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 소중한 것들의 사라짐에 관하여.

in #kr6 years ago

하루를 술로 시작하여 다음 하루의 술잔을 맞이할 때까지 취해 있던 신입생 시절이었다. 잔뜩 취한 새벽 3시, 학회의 선배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우리들에게 말했다. 『속도 안 좋은데 속을 풀어야지』 그리고 그들이 데려간 곳은 첫 인상부터 마치 70년대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번쩍이는 신촌 거리와 괴리감이 느껴지는 허름한 술집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라면 한 그릇과 소주잔이 놓였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라면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고, 본능적인 위기감에 물을 마시려 하자 선배가 말했다. 『라면 외에는 소주만 먹을 수 있어』 라면은 입술이 부르틀 만큼 매웠고, 매운 것을 이겨내고자 소주를 먹으면 매운 맛과 취기가 올라와 다시 허겁지겁 라면을 집어 삼켰다. 이런 악순환 뒤 먹은 계란말이는 안타깝게도 소주와 어우러져 구토를 야기했고, 나는 총체적 고통 속에서 훼드라와 첫 만남을 가졌다.

출처: 오마이뉴스

하지만 놀랍게도, 훼드라의 경험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것이 매저키즘일까? 나는 술에 취한 새벽이면 으레 훼드라를 찾았고, 언제나 퉁명스럽던 아주머니마저 익숙하게 느껴졌으며, 급기야 이듬해에는 신입생들에게 『라면 외에는 소주만 먹을 수 있어!』 라고 외치는 선배가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훼드리언(Fedrian)」이라고 불렀으며, 맵디 매운 해장라면을 「탈장라면」으로 부르며 사랑하게 되었다. 친절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뚝뚝한 이모님에겐, 무릎을 꿇고 웃으며 주문을 받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선 느낄 수 없는 진실이 있었다.

그곳을 공유했던 선배들은 운동권 학생들과 함께했던 80년대 훼드라의 역사를 이야기했고, 언제 가도 변하지 않던 그곳에서 술을 마실 때 나는 과거와 미래와 더불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연애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며, 나는 훼드라를 조금씩 잊어 갔고 가끔 간 훼드라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2010년 12월19일, 훼드라의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또 하나의 소중한 것을 떠나보냈음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일 것이다. 인간의 윤택한 삶과 더불어 세상은 변해 가고 그것이 발전이리라. 하지만 내 마음이 머물렀던 곳, 나의 추억이 살아 있던 곳은 내가 찾지 않는 사이에 서서히, 나를 떠나갔다. 독수리다방도, 연신원의 숲도 그렇게 나를 떠나갔다는 것을 느꼈고, 신촌은 마음 기댈 곳 없는 번쩍이는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훼드라가 없어진 자리에는, 이름은 바뀌었지만 똑같은 메뉴를 팔고 있는 주점이 들어섰다. 어쨌거나 오늘 나는 감기 걸린 후배를 이끌고 그 곳을 찾는다. 매운 라면 먹고 땀 빼면 감기가 낫는다는 근거 없는 처방을 들이대면서.

언젠가 이 가게도 시대의 흐름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번쩍이는 신촌의 가게들 역시, 또한 나 역시. 하지만 나는 사라질 그 순간이 올 때까지, 38년간 변함없던 훼드라처럼 살아가리라. 언젠가 사라질 내 곁의 소중한 것들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리라. 살아있는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시원한 물같은 존재가 되리라. 변화의 파도 아래서도 묵묵히 나의 「해장라면」을 지키며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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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추억의 훼드라. 마지막으로 라면 먹은 게 03년이었습니다.

ㅎㅎㅎ 제가 처음 먹은 시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ㅎㅎ

훼드라 할머니 돌아가셨어요? 헐.. 이글보고 알았습니다. 먹고사니즘에 바쁘다보니 ㅠㅠ

2010년경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ㅠ

가파른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서 낮은 천장 밑에 옹기종기 앉아 계란말이와 라면과 소주.... 없어졌군요... 3차나4차나 아니면 막차는 항상 거기였는데..

네 이상하게도 늘 막차로 가게 되는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ㅎㅎ 현재도 아주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같은 메뉴를 파는 가게가 남아 있습니다

에고..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도 감각과 기억, 그리고 이 글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헉 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섭네요ㅠㅠ

소중한 추억이 현재도 연장선상에 있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닐까 합니다. 훼드라 존버를 외쳐야 하는건가요? ㅎㅎㅎ

ㅎㅎㅎ 언젠가부터는 사라지는 것이 아쉽고 익숙해서 너무 많이 정을 주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와 필력 좋으시네요.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ㅎㅎ

짱짱맨 태그 사용에 감사드립니다^^
영문판 캘리의 식탁입니다.
https://steemit.com/art/@mmcartoon/comics-kally-s-kitchen-egg-avocado-salad

헐;;; 90년대 초반에 저희 학교 앞 술집도 아니었음에도 참 자주 갔었는데;;;;

이렇게 연배를 드러내시다니요ㅎㅎ 저는 한참 후배라 아마 훼드라를 좋아했을 거의 마지막 세대일 겁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영원할 것 같은 곳도
추억이라는 단어로 변화하는걸 보면
시간이 그만큼 빨리 지나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만큼 잊혀지지 말아야할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하시는 모습 응원합니다.

잘 보고 가요

감사합니다 신도자님ㅎㅎ

지금 신촌은 너무 휑 해요..
가는 세월 막을 수 도 없고 ㅠㅠ

추억 돋네요. 훼드라 탈장라면과 계란말이. 토이의 97년작 Present 앨범에 수록된 <애주가(愛酒歌)>라는 노래에도 등장하지요. "신촌 구석진 선술집엔 계란말이를 잘하시는 맘씨 좋으신 아주머니 생각만해도 편안해져"에 나오는 저 선술집이 훼드라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