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기억하는 기년회

in #kr5 years ago (edited)



올해는 가족 기년회로 의미 있는 한 해의 마무리를 가졌다. 기년회는 애자일컨설팅 김창준님이 제안하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다. 통상 연말에 있는 망년회는 지난 해를 술먹고 잊어버리자는 의미라면, 기년회는 한 해의 교훈들을 되짚어 보고 그 성공을 내년에도 이어나가기 위한 의식이다.

기년회는 <마인드셋>에서 캐롤 드웩이 제안한 회고의 방식과도 통하는 면이 있어 마음에 쏙 들었고, 이것을 혼자서 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누구보다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이 성공을 유지하고 계속 성장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캐롤 드웩, 「마인드셋」, 김준수 역, 스몰빅라이프, 2017, 345면.


24일, 아내와의 기년회



크리스마스이브에 휴가를 내서 한다는 일이 기년회라니 참 재미없는 커플 같긴 하다. 하지만 나의 제안에 아내가 흔쾌히 응해주어서 우리는 이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낮술과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로 가서 기년회 시간을 가졌다.(이동 중에 갑자기 동전 노래방을 가자는 아내의 속삭임이 있었으나 굴하지 않았다.)

진행은 김창준님이 제안하신 기년회 방식과 거의 같았다.

1. 각자가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머터리얼들을 꺼내놓고 하나씩 시간순으로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2. 그러다가 자신에게 의미 있었던 이벤트가 있다면 인덱스카드를 꺼내서 그 내용을 서술해본다(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게 어떠했다). 그리고 카드를 뒤집어 그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짧은 문장이나 단어로 요약해서 적어본다.
3. 이 과정을 반복해서 한 해를 돌아보며 만든 인덱스카드를 테이블에 늘어놓고, 각각의 교훈들을 보며 중요도와 의미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세워 본다.
4. 가장 높은 랭크의 3개의 카드를 선택하고 내가 이 3장의 카드에서 얻은 교훈을 지금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년에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해본다.
5. 상대방과 이것에 대해 대화한다.



나는 주로 구글캘린더와 아이클라우드의 가족사진폴더, 몇 개의 노트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해서 한 해를 돌아보았고, 아내는 일기장과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보았다.


이 시간을 보내면서 아내와 내가 함께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은 2018년 동안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과 교훈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그것들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거다.

순서에 없지만 추가로 우리는 한 해 동안 감사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것인지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나는 가장 감사했던 분을 한 분씩 뽑았고 각자 작은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그렇게 했다.



25일, 아이들과의 기년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한 해를 돌아보는 기년회 기회도 마련했다. 아솔이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아린이에겐 크리스마스의 의미도 굉장히 중요하므로, 선물과 풍성한 먹거리를 곁들여서 진행을 했다.(이 정도 규모의 무제한 간식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1. 산타 할아버지 선물 받기
2. 벽에 있는 우리 가족 그림에 크리스마스 축제 장식하기
3. 함께 점심 요리하고 식사하기
4. 한 해를 돌아보는 영상 보기
5. 한 해 동안 감사했던 일들을 카드에 그리거나 적고 서로 이야기 나누기
6. 우리 가족 그림 밑에 카드 붙여서 장식하기
7. 감사한 사람들 떠올려보고, 감사할 방법을 생각해보기.



아이들과 함께하는 기년회는 '감사'에 좀 더 포커스를 맞췄다. 우리는 저녁 식사 시간에 다 함께 모이면 "감사합니다!"하고 외치고 식사를 하는 약속이 있는데 한 끼 식사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헌신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 감사의 대상에는 태양과 공기를 비롯해서 마트 아줌마나 택배 아저씨도 있다. 아내와 나는 그것이 무척 좋은 교육이기도 하다고 생각했고 아이들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식으로 감사한 일들을 되짚어 보는 것이 훌륭한 방향이라 생각했다.

아내는 한 해 동안 찍은 우리 가족의 사진들 중에 기억할 만한 장면들을 뽑아서 짧은 영상을 만들어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돌려 보며 웃었다. 아솔이는 영상 재생이 끝날 때마다 다시 틀어달라고 고함을 치곤했다.(유튜브 세대는 영상 재생 종료가 뭔지 모른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 미술 도구를 동원해 하얀 포스트잇에 글과 그림으로 감사한 것들을 떠올리고 표현해보았다.




여러 가지 감사가 있었지만, 놀랍게도 아린이가 꼽은 감사한 것들 중에 "공원에 꽃과 나무들이 있어서"가 있었다. 아린이가 이런 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게 또 나에게 감사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 가족의 그림을 붙여둔 벽면으로 가져가 그 아래에 장식했다.





매일 함께 지내는 가족이지만 각자가 한 해를 돌아봤을 때의 의미와 교훈들이 조금씩 다르고 또 어떤 식으로 새해를 조망하는지도 다르다는 것. 우리는 따로 또 함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역시 가족의 대화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24일도, 25일도 모두 수고의 손길을 거친 만큼 한 해를 돌아보기에 아쉬움이 없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단연 할아버지 할머니였고, 우리는 신년인사 영상을 찍어 양가에 보내는 것으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기로 했다. 그리고 북적한 곳으로 나선 짧은 외출과 함께 우리의 크리스마스와 기년회가 모두 끝이 났다.



사실 아린이는 일 년 내내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미디어의 폐해다..) 나는 이 행사를 준비하며 이것이 아린이의 상상 속의 '메리 크리스마스'에 부합하는 경험이 될지 조금 불안감이 들었다. 그 정도 기대와 바람이면 왠지 꿈과 환상의 나라에 가서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타고 모든 선물을 다 받고 모든 간식을 다 먹어도 못 채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긴 하루가 끝이 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나는 아린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기대만큼 즐거웠는지. 아린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흔들어대며 외쳤다.

"엄~청 엄청 엄청 재밌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