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애

in #kr-buddha6 years ago

김각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부처님 자신도 감각에 즐거움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이 세상에 즐거움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이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세상의 모든
존재로 하여금 감각을 끈질기게 추구하도록 몰아간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이렇게 감각에는 즐거움이 있지만, 짧은 즐거움에 비해 그 대가는 엄청 큽니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보는 반면 어리석은 자는 감각에서 단지 즐거움만을 보고 그것의 결점과 위험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들이 감각적인 것에 대해 추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보살(보디삿따:깨달음을 얻기 전의 붓다에 대한 호칭)은 엄청난 감각적 행복의 한복판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감각적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의 모든 시종들은 최고의 여성들이었고 남성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든 연주자들이 여성이었고 무용수들 역시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즉 그는 강렬한 감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보게 되었을 때,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감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에 대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각적 행복입니다.
감각적 행복이 이들의 최고 목적이고, 그들은 이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어릴 때부터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면 삶에서의 각자의 위치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자신이 누릴
감각적 행복도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설명일 뿐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익이나 명성과 같은 감각적 성취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각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감각적 행복을 누리는 시간 중 어느 것이 더
긴가요? 우리는 자신의 감각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지만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행복은 짧습니다.
여러분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불선한 것들인데, 감각적 행복을 즐기며
보내는 그 짧은 시간 역시 불선합니다.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탐욕의 집, 증오의 집, 망상의 집, 자만의 집, 질투의 집 그리고 인색함의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러한 집들은 정말로 좋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집이라고 불리는 물리적인 주택에 살지만, 대다수가 정말로 거주하는 곳은
탐욕, 증오, 망상, 자만, 질투 그리고 인색함의 집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오염원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고 살아가는 내내 우리를 괴롭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행히도
그것들의 손아귀에 잡혀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진짜 집이 되었습니다.

법구경 주석서』에서는‘부주의한 자들에게 사악처는 그들의 영원한 고향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자신이 손님이나 방문객으로 있는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계와 천상계는 단지 적합한
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곳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자신의 오염원들을 싸서
우리의 진짜 집인 사악처 중 어딘가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리가 감각적 목적을 향해 행군하는 가운데 행했던 모든 행동과 축적해 온 업들은 불선한 행동
이며 불선한 업들입니다. 이러한 불선업들이 결실을 맺으면 우리는 사악처에서 고통 받게 됩니다.
이것들이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이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을 즐길 생각만 하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 감각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 아니 그들의 삶 전체를 보냅니다.

사람들은 목적과 목적에 이르는 방법 중 무엇을 더 중시하나요? 사람들은 목적을 더 중시합니다.
그리고 목적만 이루기를 바랄 뿐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목적을 향해 가는지는 깊이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목적을 달성하는 그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많은 불선한 행위를 하고
많은 불선업을 쌓습니다.

반면, 현명한 자들은 그들이 감각적 목적을 향해 가며 쌓은 모든 업의 결점과 위험을 보고,
그 위험을 두려워합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감각에서 단지 행복을 보고 즐기지만, 때가 되면
과거에 자신들이 행한 바라밀과 쌓은 선업의 도움으로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보게 되고,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습니다. 하지만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위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출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매우 적습니다.
여러분은 왜 출가할 수 없나요? 그것은 여러분이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못 보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이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감각에 대한 추구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은 매우 부유했고, 많은 추종자들, 동료들과 함께 호화로운 집에서 살았습니다. 감각의
행복만을 보는 사람들은 보살이 왜 집을 떠나 집 없는 삶을 선택했는지 의문을 갖고 그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현명한 자만이 집을 떠나 집이 없는 삶을 선택합니다. 현자들은 고대에도 이 길을
선택했고 현재에도 이 길을 선택하며 미래에도 또한 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출가 할 수 있는 자들은 감각에 내재한 결점과 위험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적 즐거움의 결점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개의 빨리어 단어들‘ 앗사다(assāda), 아디나와(ādinava)
그리고 닛사라나(nissarana)’를 사용하셨습니다‘.
앗사다 (assāda)’의 뜻은 감각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보는 것이고‘,
아디나와(ādinava)’의 뜻은 감각에 내재한 결 점과 위험을 보는 것입니다.
감각의 결점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을 선택한 이들은 감각으로부터 벗어남,
즉 ‘닛사라나 (nissarana)’를 달성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samudaya)이란 것을 모른다.
오히려 집착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집착이 없으면 삶이 따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운 감각 대상, 음식, 옷, 그룹, 벗 들을 찾는다.
그들은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삶을 무료하게 여긴다.

