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리뷰 -문제적 개인들이 바꿔가는 세상

in #kr6 years ago

*스포가 들어있습니다
**글쓴이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있습니다

1 . 문제아들이 틔우는 평화의 씨앗

반목과 갈등의 역사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한 개인의 삶이 한가지 가치로만 판단되지 않듯. 한 민족이 완벽히 자유 혹은 평등을 대표해 대립하기엔 그 속에 너무 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혀있다.

전쟁서사는 으레히 영웅을 절대악에 맞서는 뜨거운 심장과 날카로운 칼을 가진 인물로 묘사해왔지만, 사실 전쟁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기보다는 기득권의 욕망에 의한 이데올로기였던 경우가 더 많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며 종교심을 부추겨 소년들까지 전쟁터로 몰았지만 그저 중세교회의 돈 욕심에 불과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역시 온갖 명분을 붙여 990만명을 죽음으로 몰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약탈 싸움이었을 뿐이었다. 한반도 분열 역시 20세기 중후반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험장. 희생제물이 된 부끄러운 역사다.

이데올로기의 선이 그어진 세상에서는 가장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가장 문제 많은 인물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몬태규 가문의 로미오는, 서로 간의 지역감정이 극에 달한 캐퓰럿 가문의 줄리엣을 사랑하게 된다. 둘의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연애사가 될 수 있었다. 가문간의 갈등만 없었다면. 가문의 반목과 어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는 것은 눈치 없는 행위. 문제아적 행위가 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최전방 경비를 맡고 있는 남측의 병사 이병헌, 김태우와 북측의 송강호, 신하균이 몰래 편지를 주고 받으며 경비초소에서 만나 장난을 치며 노는 행위는 전쟁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에서 상당히 눈치없고 문제적인 행동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문제아들의 평범하고 눈치없는 행보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가장 적실히 드러내는 고발적 성격을 띄게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은 어른들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잔악함을 고발한다. 이병헌이 김태우와 함께 북측의 초소를 향해 웃으며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과 송강호가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하며 장난치며 노는 장면은 위험천만하고 눈치없어 보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냉전과 분단 이데올로기를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비웃는 장면이 된다.

2 . 문제적 개인들의 등장

헝가리의 미학자 루카치는 그의 책 「소설의 이론」에서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 행보로 역설적으로 사회의 부조화스러움을 고발하게 되는 이런 캐릭터들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다.

문제적 개인은 근대 이후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근대 서사의 로망스 문학의 주인공은 불을 뿜는 용과 싸워 공주를 구해내는 기사라던가, 도사에게 축지법을 배워 적장을 쓰러뜨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병사였다. 그 속에는 개인과 사회의 억지스러운 일치가 담겨있다. 기사는 자신을 전쟁에 보내는 윗선의 이해관계에 대해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의 승리가 곧 자신의 승리로 포장되어 개인과 사회가 조화스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서사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가치가 갈등하는 것이 특징이다. 디즈니사 영화의 여주인공들을 예로 들어보자. 신데렐라(1950), 잠자는 숲 속의 공주(1959)는 여성 주인공이 왕자의 선택과 키스를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여성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멋진 남성의 선택을 받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장식하려는 50년대 디즈니 스타일의 영화는 (비록 현대 영화지만) 개인이 사회와 부딪히지 않으며,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한다"는 사회의 가치관과 개인의 행복이 전형적인 조화를 이룰 뿐인. 매우 전근대스러운 영화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디즈니사의 여주인공들도 점점 문제적 개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영화 뮬란(1998)의 주인공 파뮬란은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의 징집에 응하려고 하지만, "여자는 시집만 잘가면 장땡이다"는 가족과 사회의 가치관에 부딪히게 된다. 여성스러운 행동을 따라하는데 서툴고,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이 앞섰던 뮬란은 결국 남장을 하고 몰래 징집에 응하는 문제적 개인이 된다. 디즈니사의 겨울왕국(2013)에서는 마침내 '왕자의 키스를 받으면 저주가 풀린다'는 잠자는 공주 스타일 서사의 클리셰를 부수면서 자매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결말로 끝이난다.

