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20)

in #kr7 years ago



반추反芻 (20) - 진실을 알다

“여보! 속 시원히 이야기 해 봐요. 나도 답답한데 저 녀석은 오죽 하겠어.”
태식의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방문 좀 닫아 줘요.”
태식의 아버지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해야 하는 아내를 위해 혹시 몰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잠금 버튼을 눌렀다.
“자, 어서 말해 봐. 이 사람아 당신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병 돼. 내 어떤 말이라도 다 들어 줌세.”
태식의 아버지는 아내의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며 따듯하게 위로 했다.
“20여 년 전이었어요. 제가 당신과 결혼 한지 10년째 되던 해, 당신도 아시죠? 제 동생 인자…”
“그래 알지…. 참! 처제가 온양의 우체국에서 근무했었다고 했었지?”
“그래요, 인자가 우체국에 발령 받고 춘천에 살던 우리 집에 놀러와 얼마나 좋아했어요.”
“그래, 그랬지. 계속 이야기 해봐.”

20여 년 전, 태식의 어머니 여동생 김인자는 체신공무원 시험에 어렵게 합격해 충남 온양에 있는 우체국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10여명이 근무하고 있던 우체국에서는 미혼인 인자가 발령을 받고 출근하자 우체국이 환해 졌다고 모두들 좋아 했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모든 게 낯설었지만 김인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적응해 나갔고 거기에는 주임으로 일하고 있는 7살 연상의 서경원이라는 사람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었다.
처음, 김인자 또한, 신입이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베푸는 친절이라고 생각했으나 날이 갈수록 타지에 있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서경원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고 어느 때인가부터 김인자는 이성으로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채 안되던 어느 가을 무렵, 서경원과 김인자는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했다. 서경원은 동거를 시작하며 우체국엔 철저히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했다. 조그마한 시골에서 결혼하기 전에 소문이라도 나면 서로 난처하다는 이유였다. 인자는 너무나 그를 사랑했고 그가 원하는 것이면 모든 월급을 털어 마련해 주곤 했다.
하지만 서경원은 온양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D시에서 살고 계시는 부모님이 있다며 늘 건강이 좋지 않는 부모님 걱정을 했고 주말마다 부모님을 뵈러 올라가곤 했다.
처음엔 인자도 함께 부모님을 뵈러 가기를 청했지만 구체적으로 결혼 계획이 잡히면 그때 함께 가자고 서경원이 말했기에 김인자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주말마다 올라가는 그의 부모님을 위해 인자는 김치나 밑반찬을 마련해 주었고 그는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라며 기뻐했다.
그들의 동거가 시작된 지 5개월째 되던 어느 날 인자는 퇴근 후 저녁밥을 하다 입덧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인자는 서경원에게 임신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내에 있는 병원에서 중절 수술을 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엔 김인자도 그럴 수 있으려니 생각을 했지만 매일매일 중절수술을 강요하는 서경원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속에 한 생명으로 자리 잡은 소중한 아이를 그리 쉽게 저버릴 수 없었던 인자는 서경원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그걸 수 없다며 고집스레 버텨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인자가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서경원은 보이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으려니 생각한 인자는 이미 5개월이 되어 불룩해진 배를 보이지 않게 동여매고 제법 도보로는 먼 거리를 걸어서 출근했다.
우체국에 출근한 김인자는 먼저 왔을 서경원이자리에 보이지 않자 슬쩍 옆에서 근무하는 동료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동료는 예상이외의 대답을 했다.
“어? 너 몰랐니? 서주임님 어제 부모님 건강 때문에 근무하기가 힘들 것 같다며 사직서 내시고 오늘부터 출근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김인자에게 청천벽락 같은 소리였다.
김인자는 그제야 인사 기록부를 뒤져 보았다. 사실 인사기록부는 그동안 우체국장이 직접 관리해 오던 터라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본청의 감사관계로 인해 서류를 정리하며 인사기록부가 국장실에서 나와 있었다.
