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歌之感] 바가바드기타 11장 신의 모습(神象)

in #kr6 years ago (edited)

천가지감_신의 모습.gif

이번 감상평의 릴레이 주자 @isis-lee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가 바가바드기타 11장을 대신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아쉽지만 릴레이가 끊겨서는 안되겠기에 천가지감天歌之感을 이어나갑니다.


11장의 구절 압축인용

출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이현주 옮김


아르주나 당신의 소멸되지 않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크리슈나 나의 모습들은 수백 수천 가지요, 색깔과 형태가 헤아릴 수 없이 다르고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도다.

아르주나 그러나... 오, 우주의 주인님이시며 모양을 갖추신 우주이신 분이여, 제가 당신의 끝과 중간과 처음은 보지 못하나이다.

크리슈나 나는 파멸이니라

아르주나 이제껏 한 번도 보여지지 않은 것을 보는 저는 기쁨에 넘쳐 있사오나, 그러나 여전히 제 가슴은 두려움에 짓눌려 있나이다. 오, 주인님이시여, 당신의 본디 모습을 제게 보여주옵소서.

크리슈나 그대가 본 나의 모습은 보기가 매우 어려운지라, 신들도 언제나 보기를 갈망하고 있느니라. 베다로도, 고행이나 공물로도, 희생제사로도, 아무도 그 대상으로 나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아르주나여, 다만 마음을 모아 자신을 내게 바치는 자들은 나를 이 모습으로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진실로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내 일을 하는 자, 나를 제 목표로 삼는 자, 오직 내게 골몰한 자, 집착을 여의고 아무에게도 나쁜 뜻을 품지 않는 자만이 내게로 오느니라.


01
크리슈나는 인간으로 나투신 신화신神化身입니다. 역사이래로 신의 모습에 관하여서는 많은 서사가 있어왔습니다. 신을 믿는 유신론有神論이든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無神論이든 신에 관하여 논쟁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확인이 되지 않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단어/개념이 있으니까요. 무신론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만 고정되고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인 무상無常에서 벗어나는 신은 없다는 것이지요.

02
바가바드 기타는 11장에서 신의 모습을 크리슈나의 말을 빌려 이렇게 설명합니다.

  1. 편재遍在한다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고 있다. 없는 곳이 없다. 우주 전체이다. 그렇기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나는 네가 어제밤에 무슨일을 했는 지 안다.
  2. 나는 파멸이니라 모든 것은 내 안에서 태어났고 내안으로 돌아온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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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ve Vision from Transfigurations/Alex g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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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 of the Wounded Healer from 영혼의 거울/Alex grey

즉, 신의 모습을 설명하자면 모든 것이 신이기 때문에 특정한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파멸된다는 것입니다. 즉,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자문화권 지성인들의 최고 경전인 주역周易에 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습니다.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됨/있게 함/활동하게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神无方而易无體
신령스럽다는 것은 특정한 방소도 없습니다. 따라서 변화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03
그런데 인간의 대표자, 그것도 엄청난 능력자(패배를 모르는 전사)인 아르주나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두렵다고요. 인간으로 나투신 크리슈나가 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신 앞에서 모든 존재는 파멸되고 죽어갑니다. 무상하지요. 그래서 두려운 거지요. 왜 두려웠을까요?

첫째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르주나는 말합니다. “제가 당신의 끝과 중간과 처음은 보지 못하나이다”라고요. 우리는 무언가 확실히 알아야 안심이 되는데 알 수가 없습니다. 앞에 보이는 현상만 있을 뿐 그 현상이 나타난 곳인 처음과 끝을 아무리 찾아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두려운 것이지요. 대개가 두려움의 원인은 무지無知/無明/어리석음때문입니다. 우리는 무명속에서 태어났다가 무명 속에서 죽는 존재이지요. 모르니까 졸라 무섭지요.

둘째로 두려운 이유는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실체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어느 한가지라도 고정되어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크리슈나께서 “나는 파멸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파멸의 현상을 앞에서 보여주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아르주나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로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나투어달라고 애원합니다. “제 가슴은 두려움에 짓눌려 있나이다. 오, 주인님이시여, 당신의 본디 모습을 제게 보여주옵소서”

자꾸 자꾸 변화하니까 딱히 표현할 수 있는 신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섭고요. 게다가 영원하게 존재해야 안심이 되는데 영원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사라져버리니까 졸라 무섭지요. 맞아요. 졸라 무서워요. 죽음이 무서워요. 자신의 가까운 친지가 신 앞에서 잘게잘게 부셔지는 것이 보여집니다. 졸라 무섭겠지요.

보이지 않는 변화는 우리가 잘 모르니까, 어리석으니까, 못보니까無明, 아무렇지도 않지만 갑작스럽고 큰 변화는 졸라리 무섭게 하지요. (코인 떡락 개무섬)

04
태어남이란 것도 죽음이 있기에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죽음이 바로 태어남이고 태어남의 태어남은 태어남이 죽어야 다시 태어남이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낳고 또 낳는 것을 역이라고 말합니다生生之謂易”라고 동양의 옛날 현자들은 주역을 졸라리 공부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변화無常/易란 것이 바로 신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05
11장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르주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크리슈나에게 제발 본래 모습으로 다시 나투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왜그럴까요? 졸라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보이는 화신인 크리슈나가 더 친근하고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크리슈나는 우상화/사견화/사이비화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신의 특성인 편재성과 무상을 표현하려다 보니 어떤 모습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이 이제는 고착화되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종교분쟁이지요. 아니면 “내 말이 옳고 네 말은 틀려. 싸워서 이긴 사람 말이 진리야”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06
바가바드기타 11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를 경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크리슈나는 말합니다.

