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삼십대 여자를 '버닝'시키다(Burning,2018) *스포주의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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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과 하루키의 만남.
포스터를 보고 영화의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라는 걸 알았다.
하루키 원작이라는 정보 외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
2시간 2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흘렀다.
아주 오랜만에 긴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 버닝 Burning 분노하다
영화의 큰 메시지는 이미 제목에 그대로 담겨있다. 분노.
세상을 향한 세 주인공의 분노가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다.

# 세 명의 주인공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은 세상을 사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종수, 그는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묵묵히 순응하며 살아가면서도 그는 소설가를 꿈꾼다. 그에게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떤 소설을 쓰고 싶냐고 묻는다. 그는 아직 모르겠다고, 자기에게 세상은 아직 수수께끼 같다고 말한다. 해미. 그녀는 어렸을 적 종수와 한 동네에서 살았다. 성인이 되어 우연히 종수를 만난 그녀는 가게 개업식 행사에서 춤을 추는 일을 한다. 그녀는 춤을 추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취미로 판토마임을 배운다. 그녀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 꿈을 잊지 않으려는 인물이다. 종수에게 마임을 보여주면서 그녀가 하는 말은 인상 깊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잊는 게 중요하다고. 그녀에게 그 무엇은 꿈이다. 마지막으로 벤은 가장 냉소적인 인물이다. 특별히 무슨 일을 하지 않는데도 고급 차와 멋진 집을 가졌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하는 게 일상인, 종수가 표현한 대로 위대한 개츠비 같은 인물이다.

# 금수저와 흙수저
영화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를 보여준다. 종수 아버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분노조절 장애자다. 그런 불 같은 성격 덕분에 종수 엄마는 집을 떠났고,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아버지를 변호해준 아버지 옛 친구는 종수에게 말한다. 몇 년 전, 강남에 땅 하나를 사라고 그렇게 말해도 아버지는 자존심 때문에 사지 않았다고. 그때 안 사서 지금 이 꼴이 됐다고. 이런 아버지를 둔 종수에게 남은 건 날마다 대남 방송이 들리는 낡고 허름한 파주 집이다. 쓰러져가는 집엔 송아지 한 마리만 쓸쓸히 남아있고 종수는 송아지에게 먹이를 챙겨준다. 반면 벤은 뭘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른 나이에 이미 포르쉐를 끌고 럭셔리한 저택에 산다. 주기적으로 친구를 불러 파티를 하고 늘 그의 곁엔 새로운 여자들이 있다. 영화는 종수와 벤을 대조적으로 비춰준다. 종수의 낡은 트럭과 벤의 포르쉐. 종수의 낡은 집과 벤의 저택처럼.

# 수수께끼 같은 세상
종수는 해미에게 묻는다. 벤은 몇 살인지, 그렇게 이른 나이에 어떻게 포르쉐를 타고 저런 대저택에 사는지. 종수에게 세상은 수수께끼 같다. 종수의 물음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저런 수수께끼 같은 사람을 보고 똑같이 물어본다. 대체 저들은 무얼 하기에 아무것도 안해도 부유하게 살 수 있는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 소설 속 허구와 진짜 현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종수가 소설 속 허구와 진짜 현실을 오락가락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미 집에 있던 고양이는 실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다. 해미가 어렸을 적 빠졌다는 우물은 실제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종수가 쓰는 소설 속 가상 세계와 종수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종수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팍팍한 현실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현실에 기댈 수 없으니 소설 속 가짜 세상에 기대는 것은 아닐까. 해미는 어느 날 갑자기 종수를 찾아온 걸까. 종수의 상상 속 인물일까.