그와 같이 일반인들은 집착이 없으면, 삶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
삶의 즐겁지 못한 모습을 보지 않고,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애’다.
그래서 갈애를 제거한 아라한은 삶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라한은 조건 지어진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항상 마음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면 갈애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몇몇 수행자는 과거와는 달리 삶을 즐기지 않게 된다.
집중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종종 가정생활을 지루해 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수행자가 잘난 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의 행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사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수행자가 느끼는 따분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머지않아 가정생활에 다시 적응하게 될 것이다.
가정생활에 대해 완전히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의 이러한 일시적 기분 상태나 행동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을 조사해보고,
얼마나 진정으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갈애에 휘둘리고 있다고 알아야 한다.

갈애가 없다면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우리는 괴로움(dukkha)을 보지 못하고 행복(sukkha)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 듯이 즐길 거리를 찾는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
이런 유흥에는 시간과 돈이 들지만 사람들은 갈애로 인하여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갈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들 유흥거리는 괴로움의 원천일 뿐이다.
괴로움의 원천인 갈애는 비틀 잎(빈랑(檳榔) 나무의 잎사귀 속에 각종 열매와 첨가제 등을 넣어서 씹는 기호품)을 씹는 습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잎 씹기를 즐기지만 실제로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습관이다.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와 비틀잎 씹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갈애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 갈애가 부추긴 노력이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탄생의 주된 원인이 된다.

괴로움과 그 원인인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심오하며,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 안에는 마음으로부터 화와 미움과 그리고 폭력을 제거하는 모든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에서 종종 어떤 일에 대하여 화나 짜증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느낌들이 자신의 마음 안에 상주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화의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억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화를 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여덟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붓다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붓다께서는 성냄의 어리석음과 불이익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그의 가르침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강도들이 그대들 중 한 사람을 잡아서 사지를 톱으로 자른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그가 그 순간 화를 낸다면, 그는 결코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가 아니다.
( Kakacupama Sutta, Majjhima Nikaya 21)

불타는 장작더미의 나무처럼 모든 부분이 타 버리고 중간 부분이 오염되었다면,
땔감으로도 쓸 수 없고, 목재로도 쓸 수가 없다.
화를 내는 사람은 그것과 같다.( Anguttara Nikaya II, 95)

그가 나을 비난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좌절시키고 나의 재산을 강탈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머무는 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증오심을 가라앉힐 수 없다.
미움은 결코 미움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미워하지 않음에 의해 진정될 수 있다.
이것은 진실로 영원한 법칙이다. (법구경, vv. 4-5)

그 누구에게도 욕설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대가 욕을 한 자로부터 언젠가는 돼 받게 된다.
성내는 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다치게 하고, 그 대가로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다.( 법구경, v. 133)

참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규범이고, 인내는 가장 높은 덕목이다. (법구경v. 184)

자신의 화를 제거토록 하라. 자만심을 뿌리 뽑고 부질없는 열정들을 극복하여야 한다.
이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자에게는 어떠한 괴로움도
그에게 있을 수 없다. (법구경 v.221)

화내지 않음에 따라 화를 다스리고, 선함에 의해 악을 다스리고,
베풂으로 탐욕과 인색함을 다스리고,
진실에 의해 거짓을 다스린다. (법구경 v.223)

잘못된 감정들이 분출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돌보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제어하고 잘못된 생각들을 포기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도록 하라. (법구경 v233)

만약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숙고하였음에도 자신의 화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하여야 한다.

그대는 알고 있듯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선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 안에 악의를 품고서도 전혀 의심받지 않게, 속이는 말이나 교활한 행위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말은 거치나, 마음과 행위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는 거칠고 가혹해도, 말과 마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행위는 물론 마음도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게 화가 날 때,
우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말, 행동 중에서 그가 지닌 좋은 점을 보도록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 안에 존경할 만한 자질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가치를 곰곰이 생각하여,
그들의 나쁜 자질들은 우리 모두에게 찾을 수 있는 본래의 약점으로서 그것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부드럽게 되고, 그들에게 친절한 느낌을 지닐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방식의 생각들을 지니고 계발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화를 억제하고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또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화가 나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사유하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의 마음을 망쳐버렸다.
그렇다면 그러한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나 자신의 마음을 망치고 손상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종종 나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나 관심을 무시한다.
그러한 나의 행위로 인해 간혹 그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러한 내가 저런 어리석은 자의 행위를 무시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또는, “그는 화로 인하여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
나 역시 그처럼 내 마음을 화에 제압 당할 필요가 있는가?
그처럼 따라 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는가?
화를 품음으로써 그는 자신을 내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러한 그 때문에 내가 나의 명성을 망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갈애가 슬픔을 낳고, 갈애가 두려움을 낳는다.
갈애에서 벗어나면 슬픔이 없는데, 두려움이 있겠는가?

by 아난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