베다로도, 고행이나 공물로도, 희생제사로도, 아무도 그 대상으로 나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아르주나여, 다만 마음을 모아 자신을 내게 바치는 자들은 나를 이 모습으로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진실로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내 일을 하는 자, 나를 제 목표로 삼는 자, 오직 내게 골몰한 자, 집착을 여의고 아무에게도 나쁜 뜻을 품지 않는 자만이 내게로 오느니라.



언어로 규정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표현되어지는 모든 것은 절대로 신을 대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상화/도그마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졸라 고집불통인 거지요. 대화와 타협이 없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되버립니다.

07
그래서 크리슈나는 친절하게 다시 일러줍니다. 다만, 마음을 모아 자신을 바치는 정성만을 신이 알아줄 뿐이라고 말입니다.

결국은 기승전-정성스러움과 겸손함성(誠)과 경(敬)입니다.

至誠如神
지극한 정성스러움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中庸



내 앞에 나투어진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절대로 해악을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나쁜짓 하는 그새끼가 예수님 혹은 부처님 혹은 내가 졸라리 사랑하는 그녀 혹은 그남자라면 어떨까요? 졸라 용서됩니다. 그리고 이해하게 됩니다. 신이니까요. 나를 절대로 나쁘게 되게 하는 신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때문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악한 짓을 저지른 자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안아줄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앞에 나투는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존재와 상황에 대하여 겸손함, 경건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졸라 어렵지요. 왜냐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집착의 욕망덩어리이기 때문이지요. 그 방법으로서 바가바드기타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집착을 여의고 아무에게도 나쁜 뜻을 품지 않는 자만이 내게로 오느니라



아! 졸라리 어렵지만 그래서 수행修行, 요가라고 표현하는가 봅니다. 완성으로 가는 미완성의 영원한 도닦음의 길이지요. 졸라리 졸라리 졸졸라리라리 졸졸졸라리라리라리 앗싸리 노력해야하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저는 졸라피터이고 시바피터입니다. 졸라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고, 시바피터가 된 연유는 요기를 참조하삼


12장과 13장의 감상평은 퀀텀요정 보얀님(@levoyant)께 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すみません보다 강한 大変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ps. 불금뮤직이후 장르를 넘나드는 땜방 포스팅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음하하하하! 클롭일몰ㄴㅗㅁ프스키님(@clubsunset) 들으시욥! 오늘은 수요일, 불금이 이틀 남았소. 날씨도 이래저래 견딜만하오. 코인떡락 핑계도 소용없고, 날씨 탓도 소용없소. 일 때문에 바쁘다?(그건 어쩔 수없고...)

요로시꾸 불금뮤직와데스 쓰미마생 ~


[천가지감天歌之感] 독립군 @taotao님의 바가바드기타 정리연재


서언
1장 < 내면의 전쟁 >
2장 < 샹키아 철학의 이론과 카르마 요가의 훈련 >
3장 < 카르마 요가-행위를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 >
4장 <가냐 요가 - 지혜를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 >
5장 <포기와 자유 >
6장 <명상의 길 >
7장 <지혜와 깨달음 >
8장 <영원한 신성 >
9장 <위대한 지혜와 비밀>
10장 <신의 광채>
11장 <우주적인 비전>
12장 <헌신의 길>
13장 <물질과 정신>
14장 <현상셰계를 움직이는 세 기운을 초월하는 하는 요가 >


10장까지의 감상평 릴레이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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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신과 세상은 하나라고
해도 되겠지요~?
넘 좋은글 읽고 가옵니다^^

ㅋㅋㅋ

칭창해주셔서 감사해용, 너므 조흐아



ps. 신과 세상은 하나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한맛一味라는 표현이 제 개인적으로 좋아보여요. 하나라고 표현하면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라는 원래의미보다는 획일적으로 똑같다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서요. 어떤 기독교 신자(다는 아님)들이 하나님, 하나님할때마다 왜이렇게 거부감이 나는지 말입니다. 나의 신이고 당신 신은 아니야같고 그래서 내 신 하나로 통일하자는 이딴식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한맛이라는 표현이 더 좋은것 같아요. 여러가지재료로 만들어진 맛있는 음식이 표현하는 그 한맛이요. 다양성도 존중하면서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큰 하나됨이겠지요.

세상을 창조하고 모든것이 그로부터 비롯된 신 하늘과 지상의 주인이신 신은 손으로 만들어진 사원에 거하지 않으며 인간의 손에의해 도움을 받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다.
신은 편재 한다는 깨달음으로 너의 가슴과 마음이 혼란되지 않게하고 쉬게하라. 어린이 조차도 공간과 거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너희 모두는 신안에 살고있고 신 바깥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ㅎㅎㅎㅎㅎ
알레르기 일으키 시라고 끄적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초종교인?ㅎㅎ

편한밤 되소서~💖

ㅇㅗㅁㅁㅏㅇㅑ 크리스챤이셨어요?
그리고 님께서는 초종교인이신 영성인이시죠.

저는 불교적 카톨릭이에염ㅎㅎㅎ
그래서 제본명이 쥐피터지요.

아멘

ㅎㅎㅎ
저두 부처님 갈침 완전 좋아합니다

쥐 피 터

저 웃기실라꼬~?

전 그림들이 신비롭게 느껴지네요.^^

모르니깐 졸라 무섭 ㅋㅋㅋㅋ 완전 공감합니다.

졸라리 잘 읽었습니다.
정말입니다.

ㅋ. 졸라리 감사해요.

요건 명곡 명작 졸라 콤보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