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21)

in #kr7 years ago



반추反芻 (21) - 여행

태식은 며칠 동안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태식의 어머니 아버지는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알게 된 이상 혼자 힘으로 이겨낼 방법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이틀을 식음을 전폐해가며 드러누워 있었지만 태식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다만 문희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눈물만 소리 없이 베개를 적실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문희를 만나봐야겠어요.”
“여보!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괜히 문희에게 상처만 더 줄뿐이야.”
“그럼 어떡하란 말예요. 태식이 쟤를 저렇게 그냥 놔두란 말이에요? 벌써 문희에게 몇 통째 전화가 왔어요. 급히 출장 갔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문희를 계속 속일 수 있겠어요.”
“아냐! 지금 저 녀석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야. 조금만 기다려 주자고 며칠 굶는다고 죽지는 않아 뭔가 결정을 내릴 거야.”
태식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드러누워만 있는 태식이 걱정되면서도 태식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어머니, 저 밥 좀 주세요.”
아침 일찍 일어난 태식은 부엌에서 아침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태식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태식은 그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엌으로 와 별다른 말도 없이 밥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그래.”
태식의 어머니는 사흘을 굶었던 아들을 위해 밥에 물을 더 부어 걸쭉하게 끓여 내었다.
태식은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태식아! 어디 갈려고?”
태식의 어머니는 황급히 태식의 뒤를 쫒아가며 물었다.
“그냥, 묻지 마세요. 아무 말 하지 마시고 저에게 맡겨 두세요. 저 오늘 못 들어 올 거예요.”
“별일은 없겠지?”
불안한 듯 물어보는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에 태식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미연동 문희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 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문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야?”
“태식씨! 어떻게 된 거예요?”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현관문이 유난히 태식의 귀에 거슬렸고 그 소리는 어지럼증을 유발시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집에 몇 번이나 전화 했었는데…”
“미안해! 출장 가서 일이 좀 생겨서 전화를 못했어. 어머니는?”
“D시에 사시는 이모가 오셔서 모셔갔어요. 아무래도 이곳보다 공기도 좋고 하니 그곳에서 건강이 좋아질 때까지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어젯밤에 모시고 가셨어요.”
“그래? 우리 여행가기로 했잖아, 다 준비 해놨어?”
“그럼요, 어젯밤에 태식씨 집에 전화했는데 아직 출장 가서 안돌아 왔다기에 얼마나 답답했는데. 그래도 오늘 약속만은 지킬 거라 믿었죠.”
문희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태식을 보고 좋아했다.
“그래? 그럼 얼른 출발하자.”
태식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문희와 약속했던 여행만큼은 다녀오고 싶었다. 모든 일은 여행에서 돌아 온 후 생각하리라 마음먹었다.
K시를 빠져나간 후 태식은 줄 곧 국도로만 길을 잡았다. 태식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다. 그러나 문희는 굳이 태식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고 다만, 운전을 하고 있는 태식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댄 채 콧노래를 불렀다.
“태식씨? 나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요?”
“그래! 알아. 얼굴에 행복이라고 써져 있는데 뭘.”
“치, 말도 안 돼.”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태식의 차 앞 유리로 푸른 하늘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고 길 양쪽엔 빼곡히 심어진 홍단풍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전라북도 순창의 ‘강천사’였다. K시에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강천사는 비구승들이 주로 기거하는 절이었고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명소였다. 제법 넓은 산길이 닦아져 있는 광덕산 오르는 길은 한 시간정도를 등반하면 팔각정이 있는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고 올라가면서도 곳곳에 빼어난 비경들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태식이 정작 이곳으로 온 것은 다른 관광지에 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비교적 조용한 편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들풀회 회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위해 왔던 기억을 더듬어 태식은 미리 이곳에 문희와 함께 오리라 생각해 놓은 터였다.
매표소를 지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넓은 주차장에는 주말이었음에도 몇 대의 차량만 주차되어 있을 뿐이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자동차의 시동을 끄던 태식은 어느새 옆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문희를 바라보았다.
하얀 티셔츠에 까만 머리가 흘러내리듯 볼록한 가슴에 닿아있었고 짧은 청 반바지 밑으로 그녀의 하얀 다리가 예쁘게 드러나 있었다.
“문희야…”
태식은 가볍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태식은 운전석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문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이마에는 햇빛에 하얀 솜털들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엷은 다홍색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수줍은 듯 꽃잎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태식은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가까이 대었다. 태식의 콧바람이 문희의 이마에 부딪히며 자신의 얼굴에 뜨겁게 닿고 있었다.
“응큼하기는…”
태식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중심을 잡고 있던 한 쪽 팔이 미끄러지며 문희에게 쓰러질 뻔 했다.
“안 잤어?”
“치, 자기는 내가 뭘 자요? 어떻게 나오나 보려구 자는 체 했을 뿐이지…”
태식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만지며 운전석으로 바로 앉았다.
“입술에 뽀뽀하려 했으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문희는 몸을 돌려 하얀 이가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태식을 바라보았다.
“그만 내리자.”
“치, 재미없어요.”
태식은 차에서 내려 문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작은 상가들이 있는 길을 지나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호텔 옆으로 놓여 진 산길로 걸었다.
산길 밑 골짜기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깎아지른 절벽엔 이끼며 이름 모를 나무와 풀들이 매달리듯 자라고 있었다.
“와, 좋다!”
“응, 여긴 참 좋지. 조용하고 멋있는 산책로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
“태식씨 수상해? 혹시 나 말고 여기에 누구랑 같이 왔던 것 아녜요?”
“하하, 그래 보여?”
문희는 장난스럽게 태식의 길을 가로막으며 묻다가 태식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내 태식의 옆으로 와 다정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산을 향해 올라가는 문희의 어깨 위로 태식의 팔이 바람처럼 사뿐히 올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