이런 서사의 변화는 일본의 서브컬쳐계 창작물에서도 나타난다. 토에이사의 애니메이션 마징가Z(1972)는 주인공이 로봇에 탑승해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당들과 싸우는 전형적인 히어로 활약상의 전개였다. 마징가Z의 활약이 곧 세계의 평화였던 로봇물의 공식에선 개인의 전투 승리와 세상의 평화가 일치하고 있다. 이 공식은 이후의 많은 로봇만화에서 클리셰가 되어있었다.

안노 히데야키 감독의 에반게리온(1995)은 로봇탑승물이지만, 마징가Z류의 만화와 전혀 다른 문제적 개인이 등장한다. 지구에 침공하는 외계의 사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로보트 에반게리온에 주인공은 탑승하기 싫어한다. 싸워야만하는 이유를 묻고, 용감하게 나서기보다는 끝까지 무서워서 숨으려고만 하는. 용감함보다는 찌질함에 충실한 주인공의 모습은 기존 SF물의 히어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안티히어로에 가까운 모습을 띄고 있다.

마징가Z와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중 누가 더 평화에 가까운 인물일까? 세계관이 다른 창작물이기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구는 원래 사도들의 땅이었는데 인류에게 빼앗긴 상태"라는 설정을 숨겨두고 있는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이 "나치 과학자의 기술을 더 강력한 기술의 로보트로 때려 부순다"는 마징가Z보다 조금 더 근대시대와 세계대전 역사에 대해서 현실적인 성찰을 품고 있다는 점도 재고해볼 일이다. 이렇듯 문제적 개인의 서사는 사회의 승리를 개인의 승리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사회 속 개인의 억압과 갈등 강제에 대해서 더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3 . 진실이 만든 문제적 개인

엊그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공작>을 보았다.

이 영화는 첩보영화지만 전혀 007스럽지 않다. 화려한 액션장면도. 도로 위의 추격씬도 없다는 점도 그렇지만, 제임스 본드라는 개인의 화려한 활동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수호에 직결된다는 미국 영화적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다르다.

공작원 흑금성(황정민)은 국가를 위해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첩보활동에 매진하지만, 남한여당측이 지지율을 위해 북한에게 서해5도 도발을 주문하는 것을 알게 된다. 북한 역시 남한이 진보정당으로 정권교체되는것을 원하지 않으며, 집권당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원할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임스본드와는 다르게 황정민은 자신의 조국평화를 위한 활동의 성과가 곧 조국의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돈과 권력이 오가는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있어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황정민은 헌신적 스파이에서 문제적 개인이 된다.

진실은 이데올로기라는 포장지. 대의명분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에 가려진 채 가장 낯선 모양을 하고 있다. 진실을 목격한 사람은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 경우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JSA의 이병헌과는 조금 다르게 '눈치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눈치 보지 않게 된' 문제아. 문제를 깨닫고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아가 탄생하게 된다.

문제아가 되기로 작정한 개인은 집요하게 이데올로기의 가식을 벗겨낸다. 황정민은 김정일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에서 "남한 여당측의 대남도발 주문은 김정일에겐 이득이 하나도 없고, 오직 남한 기득권과 북한 강경파에게만 좋은 일 해주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김정일이 결정한 것을 면전에서 되돌리자고 말하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한다.

이 영화는 007, 미션임파서블로 대표되는 기존 첩보물의 서사에서 과감히 일탈한다. 개인의 활약을 자유의 승리, 사회의 승리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영웅적 개인이 적을 쓰러뜨리고 평화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활약이 무의미해지는 점. 선역과 악역이 모호해지는 기득권과 득실을 따지는 구조를 통해 진정한 평화가 어떤식으로 멀어지는지 조명한다.

나아가서 영화는 관객을 문제적 개인의 자리로 초대한다. 집권여당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복지와 인권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에게 반공프레임을 씌워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엔 어떤 기득권의 손익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작용하지는 않았겠냐고. 우리가 허구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서로에게 선을 긋지는 않았는지 되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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