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

in #kr-buddha6 years ago

from 지덕스님

죽음 이후, 중음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 이렇게 보고 느끼는 현상이 모두 다 사라지고 난 후에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전을 중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보통 우리들이 ‘중음’ 이라고 하면 죽음 이후 몸을 받기 전까지를 말하지만, 밀라래빠 같으신 분들은 이 윤회계가 다 중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죽음 이후 다시 몸을 받기 전 사이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음이란 말의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중음의 몸을 얻는 경우와 얻지 않는 경우 두 가지가 있는데, 선근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눈을 감는 순간에 아미타 정토나 아촉불 정토나 문수정토로 바로 갑니다. 중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도 죽자마자 바로 지옥으로 가며 중음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들처럼 나쁜 일도 많이 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닌 적당한 범부들은 대부분 바르도, 중음을 겪게 됩니다. 보통 티벳불교가 네 파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샤까, 까규, 닝마, 겔룩의 각 파마다 바르도 중음에 대해서 각각 다르게 나누고 있습니다.

중음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태어나서 살아있을 때의 중음이 있고,
꿈에서의 중음이 있고,
다음 생을 받는 중음이 있습니다.

중음을 세 가지로 말하든, 네 가지로 말하든, 여섯 가지로 말하든,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지 스승들께서 필요에 따라서 설명을 하다보니까 세 개, 네 개, 여섯 개로 말을 하지만 서로 어긋나지 않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낮의 꿈 중음과 선정삼매의 중음은 태어나 있는 상태의 중음에 속합니다. 자연스러운 생, 자연 생 중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금 이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상태도 중음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즉 의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임종이지만 뇌호흡이 끊어지지 않았을 때까지는 자연스러운 생 바르도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중음,
우리들이 가장 컨트롤이 안되는 중음은
바로 죽고 나서 네 번째가 의식 업 중음 이라고 해서
죽고 나서 의식이 업을 따라다니는 중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의식이 업을 따라다니는 것은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중음을 잘 소화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법을 듣는 인간의 몸을 얻었고 스승님들이 오셔서 계속 수행을 이끌어 주셔서 지금 내가 수행할 기회가 있고 에너지가 있고 의욕이 있는 이 상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죽기 전에 우리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합니다.

죽고 나서 의식을 하고 영가를 불러와서 음식을 주고 법을 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하는 것이 도움은 되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별로 그런 것이 없지만 인도에 가보면 사방으로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개가 엄청 많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돌아다니는 개처럼 중음에서는 의식이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살아있을 때 어떻게 수행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구루린포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타인이 나를 찌른 후에 갑옷을 입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죽어갈 때 내가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긋난 것이다’

라마샹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업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조심하고, 막고,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죽기 전에 악업을 짓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좋긴 하지만 늦은 감이 있습니다’

적천보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수행을 할 시간도 있고, 수행할 수 있는 선근과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 좋은 기회에도 수행을 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좋은 기회를 언제 얻겠는가? 이 좋은 조건에서도 수행을 못했는데 나중에 더 안 좋은 조건이 될 수도 있는데 그때에 어떻게 수행을 하겠는가?’

하싸에 큰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을 때가 되자 스님께 ‘라마, 라마, 제가 죽지 않게 좀 해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하라는 일 무엇이든 다 할께요’ 라고 부탁했고 그 라마께서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죽을 업이 안되었는지 아니면 발원력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사업가에게 ‘이제 안 죽었으니 지금부터 예비수행을 하십시오. 네 가지 의식을 십만 번 하는 것을 하십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해에 그 라마께서 하싸에 가셨을 때 꼬라 도는 곳에서 그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가행을 하고 있냐고 물으니 ‘내가 지금 죽을 시간도 없는데 수행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파서 죽어갈 때 자신을 죽지 않게 해주면 수행을 하겠다고 했는데 그 라마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는 딱 경계선입니다.

잘하면 해탈과 일체종지를 얻어가고
못하면 축생과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을 결정짓는 경계선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지금 경계선에 와 있는 우리를 인신보배라고 말합니다. 금, 은, 보석, 다이아몬드 이런 것을 보배라고 하는데 왜 우리를 보배라고 할까요? 금은 얻어봤자 이생에 조금 잘 먹고 편하게 사는 정도지만 이 몸을 얻어서 잘 쓰면 불과를 얻어 세세생생 자유롭게 잘살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합니다.

잘못 쓰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석보다도 더 귀한 것이 바로 이 몸입니다. 보통 인신보배라고 할 때 남을 보고 인신보배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보십시오.

  1. 4 .24 .
    전남 대원사에서 켄보로쌀님이 하신 중음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