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본 "82년생 김지영"

in #kr-book6 years ago (edited)

얼마 전에 kr-pen에 올라온 글에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얼핏 들어본 듯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베스트 셀러였더군요. 제목만으로는 제 흥미를 끌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megaspore 님의 글에는 조남주라는 소설에서 발췌한 일부 문장이 언급되어 있었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 도서관에 대출 예약을 걸어두었다가 지난 주에 반납된 이 책을 얼른 빌려 보았습니다. 내용이 약간은 들쑬날쑥하지만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어느정도 이끌어진 전개를 통해 책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고 3시간이 지난 뒤에 책을 내려 놓았지만 마음이 묵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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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자분들의 출생과 실제 성장과정에서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3형제 속에서 성장한 나로써는 그 이해의 폭이 좁고 얕은 건 부정할 수 없는 한계임은 틀림없었습니다. 글을 읽어가다 김지영 씨의 시댁에서의 갑작스런 친정엄마로의 변신?을 통해 그간 마음 속에서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많은 불평등과 고정화된 인식들에 대한 상처를 차곡차곡 쌓으면서도 실패의 두려움 혹은기억으로 인해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는 많은 여자들의 현실이 조금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이미 바짝 말라 버석이는 묵은 감정의 먼지들 위로 작은 불씨가 떨어졌다. 가장 젊고 아름답던 시절은 그렇게 허망하게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김지영 씨의 첫 이별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는 위의 문장에서 밀려오는 디테일에 몇 번이고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일촉즉발! 나는 일베도 워마드도 모르고 페미니즘도 잘 모르지만 이러한 사소한 감정들이 쌓여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과 요즘은 딸바보라는 단어가 있듯이 많은 부모들이 딸을 소중히 키우지만 이전에 태어나 성장한 어머니들은 여전히 이런 아픔을 안고 살고 있음이 안타깝다. 더더욱 일부이긴 하지만 가정에서의 내 딸은 소중한 보물이지만 사회에서의 딸 또래의 여자들에 대한 예의가 없음은 매일 신문과 인터넷을 가득 채웁니다.

아래 문장들은 김지영 씨에겐 여자로써 상실의 기억이고, 여자이기에 육아, 살림, 가사독박을 써왔던 이 땅의 많은 또 다른 김지영 씨들의 외침으로 들렸고 순간 남자인 나도 어느 정도 이러한 당연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아픈 마음이 쑤욱 밀려듭니다. 특히나 마지막 유폐 라는 단어는 겨울철 새벽의 시린 바람에 베인 것과 같은 시큰한 아픔, 손가락의 살을 예리하게 벌리며 시린 아픔을 주던 종이접기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아픕니다.

문득 휴직의 끝을 앞두고 고민하던 우리 부부의 지난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둘째를 낳고 나서 직장을 다니고 싶어하는 마눌에게 "나는 당신이 가정에 기여한 것은 내가 너무나 잘 알어. 그리고 나는 당신과 낳은 우리 두 아들이 고맙고 당신이 집에서 편안히 있었으면 좋겠어. 굳이 당신이 경제적인 이유를 언급한다면 아들 당 2억의 가치를 당신은 우리에게 선물한거야. 내가 그리 알고 더 열심히 할께." 라고 설득하여 몇 백대 일의 경쟁율을 뚫고 들어갔던 10년차 회사를 그만 두게 했던거죠. 마눌도 마음 속으로는 그러길 원했다 라고 했지만 그 마음이 다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압니다. 이 책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많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몰랐건, 조금만 알았건, 모른 체 했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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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이런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건강도, 젊음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육아를 위해 결국 직장을 그만둔 김지영 씨를 위로한다며 열심히 돕겠다고 하는 남편에게 “그 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라고 소리쳤다.

엄마가 되면서 개인적인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로부터 배제돼 가정에 유폐된다. 게다가 아이들을 위한 것만 허락된다

책을 덮고 나서 옆에서 아이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마눌이 순간 위대해 보이고 동시에 안쓰러워 보인다. 그리고 얼마 전에 두터운 앨범 속에 잠자고 있던 마눌의 인화사진 200장 정도를 모두 .jpg 파일로 변환해서 휴대폰에 넣어 준 적이 있었는 데, 20대의 청순함과 애교를 가득 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나의 마눌이 너무 아름답고 내겐 확실히 아까운 여자였음이 기억나면서 순간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들키기 라도 할까 봐, 어이구, 왜 이리 덥지 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들켰다면 여성호르몬이 늘어나 울보가 되었다고 아마도 며칠을 놀리고 또 놀렸을 마눌이다.

