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심장] 1화 - 불펜용투수

in #fiction6 years ago (edited)

하나. 둘. 셋 . 촥.

아무도 없는 실내연습장에서 우혁은 쉐도우 피칭(shadow pitching)을 하고 있다.
한쪽 벽면이 모두 거울로 되어 있는 10평 남짓한 연습장의 공기는 한껏 무거워져 있다.
우혁의 오른손에 쥔 수건위로 팔의 땀방울들이 떨어지고 있다.
거울 반대쪽 벽면에 작은 시계는 9시20분을 가리키고 있다.

늦은 저녁시간도 다소 답답한 연습장의 공기도 우혁에겐 상관없어 보인다.
그저 진지한 자세로 투구 폼 교정에 열중하고 있다.

하나. 둘. 셋. 촥. 수건이 공기를 가르는 경쾌한 소리는 작은 공간의
고요함을 일정한 리듬으로 깨트리고 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복된 동작을 하는 그의 모습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다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꼭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선 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자신이 정한 숫자를 채우고 있는 것이고,
그 숫자가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일 뿐이다.

우혁에게 이 마지막 일과는 종교 의식과 같은 경건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작은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고, 수건이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소리까지 확인하고 있었다.
8시부터 10시까지 훈련을 수행하지만 혹시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언제 끝날지조차 알 수 없는 하루의 마지막 일과.

"따르르릉"
첫 번째 동작인 왼쪽 무릎을 막 올리고 다음동작으로 넘어가지 직전에 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울리다니..'
10년 지기 친구이자 트레이너인 정훈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
"혁아. 훈련 중?"
"물론"
"어제 올스타 전 끝나고 이제 다들 모처럼 받은 휴가를 즐기고 있는데.. 넌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쉴 땐 쉬어야지!"
"휴식이라..그건 나한테 사치야"
"야.. 뭔..사치까지 들먹이냐. 오늘 1시간만 니 시간 뺏자. 지금 쉐도우 피칭하는 니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근데 1시간만은 나한테 내 줄 수 있잖아? 너도 훈련 10시에 끝낼 때도 있고. 오늘 수건 소리 좀 괜찮으면 좀 나와."

"흠.."

평소와는 달리 적극적인 정훈이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다소 무거웠던 마음에 반갑기도 했다.

"오늘 따라 상당히 적극적이네..
아.. 그게 벌써 몇 년전이냐? 1군 데뷔 승 축하한답시고 오늘처럼 불러내서 내가 돈 많이 썼던 아픈 기억이.."
"혁아..지금도 시간이 간다. . 오늘 금요일이고..내가 너한테 이렇게 까지.."
"알았다고 알겠어 수건 소리 별로지만 그냥 넘어갈게..”
“오케이! 스타디움 맞은편 호프집이야. 와서 좀 떠들다가 가. 다시 말하지만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구.”

9시30분.
이번 주에 가장 빠른 퇴근이다.
채우지 못한 연습량을 러닝으로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훈련장에서 스타디움까지 10분. 큰 길 건너는데 5분.
15분이면 나름 만족할 만 하다.

어제 올스타전이 열렸던 스타디움을 멀리 바라보며 러닝을 시작했다.
올스타 선수로 뽑힌 적도 없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온 뒤
단 한번도 올스타전 경기를 본적이 없다.
누군 가에겐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날이고, 다른 누군 가에겐 소중한 연휴이다.
친구. 애인. 또는 가족들과 휴식을 취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훈련 시간표를 짰다.
아무도 연습하는 선수는 없다. 그저 나는 홀로 지독히 자신과 싸우고
후반기에는 반전을 이룰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고졸 신인으로 프로 첫해에 1군 엔트리에 속했고 운 좋게도 금새 기회를 얻었다.
1회에 무너진 선발투수를 대신해 프로 데뷔 경기를 가졌고,
8과 2/3 무실점. 데뷔 경기에서 프로 첫 1승을 챙겼다.

그러나..그 뒤로는 단 한번도 지독한 경쟁에서 승리한적이 없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구단에서는 나를 유망주로 분류해왔다.
연습할 때는 최고의 공을 뿌렸다.
코치들이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공을 뿌렸고,
지독하게 몸을 만들고 관리해왔다.
다승 왕. 리그 MVP는 당연히 내 것이고, 심지어 해외에 진출할 재목이라고 한 코치도 있었다.
첫 해 첫 경기.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매년 업그레이드 되는 몸 근육. 구위. 구속. 변화구.
항상 큰 기대를 받아왔지만, 실전에서는 전형적인 새가슴이었다.
도저히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불펜용 투수. 그게 나였다.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심리치료. 종교. 미신. 할 수 있는건 다해봤다.
결과는 똑같았다. 신인 때는 그저 어리니까 실패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다들 그렇게 큰다고 격려 받았다.
기회도 충분히 주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10년 동안 결과를 내지 못한 불펜용 투수에게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는 너그러운 프로구단은 없다.

올해 전반기에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안 좋은 결과에도 아직 구단이 나를 방출하지 않음을 감사해야할 따름이다.

어느새 불빛이 꺼져있는 스타디움 앞에 도착했다.
화려한 조명을 받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 꿈? 이제 없다.
그저 내가 불펜에서 던지는 공을 떨리지 않는 가슴으로 던져보고 싶다.
당장이라도 던질 수 있는 준비는 되어 있다.
그러나 나를 가로막고 있는 스스로 만든 장벽을 깨부수지 못하고 있다.
그게 지금 내가 처한 지독하게 슬픈 현실이다.


Shadow pitching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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