인사 기록부를 넘겨 서경원의 기록부를 보던 김인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이미 아들이 하나 딸린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간혹 동료들이 ‘아저씨 아들 잘 커요?’라고 물으면 ‘그럼 불쑥불쑥 크고 있지!’라며 장난 삼아 대답하며 '난 영원한 유부남'이라고 지칭하던 그를 보며 김인자는 동료들이 노총각을 놀려대는 것이고 또 그것을 그가 유머로 받아 넘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하여 서경원은 그렇게 받아 줘야 동료들이 자주 놀리지 않는다고 했기에 김인자는 까맣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동료들의 간호로 정신을 차린 김인자는 우체국장에게 허가를 받아 며칠 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인사기록부에 있는 D시 그의 집주소로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를 찾아간 김인자는 다시 한 번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아야 했다. 부인과 함께 있던 서경원은 김인자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의 앞에서 김인자는 어린애처럼 울기만 했다.
결국, 서경원의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인자에게 돌아오는 말은 ‘걸레’라는 서경원 부인의 잔혹한 말 밖에는 없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김인자의 뒤를 쫒아 온 서경원이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들이 뇌성마비라는 것을 털어 놓으며 곧 이혼할거라고 하며 조금만 참아 달라고 말했지만 김인자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인자는 계속 불러 오는 배를 어찌할 수 없어 우체국에 사직서를 내고 완고한 그녀의 부모님에게는 차마 가지 못하고 짐을 꾸려 춘천에 있는 언니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형부가 사우디에 나가있었을 무렵이었기에 김인자는 출산 후 아이가 두 돌이 되도록 언니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때 이미 언니에게는 아이가 셋 있었고, 막내 태식은 이미 네 살이 되어 있었다.
언니는 한사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고아원이나 입양을 권했지만 김인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는지 언니의 집으로 서경원과 그의 부인이 찾아 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아이를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김인자도 완강히 거부를 했지만 아무래도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언니의 설득에 결국 아이를 빼앗기듯 내 주고 말았다.
그 뒤, 뒤늦게 아이를 빼앗긴 것을 후회한 김인자는 언니와 함께 D시의 그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 갔지만 그는 이미 이사 가고 난 뒤였다.
몇 달 동안을 아이가 보고 싶다며 울던 김인자는 형부가 귀국할 무렵 어느 날 돌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태식의 아버지가 귀국한 지 꼭 한 달 뒤 경찰서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것은 동생 김인자의 사망 소식이었다.
유서에는 꼭 아이를 찾아 달라는 것과 함께 서경원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경찰에 의하며 동생 인자는 선착장이 있는 어느 술집, 작은 방에서 농약을 마신 채 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흐흑, 인자야! 인자야!”
태식의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태식의 아버지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태식이와 문희가 사촌 간…”
“그래요. 내 동생 인자를 죽게 한 그 인간의 딸이 바로 문희예요. 그리고 문희와 태식이 사촌간이란 말이에요.”
태식의 어머니는 아예 방바닥에 누워 버렸다.
“문희도 불쌍하고, 태식이도 그렇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그랬군. 난 당신이 처제가 죽은 뒤로 전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왜 죽었는지 궁금했지만 당신에게 상처가 될까봐 물어 보지 않았었는데.”
태식의 아버지는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랬다. 태식의 어머니는 문희의 사진을 보고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알면서도 사촌동생과 자신의 아들 태식을 결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경원과 그의 부인을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기에 태식의 어머니는 혼자서 말을 못한 채 그 고통을 홀로 감당해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쿵-”
그때였다. 방문 뒤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식의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방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방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힘주어 연 방문 뒤에서 태식이 주저앉아 있었다.
“태식아!”
태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던 태식이 정원에 나가기 위해 거실로 나오자 안방에서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렸고 자신도 모르게 안방 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태식은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어머니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문희와 자신이 사촌지간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태식은 자신도 모르게 안방 문에 쓰러지듯 기댄 채 주저앉아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