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측면도 있고, 다른면도 있습니다.'往來用變’과 ‘不動本’으로 用이 움직이지 않는 本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측면에선 둘이 작용과 본질이란 방식에서 같다고 보는 것이니까 ⟪법성게⟫와 다르지 않습니다만, '一'과 '十方'의 관계는 양쪽 모두 근본적인 것과 지말적인 구분이 없습니다.@alexshin님^^ 저희들은 불교철학 전공자들이라 ⟪천부경⟫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저희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본'이 중심이고 '용'이 지말작용이란 중국의 체용론과 ⟪천부경⟫이 그 궤를 같이 한다면, ⟪법성게⟫가 말하는 '용'에 대응시킬 수 있는 개념 '시방'은 그 각각이 '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대로 '본'입니다. 즉, ⟪법성게⟫에선 '용=본'이 아니라 전부 '본'으로, '용'이 없습니다. 용이 없기 때문에 그 상대적 개념인 본도 설정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본이란 개념도 무의미해 집니다. 이런측면에선 ⟪천부경⟫의 用變不動本과 ⟪법성게⟫의 一微塵中含十方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같은 측면도 있고, 다른면도 있습니다. '往來用變’과 ‘不動本’으로 用이 움직이지 않는 本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측면에선 둘이 작용과 본질이란 방식에서 같다고 보는 것이니까 ⟪법성게⟫와 다르지 않습니다만, '一'과 '十方'의 관계는 양쪽 모두 근본적인 것과 지말적인 구분이 없습니다.@alexshin님^^ 저희들은 불교철학 전공자들이라 ⟪천부경⟫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저희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본'이 중심이고 '용'이 지말작용이란 중국의 체용론과 ⟪천부경⟫이 그 궤를 같이 한다면, ⟪법성게⟫가 말하는 '용'에 대응시킬 수 있는 개념 '시방'은 그 각각이 '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대로 '본'입니다. 즉, ⟪법성게⟫에선 '용=본'이 아니라 전부 '본'으로, '용'이 없습니다. 용이 없기 때문에 그 상대적 개념인 본도 설정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본이란 개념도 무의미해 집니다. 이런측면에선 ⟪천부경⟫의 用變不動本과 ⟪법성게⟫의 一微塵中含十方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닺 댓글이 늦었습니다.
불교철학자라하믄 대학교에서 전공을 하시는건가요?
@alexshin님^^ 안녕하세요. 넵 그렇습니다. 대학원에서 전공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엄밀하게는 '철학자'는 아니고 '철학 전공자'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