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면 지옥 가"에 대한 생각

in #kr6 years ago (edited)

1 . 보수 개신교 목사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에 대한 예의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에 동의한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싶었다. 그저 애도하고 싶었다. 가슴이 시린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그들의 귀에 대고 "자살하면 지옥간대"라고 읊조리는 싸이코패스들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불행한 예감이 적중했고, 온갖 보수 개신교 목사들이 이때다 싶어 온통 자살=지옥, 그 사람 귀신 들렸다니 뭐니 말해대는 판에 불필요한 나의 글을 붙이게 되었다.

2 . 자살=지옥? 성경에 없다.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목사들일수록 별로 예수스럽지도 못하고, 딱히 성경적이지도 않은 설교를 남발하는 한국교회의 아이러니를 통감하면서. 성경이 자살을 이렇다 판단하지 않은 점에 대해 우선 말씀드리고 싶다.

성경은 자살에 대한 가치판단을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성서의 자살사례는 여섯번 나온다. 전투 중 여자가 던진 맷돌을 맞고 쓰러지자 여자한테 죽었다는 말을 안 들으려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던 폭군 아비멜렉, 블레셋 족속의 화살을 맞고 치명상을 입자 이방인에게 죽는 불명예가 싫다고 호위병에게 자신을 찔러달라고 했다가(호위병이 무서워서 못 죽인다) 스스로 창 위에 몸을 던져 죽은 사울왕, 왕에게 반역하는 압살롬을 도와 책략을 폈으나 자신의 책략이 받아지지 않자. 반역의 실패를 예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고 죽은 아히도벨.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힌 후 하나님께 기도하여 최후의 힘을 얻어 기둥을 무너뜨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은 삼손등등

성경은 이 모든 자살에 대해 좋다 혹은 나쁘다는 판단을 하지 않고 있다. 아히도벨의 자살의 경우 주목할 점은 그가 자살을 했음에도 아버지의 묘에 함께 묻혔다고 적혀있는데(삼하 17:23) 자살한 자의 무덤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게 기독교적이라고 보았던 서방국가들에게 성경에 쓰인 이런 구절은 아이러니할 정도다. 삼손의 죽음 역시 명백한 자살임에도 하나님의 용서와 최후의 비장미를 뿜어내는 듯한 그의 자살장면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보수 개신교 목사들 조차 멋진 장면으로 인용하는데 이건 참 모순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판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 관조적인 설명만 나올 뿐이지. 그의 자살에 대한 비난도 옹호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3 . "자살은 생명의 창조주에 대한 월권행위다"라는 말의 출처

"자살이 죄"라는 말은. "자살이 생명을 만든 신에 대한 월권행위"라는 식의 말은 사실 성경에 쓰여있는 말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학이 정립되던 역사과정 중 생겨난 말이다.

이 말은 초대교회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한 말이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도 100년이 훌쩍 지나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으며 제국의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는 로마에는 약탈과 강간이 일어났는데, 강간으로 인해 정절을 잃는 여성들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편 정절을 잃고도 자살하지 않고 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눈치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원하지 않았던 관계를 육체가 강제로 당했다고 영혼의 순결함이 오염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고 말했고, 또 "자살은 살인처럼 완벽히 나쁜 악이며 신이 원하는 거룩함이 전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그는 "생명은 신이 창조한 것인데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구절은 성경에 나온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파이돈」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성경에서 자살을 금하는 구절이 없기에 플라톤 책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자살에 대한 정죄를 기독교의 율법으로 규정할 생각은 없었다 ("적들 앞에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여인들에 대해 누구도 그녀들을 우매하다고 정죄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도 적혀있는 신국론의 내용을 보면 그의 의도가 선명해진다)

그의 초점은 자살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일을 당한 사람을 정죄해서 다시 한번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에 없는 말을 교리화 했지만 당시에 그의 말은 정말 성경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이웃이 무슨 악한 일을 당했든 서로를 더럽다고 또다시 죽음으로 내몰지 않고 존재를 긍정하고 품어주자는 예수의 시선, 성경적 이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은 곧 율법적 정죄로 교리화가 일어나게 된다. 기독교적 지옥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테의 신곡에서는 자살한 이가 살인한 자와 같은 형벌을 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자살=지옥이라는 공식은 기독교 문화의 서방세계에서 강하게 일어나는데 이런 역사와 문화가 크게 작용한 탓이다.

4 . 공동체의 아픔으로부터 빗나간 사랑

율법만 남은 믿음이 무서운 이유는 본래 목적이었던 선한 의도의 어떤 말도 서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칼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율법의 잔인함에 주목해보자. 어거스틴이 자살에 대해 한 말은 내 이웃이 피해를 당하고도 '정절을 잃었는데 자살안해?'라며 두 번 죽임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살에 대한 정죄가 율법화가 된 세상에서는 자살한 이의 가족들에게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 지옥갔대"라며 사랑하는 이를 잃고 죽음을 경험한 이웃을 또 다시 두 번 죽이고 있다.

지옥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다. 사랑이 없는 정죄가 넘쳐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모두가 태연히 "자살이야? 죄 지어서 지옥갔네"라고 말하는 사회는 자살하지 않고도 가볼 수 있는 지옥이다.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교회가 지옥인 것이다.

성경 속 예수는 영원에 속한 존재임에도 인간 나사로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비통해하며 운다. 영원을 가진 자라면 나사로의 죽음이 잠시의 이별에 지나지 않을텐데, 그는 사람들과 함께 안타까워한다. 이렇듯 신적인 사랑은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아픔에 뛰어드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연함과 신께 박수치는 찬양만이 거룩함인듯 포장된 한국교회에 이런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예수를 믿는 종교라면 이웃의 죽음에 대해서도 예수의 자세를 가졌어야한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율법적 정죄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시선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했던 예수의 첫째 계명이 빠져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아픔으로부터 빗겨나간 사랑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5 . 자살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그럼 자살해도 지옥 안가요?" 라고 묻는다면 "천국에 가게된다 하더라도 너는 자살하지마"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 같아질 사람이 단 한 명 뿐이라도 자살을 막을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자살은 죄야. 저 사람 사탄에 들려서 그런거야"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탄의 짓을 하고 있는 줄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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