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윤리학, 또는 어떻게 살 것인가?

  • 주의 : 길고 어려운 글이니, 처음 두세 문단과 마지막 두세 문단만 읽어도 됨.

요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아니 그 전에 조국 사태를 비롯한 일련의 정치적 분열상을 겪으면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도대체 이렇게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기준’ 같은 게 없을까?, 하는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외면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사실은 모두가 한 사회, 한 국가, 한 인류를 이루며 살 수밖에 없다는 건 공통의 운명 아니겠는가. 따라서 철학자는 이런 문제 상황에 답을 해야 마땅하리라. 다시 말해, 누구나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에 대한 답으로 삼을 만할 것 같다.

물음을 조금 다르게 쉬운 말로 던져 보자. 우리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어떤 동일한 원칙을 갖고서 행동해야 할까?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행동의 원칙 같은 게 있을까? 이런 물음들은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윤리학이라 부르는 영역의 핵심 물음이다.

나는 여기에서 윤리학의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따지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은 시간이 날 때 한가하게 하는 작업이거나, 아니면 철학 교수나 연구자라는 직업의 정당화를 위해 수행하는 서류 작업에 가깝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행동의 원칙을 제안하는 일이다. 사실 이런 작업은 절대로 쉽지 않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깃장을 놓기로 작정하면, 다시 말해 반대를 위한 반대라도 하기로 마음 먹으면, 어지간한 주장은 헛점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아주 굳건한 논증을 제안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나는 칸트가 <윤리형이상학 정초>(1785)에서 제시한 유명한 문장에서 시작하고 싶다. “[네 행동의] 원칙이 [네 원칙이면서] 보편적인 법도 될 수 있기를 네가 바라는, 그런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라.” 이 문장은 표현을 달리하여 <실천이성비판>(1788)에도 등장한다. “네 의지의 원칙이 항상 보편적인 법 수립의 원리로서도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칸트는 다른 데서도 이와 비슷한 진술들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 다루지 않겠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려 했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들뢰즈는 독특한 설명을 바친다. 아래는 내가 썼던 글의 일부를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아래 인용 속의 인용문은 들뢰즈가 쓴 <칸트 철학을 요약해줄 수도 있을 네 개의 시적 경구에 대해>(1984)에서 온 것임.) 어려우면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법은 순수한 형식이며, 감각적이건 지성적이건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법은 해야만 하는 것(내용, 선)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것이건 간에, 복종해야 할 주체적 규칙을 말한다. 그 행위의 원칙이 모순 없이 보편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고, 그 행위의 동기가 이 원칙만을 대상으로 갖는다면, 그런 모든 행위는 도덕적이리라.” 예컨대 거짓말은 보편적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거짓말은 거짓말을 믿는 사람을 내포하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는 한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법은 새롭게
정의된다. “법은 보편성의 순수한 형식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법은 착해지기 위해서 의지가 추구해야만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대신 도덕적이기 위해서 의지가 취해야 하는 형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한다.” (…) “법은 우리에게 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대신 우리에게 ‘해라!’라고만 말하는데, 우리는 이로부터 선을, 말하자면 이 순수한 명령의 대상들을 연역해야만 한다.” - 김재인(2014), <들뢰즈의 칸트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문제>, 철학사상53호.

칸트의 행동 규칙은 ‘내용’을 말해주지 않는다. 즉, 어떤 어떤 게 좋은 행동(‘선’)이니 그 행동을 하라고 하지 않는다. ‘공리주의’(utilitairianism, 즉 utility[좋은 것]를 추구)라고 분류되는 철학자들은 좋은 것의 내용을 제시하고 그걸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칸트는 그런 식으로는 행동 규칙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행동의 내용을 열거해서 알려주는 일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행동이 일어나는 상황과 맥락이 다 다를진대, 어찌 행동 내용을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공리주의자의 입장은 좋은 것 몇 개(어쨌거나 수에 있어 유한하다)를 예시한 후에 행동 주체에게 그 예들에 공통되는 어떤 내용(‘선’)을 추론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이 경우 선은 앎아야 할 내용, 앎의 내용이다.

칸트는 내용을 말하는 대신, 그 내용이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하면서, 그 규칙을 따르면 윤리적으로 좋은(‘선’)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말하는 규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성이다. 자기 행동의 원칙을 ‘보편적인 법’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마련해서, 그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라는 것이다. 앞에서 칸트가 말했던 구절들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매번 행동할 때마다 자신의 원칙에 비추어 보편성을 구현하도록 행동할 방식을 찾아야 한다.

칸트가 제시한 이런 행동 규칙은 니체에 오면 ‘영원회귀’라는 개념으로 정교화된다. 니체는 <기쁜 앎>(1882)의 341절에서 영원회귀 사상이 처음 등장했다고 증언한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최대의 무게 - 어느 낮 또는 어느 밤, 한 악령이 가장 적적한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네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 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고 그리고 이제까지 살아온 이 삶을 한 번 더 그리고 수없이 더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삶에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없으며,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과 모든 생각과 탄식 그리고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너의 삶의 사소함과 위대함이 너에게 다시 돌아와야 한다, 모두 동일한 순서와 차례로 ― 이 거미도 나무 사이의 이 달빛도, 그리고 이 순간과 나 자신까지도. 실존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 그리고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역시도 그것과 더불어 [다시 회전할] 것이다! 너는 땅에 엎드려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을 저주치 않으려는가? 아니면 그 다이몬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그런 기괴한 순간을 한 번 체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것을 듣지 못했노라!”라고. 이러한 생각이 너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변화시킬 것이고 아마도 분쇄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 하나하나에 대하여 “너는 이것을 한 번 더 그리고 수없이 바라느냐?”라는 질문은 최대의 무게로 네 행위 위에 가로놓일 것이다! 아니면 너는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너 자신과 삶에 좋게 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영원회귀는 의지에게 칸트의 규칙 만큼이나 엄격한 규칙을 제공한다. (…) 윤리적 사상으로서 영원회귀는 실천적 종합의 새로운 형식이다. 네가 바라는 것, 그것의 영원회귀도 바라는 식으로, 그것을 바라라. “네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나는 그것을 셀 수 없이 여러 번 하고자 하는 그런 식으로 하려는가?’라는 물음이 최대 주안점이다.”

