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른 사람, 다시 부르는 노래]
가을엔 사랑을 하겠어요
잊지 못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보고싶은 뮤지션이 있습니다.
뮤지션과 가상 대화를 통해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계절의 문턱에서 가을이 느껴진다. 어제와 다르게 하늘은 짙고 해라도 없는 날엔 제법 서늘하다. 편지를 쓰겠다는 누구의 말처럼 가을은 감성에 젖기 좋은 계절이다. 이때 비로소 수많은 사랑 노래가 특별해진다. 익숙했던 멜로디와 가사 한 줄 한 줄이 새롭게 느껴지며 우리의 마음에 닿는다.
가을을 닮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있다.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만났다. 키가 150이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몸에 알맞은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렸다. 단단한 눈매에 빛이 돌았으며 내내 엷은 미소를 입술에 머금고 있었다. 첫인상을 동물로 비유하자면 참새(피아프는 참새라는 뜻)보다는 차라리 고양이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요즘 에디트 당신의 노래를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노래들이 참 많더군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에디트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담배를 물며 느리게 불을 켰다. 당신 노래에는 특유의 맛이 있어요. 소리가 구르며 내는 느낌이랄까요? 애절한 목소리가 가을이랑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요. “혹시 제 노랫말을 좋아하나요?” 제가 불어를 할 줄 몰라서요. 물론 몇 곡 검색해서 뜻은 찾아봤어요. ‘사랑의 찬가 (Hymne à l’amour)’ 가사가 기억에 남네요.
“내 아픈 사랑의 노래를요?” 사랑의 찬가는 에디트가 그녀의 옛 연인 마르셀 세르당의 사망을 추모하며 바친 노래다. 혹자에 따르면 그녀는 이 노래를 통해 마르셀과 영혼의 교감을 나누려 했다. “마르셀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를 떠올리며 부른 노래에요” 저도 얘기 들었어요. 가사에 하늘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게 그래서일까 혼자 생각도 했답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녀가 쓸쓸히 웃어 보였다. 저는 가사 중에 이 부분이 가장 와 닿았어요.
어느 날 삶이 내게서 당신을 앗아간다 해도
당신이 죽어 먼 곳에 가버린다 해도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도 당신과 함께 죽을 테니까요
여러 감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노래에요. “그랬다니 저도 기쁘네요.” 에디트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자 얇은 눈썹이 출렁였다.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 있나요? 내겐 언제나 강렬한 감정이 곧 노래였답니다.” 한참 머뭇거리는 나를 두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가끔은 나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토록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도 말이죠. 어쨌거나 오직 사랑만이 내겐 강렬한 감정인 건 분명해요.“ 강렬한 감정이라면, 일종의 자극을 말하는 건가요? “힘든 삶을 살았어요. 내 유년은 외로움과 상실감, 모멸감으로 가득 찼고 난 수 백 수 천 번 삶의 나락으로도 떨어져 봤죠. 이 모든 걸 잊게 만들어주는 감정은 오직 사랑뿐이었어요.” 오, 에디트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랑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에디트는 담배를 바라봤다. “사랑이란, 내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에요.” 재떨이에 떨어진 담배는 부드럽게 몸을 비벼 불을 껐다. “사랑이 없으면 난 죽을 거 같아요. 또 잃을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잡고 싶은 거죠. 이렇게 말하면 너무 못나 보이나요?” 전혀 아니에요. 무슨 의미일까 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말했다시피 난 힘든 시절을 보냈어요. 심지어 어려서는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니까요. 그 시간들이 저주스러워요.” 그녀는 곡예사 부부의 딸로 태어나 불우한 유년을 보냈다. “가진 거라곤 목소리뿐인 인생이에요. 늘 외롭고 또 무서웠죠.” 그녀는 다시 담배에 손을 가져갔다. “내 삶을 지탱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내게 그건 사랑이었어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볼까요? 나를 안아줄 남자였죠. 그것도 아주 많은 남자들.” 그녀가 샐쭉, 익살스러운 미소로 웃어 보였다.
실제로 그녀의 남성 편력은 상당했다. 특히나 가수가 되고자 하는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찾아왔을 때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가벼운 사랑을 했다. 그 많은 남자들이 당신의 삶만큼이나 노래에 영향을 끼친 건가요? “물론이에요, 내 삶에 남자가 없었다면 난 결코 노래하지 못했을 거에요. 그들이 내게 준 사랑으로 난 노래했어요. 젠장, 거짓말이네요. 그저 관심이나 받으려고 노래했던 거죠.” 아뇨, 그렇게 자학적으로 말하지는 마요 에디트. 그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은 거겠죠. “음, 이브 몽땅을 예로 들을 수 있겠군요.”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노래 ‘고엽’을 부른 아저씨 아닌가요? “형편없는 작자죠.” 그녀가 말했다. 과거 이브 몽땅과 에디트 피아프의 연인 관계는 불미스럽게 끝났다. “사랑을 통해서만 난 버틸 수 있었고, 그런 사랑을 노래하곤 했어요.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이라는 노래 들어봤나요?”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은 그녀가 이브 몽땅과 연애를 하던 당시 불과 15분만에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명곡이다.
“많은 경우 내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 동안 엄청난 감정들을 느꼈던 건 분명해요.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부를 당시 이브 몽땅에 대한 내 마음도 진심이었어요.” 어느덧 에디트 앞 재떨이엔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어떻게 해온 사랑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 모든 게 노래가 되었네요.” 그녀의 말에는 전력으로 사는 사람만이 내는 땀내가 배어났다. 평생을 남자 때문에 시달렸어도, 당신이 노래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건 바로 그 사랑이군요.
“많은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또 그보다도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런 삶이어서 난 노래할 수 있었어요.” 그녀가 새로 담배를 꺼내다 멈추고 말을 이었다. “분명 나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많아요.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사랑을 노래할 거에요. 저는 언제까지나 사랑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니까요” 안정적인 삶이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요? 한 남자와 보다 오래 함께했다면 또 다른 사랑이 있었을 텐데요.
“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그건 모두 나와 상관없어요
그건 대가를 치렀고, 쓸어버렸고, 잊혀졌어요
“그나저나 아직 대답 못 들은 게 있네요.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 있나요?”
어느 가을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이 글은 2015년 미디어 자몽에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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