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의 모험 The Adventures of Duri │제20화 Episode 20│ 코로만델 탐험기 (2) ─ 작은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다

in #kr5 years ago



The Adventures of Duri




두리의 모험











제20화 코로만델 탐험기 (2)


작은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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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Ginger family / ⓒchaelinjane, 2018




 해변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석양이 사라지자 허기가 빈 하늘을 채웠다. 예약해둔 비앤비는 핫 워터 비치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 대형 마트가 세 개나 들어서 있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키위들의 휴양지라는 피티앙아(Whitianga)의 거리는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다. 마트에서 저녁으로 해먹을 식재료를 샀다. 외식을 해도 큰돈을 쓸 작정이 아니면 특별한 요리를 만날 확률이 높지 않았기에 차라리 좋은 재료를 사서 만들어 먹는 편이 나았다.


 비앤비는 완전한 침묵에 휩싸인 주택가 안에 있었다. 어찌나 조용하던지 여행의 설렘으로 소란스러워진 마음이 멋쩍을 정도였다. 가로등 몇 개만 드문드문 거리를 밝히고 있어서 번지수를 찾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살펴봐야 했다. 아, 여기다. 5번지. 피피 듄. 문을 두드리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셨다. 우리가 이틀 동안 머물 방과 거실, 부엌 등을 설명해주셨다. 부엌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여쭈어보았다.


 혹시 저녁을 만들어 먹어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이어지는 할머니의 단호한 대답.


 미안해요. 간단하게 커피나 차를 마시는 정도는 좋지만 요리를 하기에는 곤란합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집에 주방이 잘 갖춰져 있고, 나는 비싼 돈을 내고 온 손님이니 당연히 오케이 사인이 돌아올 줄 알았다. 기대가 허물어진 마음을 숨기고 할머니를 향해 애써 방긋 웃었지만 나의 굶주린 배는 울고 있었다. 냉동실에 아이스크림 하나만 넣어놓고 나머지는 반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허기가 더욱 심해져서 여행 기분을 망쳐 놓기 전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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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립어드바이저에서 피티앙아의 음식점들을 살펴보았다. 휴양지답게 늦은 밤까지 운영하는 레스토랑들이 꽤 있었다. 피피 듄 비앤비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그리 크지 않은 번화가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식당들도 그 주위에 모여 있는 듯했다. 우리는 음식점 세 곳 정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둘러보다가 분위기와 음악을 살펴보고 가장 마음이 끌리는 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어둑한 불빛과 정체를 알기 힘든 인테리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밝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한 레스토랑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배고픔이 망설이는 마음을 다그치고 혼란스러운 세계로 발을 움직이게 했다.


  어서 오세요!


 반가운 환영에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시안 퓨전 음식점이었다. 외국인들로 가득한 레스토랑에 우리 둘만 아시아인이었다. 내가 앉고 싶은 자리는 노랗고 붉은 등이 올려져 있는 피아노 바로 앞자리였지만 거기에는 이미 아빠와 아이 두 명이 국수를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아 있는 자리는 구석에 있는 작은 2인용 테이블 밖에 없었지만, 조금만 늦게 왔어도 이 자리마저 앉지 못할 뻔했다. 테이블 사이의 좁은 간격을 헤집고 들어갔다. 내 자리 뒤로는 물이 흐르는 아주 작은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이 번잡한 분위기 사이로 눈을 지그시 감은 돌부처가 놓여 있었다. 가게 곳곳에는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이 각자의 개성을 뽐냈다. 머리 위로 마이클 잭슨의 'Black or White'가 레게 버전으로 흘러나왔다. 모든 것들이 퓨전된, 그야말로 진정한 화합의 순간이었다.


 스태프가 가져다준 메뉴판에는 흥미로운 아시안 음식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한국식 매운 닭날개 튀김'과 '한국식 지글지글 매콤 불고기', 그리고 사이드 메뉴로 김치도 적혀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정했을 즈음 스태프가 다시 다가왔다.


 음식은 정하셨나요? 이번에 새로 나온 메뉴가 있어서 소개해드리려고요. 여러 가지 채소와 양념을 비벼 먹는 '비빔밥'입니다!


 푸핫. 세상에! 이 낯선 땅에서 뉴질랜드 사람이 우리에게 비빔밥을 권할 줄이야. 그것도 아주 자랑스러운 태도로 말이다. 뉴질랜드에서 먹는 비빔밥이 어떨지 궁금했지만 우리는 이미 무엇을 먹을지 정한 상태였다.


 저희는 한국에서 왔어요! 뉴질랜드에서 만든 비빔밥을 먹어보고 싶지만 저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음식이라서요.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더 경험해보고 싶어요. 그래도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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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식 국수 볼(왼쪽, $24)과 태국식 가지 & 녹색 채소 카레(오른쪽, $24) / ⓒchaelinjane, 2018





 휴가 첫날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으니 두두가 주문한 베트남식 국수 볼이 나왔다. 바삭하게 구운 돼지고기와 스프링롤, 그리고 샐러드가 국수 위에 푸짐하게 얹어 있었다. 고소한 소스에 스프링롤을 찍어 한 입 먹고, 돼지고기 위에 샐러드를 올려 국수와 함께 먹었다. 고기의 바삭한 식감이 지나간 자리에 차갑고 부드러운 면이 혀를 감쌌다. 굶주린 상태에서 입에 들어온 것이 이토록 일품이라니!


