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5] SIGN(4)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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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Dog King(1)
Chapter 1 - Dog King(2)
Chapter 1 - Dog King(3)
Chapter 2 - HERO(1)
Chapter 2 - HERO(2)
Chapter 2 - HER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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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Vertigo(1)
Chapter 3 - Vertigo(2)
Chapter 3 - Vertig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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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Lucifer Effec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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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SIGN(1)
Chapter 5 - SIGN(2)
Chapter 5 - SIGN(3)

어김없이 편두통이 찾아왔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불청객의 방문에 신일은 달궈진 이마를 짚어 눌렀다.
화장실에 들러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천천히 돌려 연다. 얼굴에 물 몇 방울 묻히는 걸로 이 통증이 사라질 리 없지만, 납덩이처럼 굳은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만한 처방이 없다는 걸 신일은 잘 알았다.

오후 들며 붓기는 좀 가라앉았지만,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볼품없이 구겨져 있다. 온종일 태워댄 줄담배 때문일까. 검누래진 피부 위로 팔자주름이 도드라지게 새겨졌다.

코끝 뾰루지가 아침보다 붉게 뭉쳤다. 종이 타월로 닦아낸 얼굴에선 뽀드득 뽀드득, 물기 빠진 마찰음이 났다. 심호흡을 내쉬며 신일은 천천히, 물을 잠갔다.

수사관은 이번에도 원한범죄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범인이 이번 메시지를 통해 암시하려는 게 프로크루스테스라면, 그의 원한은 틀림없이 류 대위의 불통한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역시 신경이 쓰이는 건, 편지의 도입부다. 범인은 상대와의 머리싸움을 즐기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자다. 그런 자가 아무 의미 없이 4행에 걸쳐 고전 비극의 대사를 할애했을 리 없다.

후, 벌써 몇 번째 같은 자리를 맴도는 건가. 신일은 문득 제 자신이 라비린토스를 헤매는 미노타우로스 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 또한 범인이 의도한 걸 테지. 결국,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린 범인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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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미궁(Labyrinth), 1991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 벨에 퍼뜩 정신이 든다. 그래, 이렇게 가만히 머리만 쥐어뜯는다고 답이 나오진 않는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다보면, 뭔가 떠오를 지도 모른다. 신일은 진동 벨을 힘없이 움켜쥔 채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혜원은 여전히 서류뭉치와 씨름하며 통화 중이었다. 휴대폰을 왼 어깨에 걸친 채 양손으로 쉴 새 없이 자료를 넘겨보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절박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오후의 볕을 즐길 여유 같은 건 없을 게다. 새로 떠온 물 잔을 쑥스럽게 건네며 신일은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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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피해자의 이름은 류. 준. 입니다. …아니요. 「유」가 아니라 「류」요. 류 씨라고요.”

큭. 갑자기 터진 웃음에 신일은 마른기침을 콜록거렸다.

“여보세요? 제 목소리 안 들리세요? 여보세요?”

신일을 힐끗거리던 혜원의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진다.

“아, 이것 참… 끊어져 버렸네요. 망할 놈의 전화기… 빨리 바꾸던지 해야지, 원…”

혜원은 대차게 혀를 차며 수화기를 덮었다. 입까지 쌜룩거리는 그녀를 보며 신일은 멋쩍게 기침을 삼켜 그쳤다.

“물 한 잔 떠왔어요. 이거라도 좀 드시고…”

“아, 예 감사합니다.”

혜원은 커피 자국 남은 머그잔을 내려놓고 물잔을 들었다. 투명한 컵에 비친 가을볕이 싱그럽게 반짝거린다.

“신일 씨는 좀 괜찮아요? 사래 들린 것 같던데…”

“아, 예. 별 거 아니에요.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옛날 생각?”

“…군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이거든요.”

류 대위의 흔치 않은 성(姓)에 얽힌 해프닝, 그건 신일과 동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처음 그의 이름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류 대위의 성을 되물었으나, 수신 상태가 불량한 통신장비로 리을과 이응의 발음을 단번에 구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군에서요?”

