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마시다, 60살이 넘은 에스프레소 바

in #kr6 years ago (edited)




  세월을 마시다  

 Pellegrini's  Espresso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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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살 넘은 카페

멜번에 사는 동안 습관이 생겼다.
‘낯선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
떠나기 전, 어느 도시로 갈까 고민하다가 멜번은 커피의 도시라는 얘기를 듣고 망설임없이 멜번으로 정했다. 언젠가 카페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 커피의 도시 멜번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평소처럼 그를 기다리며 오늘은 어느 카페에 가볼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오래된 서점 바로 옆에, 60년이 넘은 에스프레소 바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 자리에서 60년?
1950년대부터 그 모습 그대로 커피를 만드는 곳.

‘오늘은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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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rke St. Melbourne CBD


그곳은 우리가 자주 가던 시내 중심가 브루크 스트리트(Bourke St)에 위치했다. 늘 가던 블록에서 한 블록만 더 올라가면 빈티지한 벽돌 건물에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트램에서 내리자, 정면에는 의사당(Parliament)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잡지에서 봤던 빈티지한 서점과 기대하던 카페가 보였다. 한 눈에 봐도 족히 100년은 넘어 보이는 건물 모퉁이에 위치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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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Bourke Street, CBD, Melbourne, VIC



오래된 네온사인과 60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로 된 출입문과 테이블, 윈도우 안으로 보이는 오래된 사람들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세월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좁은 내부에 작은 의자와 바 테이블이 주욱 늘어서있다. 짙은 나무 색의 빈티지한 테이블과 의자, 바둑판 패턴의 바닥, 벽에 붙은 낡은 액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이 만들어낸 독특한 분위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페'와는 확실히 달랐다. 커피향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이탈리안 음식 때문인지 치즈 냄새 같은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가족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 희끗한 머리의 할아버지까지 가게라는 느낌보다 친구네 집에 놀러온 기분이었다.

메뉴판을 찾으려고 두리번 두리번 대니 왠지 이 가게 큰며느리 일 것 같은 아주머니가 천장에 걸린 낡은 메뉴판을 가리킨다. 메뉴판도 나무다. 세월이 보인다. 메뉴 이름만 봐서는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대충 해산물 스파게티로 보이는 메뉴와 라떼 한잔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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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tage style interior of Pellegrini's Bar


'이곳에서 30년 동안 아침을 먹었어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아시안 관광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바에는 커피 머신과 함께 갓 구운 파이와 케잌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아침 8시에 문을 열어 밤 11시반 까지 운영한다. 무려 30년 동안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는 리뷰가 생각이 났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추억을 쌓은 것이다. 인생에서 3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아마 그에게 이곳은 카페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장소일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에 빠졌을 때, 주문한 라떼가 나왔다.
멜번에서는 커피를 시키면 화려한 라떼 아트는 덤이었다. 그러나 여긴 그 흔한 라떼 아트 하나 없다. 결코 그런 화려함에 흔들리지 않았다. 뭔가 잔뜩 꾸미고 치장한 카페가 아니라 우리 집 앞에 가면 늘 있는 동네 카페 같은 친근함이 커피 맛에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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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fe Latte by Pellegrini's Bar


커피가 아니라, 세월을 음미하다

커피가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역사와 시간을 음미하는 기분. 낡고 오래되어 촌스럽지만, 이 공간 특유의 개성은 멜번 중심가의 흔히 핫플레이스라고 부르는 카페들이 쉽게 따라갈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이곳은 1950년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처음 문을 열었다. 커피 외에도 파스타, 라쟈냐 등 정통 이탈리안 음식도 인기가 좋다.

은근히 기다려지던 파스타가 나왔다. 분명 하나를 시켰는데 양은 2인분이다. 둘이서 파스타 하나를 시킨 걸 아셨는지, 아주머니가 양을 더 주신건가. 커다란 접시를 가득채운 풍부한 해산물.

몇 젓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금방 접시가 비워지는 요즘의 파스타와는 다른 차원의 양이었다. 비주얼도 달랐다. 그냥 소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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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afood spaghetti by Pellegrini's Bar



하지만 소박한 비주얼과 달리, 맛은 일품이었다. 파스타 면에 국물을 흠뻑 적셔서 해산물 가득 한입에 넣고 씹으니까 입 안이 풍성해진다. 분명 요즘 레스토랑에서 파는 파스타와는 다른데, 그냥 이 장소와 이 분위기에 어긋나지 않는 파스타였다. 우리는 또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갔다.

포크와 파스타를 더 챙겨준 아주머니 덕분인지, 가게 전체적으로 풍기는 이 뭔가 구수한 냄새 덕분인지, 어쨌든 세련되고 화려한 것보다 소박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겐 기억에 남을 만한 장소였다.

커피와 파스타의 맛을 떠나 이미 한 자리에서 한결같이 가게를 유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멜번의 명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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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ld pictures filled with the wall


모든 게 너무 빠르다

1년을 잠시 떠나있다 돌아왔는데 우리 동네 역 주변은 처음 보는 가게와 카페들로 북적였다. 늘 느끼는 거지만, 우린 모든 게

‘참 빠르다.’

멜번이 매력적인 이유는 역사와 세월의 힘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멜번에서 살던 우리 집은
100년이 넘은 건물이었다. 서울이었으면 벌써 재개발로 사라졌을 집인데 이곳에선 건물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 비싼 값을 받는다고 한다.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 느낌이다.

며칠 후,
하우스 메이트인 Josh가 그의 아내를 위해 컵에 사진을 인쇄해서 선물했다. 사진 속 그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펠레그리니스 바 안에서 서로를 보며 웃고 있다.

멋진 장소가 그렇게 많은데
그들은 이곳에서 웨딩촬영을 했다.
하지만 우린

그 이유를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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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llegrini's Espresso Bar

66 Bourke Street, Melbourne 3000
+61 3 9662 1885
www.facebook.com/pages/Pellegrinis-Espresso-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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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카페가 정말 아늑하고 운치있어 보여요~ 너무 맘에 들어요~ 커피를 엄청 좋아하는데 저곳에서 커피 한잔 하고프네요~ 멜번 일상 보러 자주 올께요~ 자주 소통해요~^^ 팔로,보팅하고 갑니다~^^

반가워요^^ 많은 카페를 다녀봤지만 기억에 남는 장소였어요. 오랜 세월동안 간직해온 스토리 때문인지 커피도 왠지 더 구수하게 느껴졌던것 같아요. 앞으로 자주소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