# 팍팍한 현실에서 꿈을 갈망하는 해미
영화 속 세 주인공은 모두가 불행하다. 해미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 하지만 그 꿈은 멀기만 하다. 그녀의 옥탑방 작은 창문으로 아주 가끔 빛이 새어 들어온다. 작은 창으로 보이는 남산 타워는 그녀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꿈을 갈망하는지 잘 보여준다. 우물 속에 빠진 그녀는 누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언제나 꿈을 갈망하는 그녀답게. 진짜 배고픈 리틀 헝거가점점 삶의 이유를 갈망하는 그레이트 헝거가 된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려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사람들 앞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춤을 흉내내는 데 그런 그녀를 주변 사람들은 비웃지만 그녀는 구슬프게 춤을 춘다. 진심을 다해.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종수에게 사막에서 봤던 노을을 설명하며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노을처럼 불타 스르르 사라지면 좋겠다고. 꿈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청춘, 꿈꾸는 청춘은 행복하다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스르륵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현실이 힘든 건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불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알몸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춤을 추는 장면은 슬프지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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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팍팍한 현실을 묵묵히 사는 평범한 청년, 종수
종수는 우리 같다. 고개를 돌려보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우리를 대변한다. 택배 일을 하고 소설가를 꿈꾸지만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망설인다. 아빠가 감옥에 가야할 상황에 놓이자 그가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글재주로 탄원서를 쓰고 동네사람들에게 서명을 받는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집에 하나 남은 송아지를 돌보기도 하고, 동네 이장에게 송아지를 팔 곳이 있냐고 묻는다. 그는 정말 묵묵히 현실을 산다.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게 그림자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 가질 건 다 가진 것 같지만 영혼없이 사는 벤
처음에는 벤이 종수의 팍팍한 현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려고 만든 캐릭터만으로 생각했는데 겉으로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가질 건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벤도 슬픈 캐릭터다. 결코 눈물 한번 흘려본 적 없는 냉소적인 그에게 세상은 시시하다. 그의 눈에 해미는 너무 순수하고 종수는 너무 진지하다. 대저택에 살지만 텅 빈 집은 쓸쓸해 보인다. 그의 옆엔 늘 새로운 여자가 있다. 해미처럼 순수하고 어린 열정 많은 여성들은 그를 쉽게 따르고 그는 그런 그녀들을 데리고 다니며 쾌락을 즐긴다.

# 종수의 변화, 분노
현실이 아무리 팍팍해도 그저 묵묵히 참고만 살던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게 되면서 내면의 분노를 표출한다. 사랑하는 여자 해미를 벤이 죽였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벤을 죽이고 그의 차와 함께 불에 태우면서 참았던 분노를 표출한다. 벌거벗은 채 트럭 안에서 씩씩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종수의 뒤로 활활 불타오르던 불은 마치 해미가 눈물 흘리며 바라보던 노을과 흡사하다. 세상에 대한 분노.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세상에 대한 배신감. 종수는 꿈을 갈망하던 해미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대한 분노를 처음 드러낸다.

# 헛간을 태우다,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벤
벤은 종수에게 비닐 하우스를 두 달에 한번씩 태우는 독특한 취미를 고백한다. 종수는 그래도 괜찮냐고 묻고 벤은 그래봤자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흔적없이 다 타버린다고. 그러면서 한국엔 쓸모없는 비닐 하우스가 너무 많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엔 이미 망가져버린 낡은 비닐하우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다. 종수는 벤이 태웠을 비닐하우스를 미친듯이 찾아다닌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벤이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는 없는 것 같다. 영화는 그가 비닐하우스를 무작정 찾아다니는 장면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벤이 가진 것들은 버려진 비닐 하우스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은 다 허무한 것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벤은 비닐 하우스를 태움으로써 말하는 것은 아닐까. 니가 그렇게 찾아다닌 것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겉으로 다 가진척 해도 영혼이 텅 빈 벤과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꽤 많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다 보고 지하철 역으로 들어오자
‘버닝’ 광고가 보인다.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청춘을 살아가는 세 명의 모습은
내 자신이기도 하고 내 주변 사람이기도 하다.

그냥 참고 묵묵히 살아가기에
현실은 너무 버겁다.
감독은 세상에 대한 '분노'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 하지 말라고,
반짝반짝 화려해 보이는
세상의 겉모습에 진실을 감추지 말라고.

나는 얼마전에 SNS를 지웠다.
자주 염탐하던 SNS가 어느 순간 미치게 싫었다.
그 속에서 보는 내 주변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씁쓸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산다는 현실이 슬펐다.

명동 성당 앞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찌를듯이 서있는 빌딩과
화려한 조명의 네온사인.
세상은 뒷걸음질 치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데
세상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속은 곪을대로 곪았다.

우리에게 진실은
곪아터진 속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속으로만 삭히지 말고
솔직해져야 한다.

아프다고. 슬프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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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버닝 봤는데 해석 정말 잘 하신거같아요

감사해요. 참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였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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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감사합니다^^ 아직 이 세계가 쉽지 않네요. 좀 더 공부해서 다음엔 이벤트도 도전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