마지막으로 김지영이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에서 나는 갑자기 몇 년 전에 보았던 “응답하라 19OO”이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나던데,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았나요? 갑자기 응답하라 시리즈를 언급하는 것은 소설 속의 김은영, 김지영, 이 성장기의 주인공들이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과정이 마치 “응답하라 1988”에서 반지하에 세들어 사는 성동일/이일화 부부의 2녀 1남, 성보라, 성덕선, 성노을의 성장과정을 연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드라마가 일반적인 서민의 삶을 반영했기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대표성에 더 부합하는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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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마눌이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왠만해서는 꿈쩍도 안 하더니 결국은 여자는 여자구나 싶었어요. 그 동안 잘 버텨준 것도 감사하고 이것저것 미안한 것이 많던 터라,,,”그래, 며칠 푹 쉬고 나와” 하며 마눌을 병원에 두고 5일동안 아이들을 어떻게 챙기나 하는 고민에 쌓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퇴근하고 병원을 찾은 저는 마눌에게 응답하라, 1994를 볼 수 있도록 다시보기 링크를 테블릿에 걸어주었어요. “응칠”에서 “응사”를 거쳐 최종? “응팔”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마눌이 하루 만에 다 보고는 다음 편 연결 어떻게 하냐고 채근했었죠.

방금 전에 써칭을 해보니, 벌써 응칠은 6년 전의 드라마였군요. 이때만 해도 tvN같은 방송국의 시청율은 공중파와 비교할려면 x10은 해야 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응답하라 1997 : 2012.07.24 ~ 2012.09.18 (16부작), 시청률 (1회 3%, 종편 5%)

응답하라 1994 : 2013.10.18 ~ 2013.12.28 (21부작), 시청률 (1회 8%, 종편 2%)

응답하라 1988 : 2015.11.06 ~ 2016.01.16 (20부작), 시청률 (1회 15%, 종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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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이 책을 마눌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했습니다. 막내로 자란 내 마눌의 여자로써의 지난 삶을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이 소설을 기억하는 한에는 좀 더 잘해주고 싶다고 말입니다. 많은 어머니들, 정말 수고하셨고 그대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이해하고 여성분들이 이제 제 목소리를 속해있는 모든 곳에서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책이 논란이 되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은 이념서도 철학서도 아니며 단순히 나눔과 배려의 책이라 생각이 되는데, 살아보지 않은 삶을 내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난 그저 독자로써 공감만 할수 있으므로,, 남자들의 아픔도 또한 많이 있겠고 나는 본능적으로 거기에 공감이 더 잘 되겠지만 삶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하기엔 너무 많은 편차가 존재하니까,,,,,, 닥치고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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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였던 책을 읽어보셨군요.

논란이 있었나요? 전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이지만 딸이 있었다면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던 책입니다.

엄청 뜨거운 감자이지요.
무거운 주제로 post를 하셨군요.

그렇군요. 전 워마드와 일베의 다툼에 대해서도 의미를 느끼지 못해요.
이 책은 제가 보기엔 이념의 책이 아니라 나눔과 배려의 책이라 생각이 되는데,
제가 살아보지 않은 삶은 제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고 난 그저 공감만 할수 있으므로,,남자들의 아픔도 또한 많이 있겠고 저는 거기에 공감이 더 잘 되겠지만 삶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하기엔 너무 많은 편차가 존재하니까요,,,,저 테러 맞는 거 ㄴ아니죠? 뜨거운 감자가 뭔지 찾아봐야 겠군요. ㅎㅎ

맞는 말씀이세요.
그런데 서로의 주장만을 말하고 있으니
민감한 것이 되어버린 것 같네요 ㅎ

저도 몇일전에 읽어보았는데, 글에 쓰신것 처럼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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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스팀잇 책리뷰대회 2주차 보고 + 기간 연장 공지

아이쿠, 높으신 양반이셨군요. 이런 영광을 대외적으로 상받은 건 초등과 군대 이후 처음인 듯합니다. 먼저 감사하고 좋게 봐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좋은 책 많이 보고 또 올릴께요.

앗... 높진 않아요. ^^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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