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1.2020 / 길 위는 때 아닌 추위에 난로를 때는 집에서 나오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하늘에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테라스에 앉아 여유를 만끽하거나 얇은 외투를 걸치고 산책을 나오기 시작했다. 몇 주간 비와 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의 끝이 오리라 예감했던 사람들은 드디어 풀리는 날씨에 기쁜 눈치다. 나 또한 본의 아니게 며칠 내내 집에 박혀 칩거를 해야 했으나, 슬슬 먹을거리가 떨어져 가고 있어 식료품을 채워야 했다. 우체통에 들어있던 건너편의 Intermarche 마트의 대폭 세일을 시작한다는 전단지가 생각났다. 바람도 쐴겸 전단지를 손에 쥐고 밖으로 나왔다.
누가 그랬던가 겨울의 파리는 회색의 도시라고. 길었던 올해 겨울의 끝자락을 얼굴에 쬐고 있자니 그 동안 일상에 결여된 무언가가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의 삶은 행정이 느리고 몸은 불편하다. 정해진 시스템에 사람이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던지 적지 않은 기다림은 일상이 된다. 한마디로 굉장히 수동적이여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일상을 보장해준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유롭고 느린, 문화적으로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다. 반대로 한국 (서울)에서는 사람에 맞춘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몸은 편하지만 정신적인(개인적인) 문제가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선 모든것이 빠르고 정신없이 지나가기 때문에 시간이 비교적 빨리가는것 처럼 느껴지곤 했다.
당장 파리에서 마주하는 할 일들을 걸어가며 생각해보니 계획과 일관성 두가지였다. 2주 동안 글쓰기에 집중하는 기간으로 정해놓고 밥 먹고 연습하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글에 몰두해왔다.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활자에 집중하고 나면 왠지모를 일종의 승리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책장에 쌓아둔 (그리고 어제도 결제한 새 책까지 ) 책 읽고 정리 요약한 후 기록하기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요약 정리'. 지난 독서모임에서 배운 후 쭉 지키고 있는 철칙이다. 앞으로는 이 책들을 모두 읽기 전까지는 새 책을 사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사실 wishlist 장바구니에 담겨있는 책만해도 스무권이 넘는다.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일일 뇌용량은 한계지만 하루키의 명언을 되새기며-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기만 하면 그 뒤로는 어떻게든 풀려나간다. 그러나 플라이휠이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해야 하는 것에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를 떠올리며 딜레마에 빠졌던 한달 간,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시간은 무슨짓을 하던 예외없이 공평하게, 무엇보다 천천히 흘러갔다. 화도 나지만, 그럴수록 더욱이 오기가 생긴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초인적인 집중력과 동기부여가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면) 내 시간을 지배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글을 쓰고 연습을 하고 명상(+요가)을 하는 이 간단한 세가지를 매일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전엔 어떻게 회사에 다니며 매일 아침 지옥철 출근을 감행하고 쉬는 날 없이 레슨을 강행했는지... 아무리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다. 내 시간을 지배할 수 없었던 지난 날들의 연약했던 나는 스트레스 양일의 상태였던 것. 현재 가장 큰 고민은 듀오 프로젝트에 어떻게 하면 생기를 더 불어넣을까, 연주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정도가 전부다.
오늘을 기다린 만큼 내일을 기다려주는, 딱 그만큼의 여유를 품고 싶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더이상 발버둥치지 않는, 애쓰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꿈을 꾼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나도 모르게 잔뜩 힘이 들어간 몸에, 마음에는 아직도 놓지 못한 미련이 그득히 맺혀있다. 나는 늘 놓아야 할 것들에는 미련을 품고 해야 할 것들에는 소홀하다. 대부분이 사람때문인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포기하고 그러려니 하는게 편하긴 하지만.
어쩌다 흘러 예전 페이스북의 나를 마주했다. 다 지운줄 알았기에 깜짝 놀랐다. 사진이며 글이며 수년 전 나의 흔적을 싸그리 없앤 줄 알았다. 매번 비밀번호를 까먹어 잘 들어가지도 않는 페이스북을 우연히 얻어걸려 로그인에 성공한 후 마주한 나의 오랜 계정은…실로 충격적이였다. 새벽 두시 갬성글은 그렇다 쳐도, 온갖 사진들이라니. 지금과는 너무나 괴리감 느껴지는 모습의 지난 시절은 낯설었다.
매일 쓰는 글은 내가 발전하는 모습을 그대로 여과없이 비추는 좋은 도구다. 하지만 SNS상의 나의 일상 활동은 내가 생각하는 범위 이상으로 도용되거나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채 크롭되고 도용되어 여기저기 퍼날라진다.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즉 SNS엔 물론 적절히 활용할 여러 이점이 분명 존재할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정을 여러번 삭제하기도 했고. 현재는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한 메신저 용 하나와 사진과 잡다한 생각 기록용으로 하나 운영하고 있다.
별것 없는 일상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갖고 있는 인연들에게 틈만 나면 전해줄 편지를 쓰곤 한다. 가끔 시간이 부족할때면 짧은 카톡이라도 남기고 안부를 챙김으로서 생사를 묻기도 한다. 이마저도 어려울 정도로 넘치는 글의 량에 치여 바쁠때면, 이곳을 찾아 읽을 그들을 위해 여기에 적어 놓는다. 글쓰기가 하나의 소통의 창구가 되는 셈이다. 그닥 잘 쓴 글도, 가독성 높은 훌륭한 글도 아니지만 소소한 일상과 고찰이 담겨있는 기록장.
여러가지 계획과 동기부여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참 요상한 1월도 끝났다. 명절의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2월 바캉스가 찾아와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흐트려놓는다. 시간은 정말이지 꾸준하게 빠르다. 어디선가 읽은 문구가 떠오른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 좀 더 자란 당신이 해결해 준다. 나는 아주 천천히 성장하는 서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에겐 그거밖에 못했어? 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어제보다 발전한 내 모습을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엉뚱한 서른.
서른 되기 전부터 페미니즘, 사회 이슈 관련 책을 모으는 취미를 키우고 있는 덕분에 책장은 가득 찼지만 지갑은 늘 텅 비어 있다. 이번 한국에서 돌아올때는 한정판 CD와 악보집을 모으느라 안그래도 가벼운데 더욱 날아갈 듯 가벼워진 내 지갑. 실제론 이고 갈데도 없는 가난뱅이 신세다. 파리에 돌아오면 내가 서 있던 모든 자리를 성찰하는데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개인적 의미를 가지는데 시간을 대부분 쓰곤 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할 기회를 모색한다. 돈은 좀 없지만 뭐 어때, 올해는 좀 더 철든 어른이 되면 좋겠다.
와... 제가 꿈꾸는 삶을 살고 계시네요.
저도 탈출하고 싶네요.
그렇군요. 저도 언젠간 탈출을 꿈꾸고 있으니 중간에(?) 만나려나요. ㅎㅎ
아, 원래 다른데 사시는구나. 한국 계시면 한 번 봬요. ^^/ 이런저런 얘기 해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글을 씁니다. ㅎㅎ 자주 뵙길 바라요. 카톡은 잘 하지 않지만 종종 들리겠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ㅎㅎ 예예 알겠습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