니체한테서나 들뢰즈한테서, 왜 셀 수 없이 여러 번, 즉 영원히 반복되길 바라며 행동해야 하는가? 들뢰즈는 왜 그 조건을 ‘선별적 원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는가?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인 법, 또는 보편성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나는 앞서 소개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원회귀 사상에 따르면,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힘의 끝까지 행해야만, 영원한 반
복을 각오하고 행해야만, 삶을 해방할 수 있다. 어떤 실천이 최선이었는지는 오직 나중에서야 알 수 있을/없을 뿐이다. 만약 ‘그때 그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회한으로 인해 삶은 가벼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한테건 요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라. 그렇게 행동하라. 이런 행동 규칙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누군가 농담으로 아무렇게나 살겠다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그 행동과 행동 결과과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의 쪽팔림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쪽팔림일 테고,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패배일 수 있으니까. 따라서 지금의 행동 한 번이 최선을 다한 행동이어야 하고, 행동을 선택하는 순간으로 아무리 다시 돌아온다 할지라도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더 이상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행동을 하게 되리라. 이것이 칸트가 말한 보편성의 원칙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내용을 출간된 책들에서 썼다. 두 대목만 소개하겠다.

  1. “실패란 처음에 의도한 목표와 내가 노력해 생겨난 결과가 어긋날 때,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 어긋남 때문에 사람들은 좌절하고 후회합니다. 후회는 결과에 비추어서 노력을 평가하려 할 때 생깁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결과란 나의 노력과 우주의 조건이 어우러져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내 노력이 바라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세상에선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후회란 노력에 대한 후회인데 노력의 순간에 더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물론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야 합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하고 이것이 삶이어야 한다는 게 니체가 명명한 운명애amor fati의 진짜 의미입니다. 삶의 경로와 결과가 모두 미리 정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숙명론’과는 정반대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 바를 다하되 그 결과를 겸허하게 긍정하라.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그 삶의 끝에서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노라” 하고 말을 맺으면서, “이것이 내 운명이고,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동아시아, 2017, 220~221쪽)
  2. “니체는 (…)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도 제시합니다. 그게 ‘영원회귀’ 사상입니다. 망망대해에 있을지라도, 가는 과정은 그렇게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거기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할까요? 니체는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택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삶에 더할 나위 없이 좋게 임하리라는 겁니다. ‘한 번의 쪽팔림’일지라도 그건 영원히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선으로 행동해서 죽기 직전에 완성되는 게 ‘운명’입니다. 니체는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를 말합니다. 저런 게 운명이라면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삶이 영원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행동했으니까요.”(<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동아시아, 2019, 72쪽)

맨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행동 규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자신이 따르는 행동 원칙이 보편적인 법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법이라는 건, 남들도 그 법에 준하는 행동 원칙에 따라 행동하라고 권장한다는 뜻이다. 그건 또한 내 행동의 원칙과 타인의 행동의 원칙이 같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법, 또는 보편의 의미이다. 여기까지는 칸트의 윤리학이다.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어떻게 해야 그 보편성에 이를 수 있을까? 보편적인지 아닌지 알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보편성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블랙스완, 즉 지금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행동 원칙의 보편성은 앎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니체는 요구한다. 행동을 하되, 영원히 반복되라는 걸 전제하면, 최선의 행동을 하게 되리라. 후회 없을 행동을 하게 되리라.

영원회귀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걸까? 만일 그 가설이 잘못되었다면? 이런 반문은 차라투스트라의 난쟁이처럼 경솔하고 가볍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따르지 않는다면, 생각이건 행동이건 파괴되어 소멸하리라고 논증했다. ‘단 한 번만’이라는 전제 아래 하는 행동은 그 한 번으로 영원히 사라지리라. 그건 자기 삶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요, 삶 전체에도, 그러니까 타인과 시간에도 책임지지 않겠따는 선언이다. 무책임하게 살겠다면, 이 또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하나의 우화로 글을 맺겠다. 어떤 두 사람이 선고를 받았다.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야 했고, 다른 사람은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삶 전체를 돌아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판관은 두 사람 각각에게 외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이 하나 있는데, 문을 열면 팻말 두 개 있는데, 팻말에 써 있는 대로 가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문까지 함께 갔다. 천국으로 가는 사람이 먼저 문을 열었다. 천국으로 가는 팻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네가 지금까지 삶에 행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삶이 네게 행할 것이다. 계속 앞으로 가라.’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환호하며 앞으로 갔다. 이번엔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문을 열고 지옥으로 가는 팻말을 보았다. 그는 최고의 비참함과 슬픔 속에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물었다. ‘대체 팻말에 뭐라고 써있던 거요?’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답을 듣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으로 가는 팻말에는 자신이 본 것과 똑같은 문구가 있었던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한 곳이었고, 똑같은 법이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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