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이의 언어(2)

in #kr5 years ago (edited)



아린이와의 대화는 늘 새롭고 복잡 미묘하다. 패턴이 있다 싶으면 또 알 수 없어진다. 아린이도 변하고, 나도 변하니까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도 몇 달간 모은 주옥같은 어록을 정리해본다.




"아빠 선물이야!"



어느 주말에 아솔이는 엄마랑 외출을 했고 나와 아린이만 집에 있었다. 나는 상쾌한 맘으로 청소를 시작했는데, 아린이가 중간에 자꾸 이것저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청소기를 끄고 아린이에게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다시 돌아와서 청소기를 주워 들고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결국엔 아린이에게 "아빠는 지금 청소를 하고 싶어. 아린이가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있다가 도와줘도 될까? 그전까진 혼자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으면 어떨까?"했더니 약간은 시무룩하게 승낙을 한다. 그리고 청소를 마쳤더니 아린이가 달려와서 내 팔에 엉성하게 생긴 팔찌를 끼워주며 하는 말. 아까 나한테 귀찮게 도와달라고 했던 게 아빠 선물 만들려고 그런 거였니.(아니면 아빠가 정색한 거 부끄럽게 하려고 급 용도 전환 한 거니..)


"솜사탕!"



아린이가 어린이집에서 3차원 도형을 배우면서 구, 정육면체, 원뿔과 같은 걸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걸 어디선가 배웠으니까 아는 거긴 하겠더라.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는 아린이가 배운 걸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원을 세워서 돌리면 뭐가 될까요!!??"하고 신나게 물었는데, 아린이가 더 신나게 대답한 말. 응 그래. 니 말이 맞아..


"오래 하는 걸 선택했네?"



요즘도 아린이에게 많이 강조하는 것이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아솔이의 자유를 좀 보장해주렴..) 그날은 아린이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 아빠가 놀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는데, 나는 가정에 돌볼 일이 많을뿐더러 혹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건 의무가 아니며 오래 하던 짧게 하던 아빠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길 했다. 물론 아직 아린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므로 아린이는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그리고 그날 자기 전에 갑자기 간지럽히기 놀이를 해달라고 했다. 나도 미안한 맘에 열심히 간지럽혀 줬더니 한참을 구르다가 정신을 차리고선 한 말.


"아빠도 내가 숫자 말한거 이해해줘서 고마워.."



아린이가 밥을 그만 먹겠다고 하면 우리는 주로 몇 숟가락을 더 먹는 게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 엄마, 아빠, 아린이가 각각 숫자를 이야기하고 서로 의견이 다르면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요즘은 잘 먹지만, 초반에는 아린이는 주로 세 숟가락, 엄마랑 아빠는 네댓 숟가락을 오갔다. 그날도 아린이는 밥을 남기고 싶다더니 세 숟가락을 더 먹겠다고 먼저 외쳤다. 내가 보니 세 숟가락이면 충분히 먹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좋다고 했고 아린이는 세 숟가락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내가 "아빠는 아린이가 밥을 충분히 먹고 튼튼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아린이가 이만큼 먹어줘서 고맙네?" 했더니 한 말. 처음엔 "무슨 숫자?"하고 물었었는데.. 아까 그 세 숟가락 말이었다.


"아빠 회사 싫어하지?"



아린이가 영어를 좀 배웠다. 그래서 식사 시간에 우리는 "I like"으로 시작하는 말을 하나씩 돌아가면서 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 하다가 갑자기 아린이가 한 말. 응? 왜? 어디서 그게 보였어? 아빠가 매일 회사 가서 하루 종일 있다 오는 거 보면 분명 회사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I like 회사"를 아빠가 안 해서...?(지난번에 아빠 재밌는 회사에 간다고 아린이가 강조했던 게 생각난다..)


