히 초심을 잃었다고 단순히 비난하기는 어려웠다.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갈길 열심히 간다. 대부분 직원들은 타 언론사의 절반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도 진실을 보도하겠다는 열망 하나로 버티고 있다.

가끔 경영진들이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노조가 들고 일어나서 비판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고 경영진은 사과를 하곤 했다. 가끔 실수는 하더라도 내부 자정작용이 확실하게 작동하는 건 한겨레가 여전히 건강한 조직이라고 판단하게 했다. 임직원 수가 500여명이나 되는데 어찌 그 500여명이 한결같이 87년의 초심을 유지하고 살수 있겠는가. 중요한건 실수를 하더라도 내부 자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의 여부 아닐까. 한겨레는 그런면에서 아직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게 내 판단이다.

하지만 마약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대동단결하여 나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했다. 한겨레 사내 게시판에 ‘아직 재판도 안끝났는데 즉시해고는 너무 한 거 아니냐’는 항의글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고 전해들었다. 이유가 뭘까. 한겨레는 그래도 건강한 조직인데. 내 판단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마약은 재고의 여지도 없이 정말 중범죄인 걸까. 대마초는 되고 필로폰은 안된다는 걸까. 내가 아는 경찰청 출입 기자들중에는 해외에서 대마초 해본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던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 어떤 마약은 경범죄이고 어떤 마약은 중범죄라는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난 마약을 하다가 걸린게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스스로 자백하고 먼저 반성하는 쪽을 택한 것 뿐이다. 차라리 끝까지 발뺌할걸 그랬나. 순순히 모발검사에 동의하지 않고 저항하는 쪽을 택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내 과거의 행적도 은폐될 수 있었을텐데. 난 현행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로 모발 채취는 불가했기 때문이다. 죄를 저질렀어도 정상참작이라는 게 있는 건데 이놈의 사회는 마약 앞에서 그딴 고려도 없는건가.

경순 감독의 방에는 벌거벗은 한 중년 여인의 나체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여인은 춤을 추듯 자유롭게 몸을 흔들고 있었고 작가는 그 찰나의 장면을 사진으로 담은 듯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여인의 몸 구석구석에는 자그만 상처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하고 있었다. 글래머러스하지도 않은, 그냥 그저 그런 몸매의 중년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몸짓으로 자신 앞에 놓여진 공간들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상처입고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그 중년의 여인이.

※당부의 글.
안녕하세요. 허재현 기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간 마약 문제에서만큼은 단 한번도 마약 사용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연재글은 마약 사용자들이 어떤 일상을 살며, 어떤 고민들에 부닥치는지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자 시작한 것입니다. 마약 사용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닌,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마약 정책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마약 사용자들과 우리 사회가 함께 건강한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이점 널리 혜량해주시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련글 / 허재현 기자의 마약일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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