 곧이어 내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다. 가지와 녹색 채소가 들어간 태국식 크림 카레는 더욱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걸쭉한 크림소스는 은근한 매운맛을 품고 있었다. 나는 땅콩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요리는 땅콩으로 맛의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땅콩의 단단한 식감이 두툼한 스펀지 같은 가지와 잘 어울렸다. 평소에 먹기 힘들어하던 고수도 이 요리 안에서는 꼭 필요한 맛이었기에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결국 밥 한 공기를 더 시켜서 소스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다. 재료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셰프의 솜씨였다. 손님으로 하여금 좋아하지 않는 식재료조차 맛있게 먹게 만드는 것이 요리를 하는 사람이 부리는 최고의 마술이 아닐까.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먹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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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족스러운 식사에 대한 답례로 이곳에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나는 다이어리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지난겨울 대만 루오동에서 가져온 엽서를 발견했다. 루오동의 역사적인 병원 건물이 그려진 오래된 펜화 엽서였는데, 한자가 적힌 벽면과 위화감 없이 어울릴 것 같았다. 계산을 하면서 우리에게 비빔밥을 권했던 스태프에게 엽서를 주었다.


 와, 정말 고마워요! 맛있게 드셨다니 무척 기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레스토랑의 셰프를 만나보시겠어요?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우리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커튼 뒤로 숨겨진 세계가 펼쳐졌다. 라스트 오더 시간이 지난 주방에는 직원들이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장난 아닌 포스가 느껴지는 중년의 남성이 낯선 이방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뉴질랜드에서 이렇게 맛있는 아시안 레스토랑은 이곳이 처음이에요. 아시아 사람들보다 아시안 음식을 더 잘 만드시는 것 같아요.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셰프이자 오너인 스미스 씨는 우리가 하는 말들을 경청하는 태도로 듣다가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런 작은 태도들이 요리에 스며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저 한번 들린 손님일 뿐이었지만 스미스 씨의 정중한 반응 덕분에 마치 우리가 마스터 셰프의 대단한 심사위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도 인연인데, 위스키 한 잔 하시죠!


 셰프는 마시던 샷잔에 그대로 위스키를 부었다. 커다란 옥반지를 낀 손으로 그 잔을 건넸다. 비싼 술인데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좋다고 말했다. 음식을 맛있게 먹은 만큼 시원하게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식도가 뜨거워져서 얼굴을 찡그리니 다들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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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Ginger family / ⓒchaelinjane, 2018





 감사의 인사를 한번 더 나누고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예의상 하는 인사말이라지만 진심으로 또 오고 싶은 레스토랑이었다. 주방을 나서자 우리를 안내해주었던 스태프가 작은 종이 상자를 건넸다.


 엽서가 고마워서요. 우리 가게에서 만든 당근 케이크인데 디저트로 드세요!


 맙소사. 케이크까지 선물로 받다니. 누가 본다면 이 가게의 오랜 단골손님인 줄 알았을 것이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집에 도착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각 케이크를 열었다. 요리만큼 케이크도 훌륭했다. 블루 진저 덕분에 휴가 첫날의 퍼즐 조각이 완벽하게 맞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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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bastian of Blue Ginger, Whitianga,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정성스러운 요리로 손님과 소통하는 가게. 요리에서 느껴진 절묘한 맛의 균형처럼, 친근함과 정중함의 밸런스를 갖춘 사람들. 저질 재료와 영혼 없는 레시피로 가장 기본적인 '맛'도 형편없는 음식점들이 많은 와중에 이런 보석을 캐내는 행운은 쉽지 않다.


 앞으로 무언가를 한다면 블루 진저의 태도를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그 일의 '기본'을 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그리고 호기심과 여유 있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 블루 진저에 방문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뉴질랜드에서 이곳을 뛰어넘을 만한 레스토랑을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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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du & Riri are the ones who develop each desire in each place. Dudu wants to live as a builder and Riri as a creator. Though there are a lot of different things between them, Dudu & Riri pursue the same values: living an independent life, fulfillment of a dream, learning & reading about things, living a future-oriented life, and the value of BEING TOGETHER.


목수로 살고 싶은 두두와 기록자로 살고 싶은 리리.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꿈을 키워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격도, 하고 있는 일도 다르지만 같은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주체적인 삶, 꿈의 실현, 배움에 대한 애정, 미래 지향적인 삶, 그리고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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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lin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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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뉴질랜드에 가면 꼭 가보고 싶군요. 꼭! 포스팅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히마판님! :-) 감사합니다. 뉴질랜드 코로만델 여행하실 때 들르셔서 입 호강하시길 바랄게요!!!! 헤헤 ;-D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네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구요.

히마판님이 남겨주신 두 줄의 글이 완벽한 설명이네요! :))
사람과 마음에 관한 특별한 경험은 언제나 잊지 못할 순간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

에구구 부끄러워유!

세프가 영화배우 같군요 ^^ 뉴질랜드 갈 일 있으면 한번 들러야겠네요 ㅎ
둘이 두리 여행기 계속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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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ㅎㅎㅎㅎ 몇 십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하며 습득된 미각 정보가 셰프로 하여금 이렇게 훌륭한 가게를 만들게끔 했더라고요. :-))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써나갈게요, 트루님! 응원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네요^^ 환상적인 경험을 하신 것 같습니다. 코로만델은 정말 멋진 곳이군요.

플레이팅도 넘 이쁘고, 사진만 봐도 음식이 맛있어 보여요.
가게 사람들도 다들 좋은 분들 같습니다. 저도 음식점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는데 사실 처음 보는 손님과 저렇게 스스럼 없이 어울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두리의 모험을 하시면서 멋진 경험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