"우리 가족이 함께 살면서 나도 약속을 지킬게"



아린이가 어느 날 보물찾기 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상품은 없으니 포스트잇에 편지를 써서 숨기는 걸로 하잔다. 그때 아린이는 아직 한글을 쓰진 못할 때다. 그래서 주로 아린이는 종이에 자기만의 부호를 써서 숨겼고, 엄마나 아빠가 찾으면 그걸 자기 맘대로 읽어주었다. 내가 쪽지 하나를 찾았더니 거기에 이렇게 쓰여있다며 읽어준 말. 이번에 우리 가족의 핵심가치로 꼽히진 않았지만, 한참 그렇게 서로 '약속'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아린이는 아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너무 약속에 대해서 집착하는 건 아닌가.. 내 스스로도 의심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린이가 기특해서가 아니다. 부족한 부모의 부족한 가르침과 뭔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아이라는 이 작은 우주가 너무 안쓰럽고 소중해서였다.


"아니.. 아빠 지금 나는 그거 말고 딴 이야기 할라고....."



우리 가족은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다 보니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많이 한다. 물론 아린이가 발언권을 지배하지만. 나는 아직 경청의 자세가 미흡한지라 아린이가 뭔가 말을 할 때 대충 내용을 짐작해서 맞장구치려는 경향이 있다. 그날도 아린이가 뭔가 운을 떼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딱 감이 와서 "아~ 아린이는 이게 이렇고 저렇고 그렇고 하다는 이야기지?" 그랬더니 가만히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 한 박자 쉬고 정색하니까 진짜 무안하더라.


"근데.. 나 어른되면 떠나는 거 알지?"



나는 자애명상을 좋아한다. 누군가의 건강과 행복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기원하는 마음이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종교나 신비주의 차원을 떠나서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있다*. 나는 가끔 아이들을 안고서 마음 속으로 아니면 소리를 내서 행복을 기원해준다. 그날도 자기 전에 아린이에게 "아린아, 아빠는 아린이가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와 지금, 그리고 또 먼 미래에 아빠만큼 컸을 때의 아린이까지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길 응원하고 지지한단다."하고 말해줬더니 굉장히 근심스러운,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한 말. 그리고 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연이어 이렇게 말했다. "나도 엄마 아빠 말고, 남자를 찾아야 하잖아. 알지?"


"귀찮죠~"



우리는 아이와 우리가 의견이 다른 상황에서 서로 '상의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 아린이의 경험은 아마 상의가 아니라 꾸지람일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린이는 '상의'라는 표현을 엄마 아빠가 화났을 때의 상황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거 같고, '길고 지루한 훈화 말씀'의 인상을 가진 것 같다. 그건 완전히 내 실수인데.. 어느 날 또 하나의 '상의'를 하고 있을 때 아린이가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길래 내가 "아빠랑 상의하는 게 귀찮아? " 하고 물었더니 한숨을 팍 쉬면서 한 말. 응 아빠가 잘못했다.


"끝나지 않게 회사 안 가고 싶어?"



아린이가 '영원'이란 단어를 배워왔다. 그리곤 나더러 그 뜻을 아는지 묻는다. 모른다고 했더니 "그건 바로!! 끝나지 않는 거야~"한다.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그날 저녁에 다음 날의 가족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내일은 토요일이라 회사를 안 간다며 약간 좋아하는 내색을 했더니 아린이가 웃음을 섞어서 한 말. 거기에 내가 엄청 웃으며 대답을 못하고 있었더니 아린이는 이렇게 덧붙이며 자리를 떴다. "가끔 보면 아빠는 진짜 회사 가기 싫은 거 같단 말야.."



*래리 도씨 박사가 한 사람의 사고, 태도, 치유 의도가 다른 사람의 생리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는 제3기 치료(제2기 치료에 비해 심신 치료를 주로 한다)는 기도의 치유력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이 이루어지면서 그 효과가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는 기존의 물리적 현상과 전통 과학의 세계관에 위배된 현상이지만 긍정적인 증거가 우세하다. -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양문, 2008, 3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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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신기합니다! 너무귀엽네요

읽어주시고 같이 신기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저도 너무 어이 없게 신기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