군에서 있었던 일화라는 말에 혜원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건에 관한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아보려는 절실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건 신일이 별 생각 없이 꺼낸, 시시껄렁한 잡담일 뿐이었다.
가벼운 주제로 분위기나 좀 누그러뜨려 보자는 거였는데… 잔뜩 기대감에 부푼 그녀를 실망시킬 생각에 신일은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 아니요. 이번 사건이랑 관련된 얘기는 아니고요. 혹시 방금 통화하실 때… 류 대위 이름 때문에 통화가 길어진 거 아닌가요? 전화 받으시던 분이 준이의 성이 유 씨인지, 류 씨인지 헷갈려하신 거 같던데…”

“아, 그거요. 예, 맞아요. 이거 참 민망하네요. 안 그래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이런 사소한 게 사람 속을 긁어 놔서.”

“수화기로 들으면 발음 구별하기가 쉽지 않죠.”

“그렇죠. 군에서도 이런 일, 자주 겪으셨나 봐요.”

“그럼요. 처음 류 대위의 이름을 물어 본 분들이 나중에 몇 번 씩 다시 전화해 성(姓)을 재차 확인하곤 했으니까요.”

“그것도 꽤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겠어요.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다보면.”

“나중에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죠. 전 괜찮은데, 같이 일하던 병사들은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거예요. 서류 같은 데에 이름이 「유준」, 이런 식으로 찍혀 나가는 날이면 류 대위가 사무실을 뒤집어 놨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닌데.”

“다 그런 거죠, 뭐.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면 그 분도 꽤 속상했을 테니까요.”

“오죽하면 나중에는 애들이 통화할 때 준이의 성을 가르쳐주는 팁을 따로 만들더라니까요.”

“팁?”

“예, 준이의 성을 얘기할 때 「버들 류(柳)」나 「흐를 류(流)」처럼 한자 두음을 같이 말해주는 거예요. 상대방이 헷갈리지 않도록….”

“아, 그거 꽤 효과적인 방법 같네요.”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덜 헷갈리죠. 이따 통화할 때 한 번 써먹어 보세요.”

“고마워요.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재미있네요. 확실히, 군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는 요령 같은 게 많이 있는 모양이에요.”

마침내 혜원이 쑥스럽게 웃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소정의 성과는 달성했다고 봐야겠지. 신일 역시 간만에 해맑은 웃음을 머금는다.

감히 성취감이라 할 만한 감정을 추스르며 신일은 가만히 혜원의 말을 곱씹었다. 돌이켜 보면, 군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요령이 어디 한두 가지였던가. 군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수많은 원칙들과, 그걸 티 안 나게 「지키지 않기 위한」 그보다 훨씬 많은 자잘한 팁들. 그곳에서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기존의 요령을 터득하고, 자기만의 노하우를 만드는 건 필수였다.

뭐, 그것도 일종의 요령이었던 셈인가. 신일은 그제야 담배 한 모금을 다시 넘기며 초조하게 졸인 마음을 달랬다.

진하게 밴 니코틴을 목 뒤로 넘기는 순간, 왼쪽 귓불 뒤에서 오른편 앞 편으로 하얀 불똥이 스쳐 지난다.

철컥. 어디선가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머릿속을 울리는 기묘한 합체음, 그건 마지막 남은 퍼즐조각이 제자리에 놓일 때 나는 소리였다.

“신일 씨 왜 그래요? 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신일은 떨리는 손으로 짤막해진 담배꽁초를 재떨이 속 커피가루에 묻었다.

“혜원 씨….”

“예.”

“저, 용의자를 추려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요, 용의자를요?”

제기랄, 왜 진작,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범인은 한 대령님이 대대장으로, 류 대위가 보급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저와 함께 일하던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신일 씨와 함께?”

“예, 간부보다 병사, 그러니까 조교 출신일 가능성이 높고요. 특히 진하가 근무한 이후의 조교들, 그들의 최근 행적을 확인해 보세요.”

“자, 잠깐.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진하, 그럼 마진하 역시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는 건가.”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 보세요. 그래야 저도…”

“아직, 아직 이요. 일단 그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조사해주세요. 저도 확인해봐야 할 게 있어서요.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