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7)

in #kr7 years ago



반추反芻 (17) - 어둠의 그림자
“어머니…”
옆자리에 앉았던 태식이 어머니의 팔을 잡으며 문석의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문희는 태식의 어머니를 보며 다시 가볍게 웃으며 목례하였다.
“여러 가지 집안의 일이 겹쳐서 못 왔던 걸 내 뭐라 할까.”
태식의 어머니는 인자하게 문희를 보며 웃었다.
“이렇게 부족한 딸을 예쁘게 봐주시니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휴, 무슨 말씀을 문희를 보자마자 제 딸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예의도 바르고, 마침 제가 딸이 없으니 딸 하나 공짜로 생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희의 어머니와 태식의 어머니는 한 손을 가린 채 소리 나게 웃었다.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태식과 문희는 웃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눈을 마주치고는 서로 씽긋 웃었다. 모든 문제가 이렇게 쉽게 풀려가고 있음에 이미 문희와 태식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
웃고 있는 사이 미리 준비해 놓았던 음식들이 차례로 들어 왔다.
“비쌀 건데 이거 이렇게 좋은 음식들은…”
“엄마!”
문희의 어머니가 끊임없이 가져다 놓는 음식들을 보며 중얼거리자 문희는 당황한 듯 옆의 어머니를 몸으로 슬쩍 밀었다.
“아휴, 제가 좀 주책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렇지 않아도 태식이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아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남의 도움 없이도 거뜬히 운동도 다니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자 어서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 나누십시다.”
태식의 어머니는 먼저 수저를 들고 문희의 어머니에게 권하였다. 그러자 문희 어머니는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태식의 어머니는 야채와 고기들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신설로에 수저를 넣어 국물을 떴다.
그리고는 국물을 마시며 유심히 문희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러세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요? 어디서 뵈었을까요?”
태식의 어머니와 문희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향과 살았던 곳을 이야기 했지만 아무것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까지 문희와 태식이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으로 미루며 서로의 안면이 있음을 확인하려 했지만 성과가 없자. 서로 편한 얼굴이기에 그렇게 느낀 것 같다며 웃고 말았다.
“결혼 날짜는 문희 어머님이 잡으세요.”
“아휴, 뭐 누가 잡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편하게 태식이 어머님이 잡으세요.”
“그래도 원래는 여자 집에서 택일을 하는 것이니 문희 어머님이 적당한 때로 잡으시면 될 것 같네요.”
태식은 못내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하는 문희와의 결혼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날 점심을 문희 어머니와 함께 하며 태식의 어머니는 다행히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태식의 어머니는 이미 60이 다 된 분이셨지만 생각만큼은 자신 스스로 늘 젊게 살려 한다고 늘 아들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기에 태식과 문희의 결혼에 있어서도 경제적인 여건에 대하여는 태식의 어머니 스스로도 굳이 언급하지 않고 싶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연이란 게 어디 쉬운 겁니까? 그냥 지들 좋다고 하니 적당한 날 결혼 시키면 좋을 듯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딸을 그렇게 믿어 주시니…”
태식의 어머니 말에 문희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서로 인사를 하고 태식은 어머니와 문희, 그리고 문희 어머니를 차에 타도록 했다. 한사코 따로 가겠다고 문희 어머니가 거절했지만 태식의 어머니는 같은 방향이니 모셔다 드려야 태식이의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며 타도록 권유 했고 결국 함께 미연동쪽으로 가 먼저 집 근처 대로변에 문희와 문희의 어머니를 내려 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참, 이상하네. 어디서 많이 뵌 것 같단 말이야.”
“에이 어머니도 참, 원래 나이 드시면 얼굴이 다 비슷비슷 해 지던데요 뭘.”
“하긴 그래.”
태식의 어머니는 태식과 함께 집에 오는 동안 계속 혼자 고개를 갸웃 거리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 듯 했다.

“야! 문희 좀 놀러 오라고 해라. 오늘 저녁 집에서 같이 밥 먹게.”
문희의 어머님을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어머니는 문희를 데리고 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으면 했다. 가을 추석 전 9월 20일에 결혼 날짜가 확정된 이후 어머니는 걱정스러워 했다. 봉사활동이니 뭐니 하면서 별로 저축해 놓은 것이 없는 태식의 입장을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벌써부터 결혼 자금 걱정을 하였지만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부득이하게 문희의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아들이 더 걱정되는 듯싶었다.
“어서오너라.”
이미 결혼 날짜가 잡힌 탓인지 태식의 어머니는 한결 편하게 문희를 대했고 문희 또한 스스럼없이 태식의 어머니를 대했다. 한사코 부엌에 들어오지 말라며 말리는 태식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희는 마치 딸처럼 부엌에 들어가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태식과 태식의 아버지는 흐뭇한 듯 거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태식의 집은 태근이 형이 결산으로 인해 늦는 날이면 온 집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삭막했다. 그래서 늘 어머니는 ‘나도 이쁜 딸 하나 낳았어야 됐었는데.’라며 넋두리를 하곤 하셨다.
저녁식사를 한 후 온 집안에 결혼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었다. 아들과 딸에 상관없이 적어도 넷은 낳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문희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고 태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만 낳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꼭 너 같은 아들만 낳아봐라. 얼마나 세상사는 재미없는지.“라고 말하자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문희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지?”
웃음이 가라앉자 태식의 아버지는 문희의 아버지가 궁금했던지 문희에게 물었다.
“네, 원래 충남 온양의 사시던 아버지는 우체국에서 근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오빠랑 저를 낳고 우체국을 그만 두시고 온양에서 나오셔서 이 곳 K시에서 옷 장사를 하셨었어요. 처음엔 꽤 잘 되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요. 적어도 제 중학교 때 까지는 그런데 그만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신 후 많은 빚을 지고 나시더니 몇 년간 힘들어 하셨어요. 그러다가 그만…”
“뭐? 충남 온양?”
“네?”
옆에서 듣고 있던 태식의 어머니가 대뜸 문희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온양 어디 우체국에서 근무 하셨다고 하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갓난아기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곳으로 나오셨으니까요, 그리고 별로 그곳이야기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혹시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니.”
어머니는 불안한 얼굴로 문희에게 다시 물었고 문희도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느꼈는지 환한 얼굴이 어느새 굳어져 있었다.
“예, 서자, 경자, 원자인데요.”
“서경원?”
어머니의 얼굴은 금세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당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태식의 아버지가 근심스러운 듯 어머니에게 물었고 태식과 문희도 태식의 어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 아버지 사진 있냐?”
“네.”
문희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백 속을 뒤지더니 작은 수첩 속에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었다.
“이거… 제 돌때 찍은 가족사진이라고 했어요.”
문희가 사진을 태식의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순간 사진을 바라본 태식의 어머니의 얼굴은 석고처럼 굳어진 채 아무 말도 없이 시진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어머니의 눈은 붉게 충혈 되고 있었다.
“아니, 당신 무슨 일이야? 문희 아버님을 알기라도 하는 거야?”
태식의 아버지가 답답했던지 재차 큰 소리로 묻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문희의 얼굴을 다시 보고는 이내 태식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태식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듯 두 손을 얼굴에 갖다 대었다.
“나 좀 쉬어야겠다. 하루종일 집안일을 했더니 피곤하다. 너희들도 가서 쉬어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 가셨고 태식의 아버지가 이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왜 그러시지?”
문희는 태식의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놓여 져 있는 사진을 주워들고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태식씨! 저 그만 갈게요.”
문희는 뭔가 불안했던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태식은 문희를 데려다 주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밖은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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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아침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 글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