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커뮤니케이션 - 욕구에 연결하기

in #kr6 years ago (edited)



사회생활을 하며, 또 가정을 꾸려가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합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의견을 조율해나간다는 게 정말 굉장한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최근에 나는 이것이 인생의 핵심 기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일일이 세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는 일은 하루 일과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회의 일정을 조율하고, 점심 식사 시간과 메뉴를 결정하고, 프로젝트 범주에 있었던 요소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내일 있을 업데이트 절차를 결정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다행히 이 건들은 모두 어렵잖게 처리됐지만 많은 경우에 의견 조율 과정은 피곤하다.


추측에 소모되는 에너지


모든 의견의 배경에는 ‘욕구’가 있다. 그리고 욕구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과 함께 짝을 지어 발화의 내용을 구성한다. 나는 --때문에 --하고 싶다. 하는 식이다. 여기서 --때문에가 욕구를, --하고 싶다.가 욕구 성취 방법을 나타낸다.

의사 표현에 있어 욕구가 알맹이고 방법은 껍데기인 셈인데 이 구조에 대해서 서로가 인식하지 못하면 대화가 길어지고 복잡해진다. 아래는 최근 내가 들은 말 중 몇 가지를 골라서 예시로 옮겨보았다.


(회의실에서 서버 개발자가) “기획서가 다음 주에는 무조건 나와야 돼요.”
(막 출근을 한 동료가) “혹시 빵 드실래요?”
(식탁에서 아이가) “나는 밥 먹기가 싫어!”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 말들은 사실 알맹이가 빠져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기 원하는지 욕구가 들어있지 않은 문장이다. 알맹이가 빠진 말을 들었을 때 에너지가 소모되는 이유는 말한 사람의 욕구를 추측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측했던 것들은 이렇다.


“기획서가 다음 주에는 무조건 나와야 돼요.”
나의 추측: 다음 주엔 개발에 들어갈 수 있나 보군?

“혹시 빵 드실래요?”
나의 추측: 같이 사러 가잔 건가? 아님 어디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을 얻어 온 건가?

“나는 밥 먹기가 싫어!”
나의 추측: 반찬이 맘에 안 들었나?


출근한 동료가 빵을 먹겠냐고 권한 건 몇 주 전의 일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을 떠올린 게 굉장히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얼마 전부터 우리 사무실의 다른 동료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료를 어디선가 많이 가져와서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음료를 계속 나에게 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경험을 기반으로 현재의 문맥을 추측했던 것이다.

추측은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지식과 경험의 제한을 받는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내 추측들은 사실과 달랐고 대화에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이런 식의 대화를 쌓아간다는 건 참 어설프고 힘겨운 일이다. 욕구와 방법이 명료하지 않은 말들은 불필요한 해석의 여지를 넓혀 오히려 대화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한다.(결국 나는 그 빵을 먹지 않았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갈등 해결사의 최대 적은 명쾌하지 않은 말이다. - 조셉 그레니 외, 「결정적 순간의 대면」, 김영사, 2008, 137면.


욕구에 연결된 대화


“기획서가 다음 주에는 무조건 나와야 돼요.”
실제 욕구: 이번에 진행되는 두 개의 프로젝트의 스펙을 명확하게 알고 일정을 안전하게 잡고 싶다. 급하게 많은 일을 처리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그러려면 이 기획이 빨리 정리되어야 한다.

“혹시 빵 드실래요?”
실제 욕구: 빵을 하나 샀는데 너무 양이 많아서 내가 혼자 먹기엔 부담스럽다. 누군가 나눠 먹을 사람이 있으면 줘야겠다.

“나는 밥 먹기가 싫어!”
실제 욕구: 지금 하고 있는 놀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고 싶지 않다. 밥을 먹지 않고 계속 놀고 싶다.


여러 번 핑퐁을 통해서야 이처럼 각각의 말들에 숨어있던 욕구를 찾을 수 있었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때야 이 과정에 그다지 피로감을 느끼진 않겠지만(아니 사실 피곤하게 하는 친구들도 있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무거운 주제를 다뤄야 할 때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결정을 두고 마주한 자리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방법 뒤에 숨겨진 욕구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욕구를 사람들이 수용해주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판단해버린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욕구 성취 방법만을 주장하며 논의를 겉돌게 한다. 자신의 욕구를 성취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할 기회까지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세 번째 사례에서 사실 아이가 필요로 했던 건 약간의 놀이 시간을 더 보장받는 것이었을 텐데 자신의 언어를 욕구와 연결하지 못했다. 밥을 먹기 전에 잠깐 더 놀겠다는 건 이루기 어려운 욕구가 아니다. 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 욕구 그 자체가 아닌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만 주장한 것은 듣는 사람의 오해를 일으켜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기 더 힘든 방향으로 상황을 전개시킨 셈이 되었다.

더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하는 말은 다 감정이며 욕구로서, 표현 방식은 다를지라도 그 안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담겨 있다. - 마셜 로젠버그, 「비폭력대화」, 북스타, 2016, 105면.

나는 NVC(Nonviolent Communication) 적 관점을 굉장히 지지한다. 모든 대화를 자신의 욕구와 연결할 때 그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위의 세 가지 상황에서 화자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면 어땠을까.

  • “지금 두 개의 프로젝트가 연달아 있는데, 앞선 프로젝트의 스펙을 명확하게 알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에 따라서 그다음에 진행될 프로젝트의 안전한 착수 일정을 추정할 수 있거든요. 기획서 다음 주에 마무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 “출근하다 빵을 샀는데 이게 좀 양이 많더라고요. 혼자 먹기는 부담스러운데 혹시 좀 드실래요?”
  • “지금 밥 먹긴 싫어요. 왜냐면 지금 하는 놀이가 너무 재밌거든요. 조금만 더 놀다가 먹고 싶어요.”


많은 경우에 이런 표현은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핵심은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에 욕구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 표현들이 부드럽게 들렸다면 그것은 아마도 험난한 추측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욕구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조금 무겁게 형성돼 있다. 쉽게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사람은 배려심이 없거나 미성숙한 사람으로 이해되곤 한다. 분명히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고 조화시키느냐에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구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경향이 아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욕구를 대화에 연결한다는 게 처음엔 어색하고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빙빙 돌려 말하기나 눈치 주기, ‘내 마음을 맞춰봐’ 같은 방식의 대화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 욕구를 상대방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더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언젠가 아이가 나와 막대 놀잇감을 나눠갖고 놀다가 문득 멈춰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지? 아빠도 막대를 많이 갖고 싶고 나도 막대를 많이 갖고 싶네. 흐음.. 어쩌면 좋지?” 아이는 “아빠 그거 나 줘!”하는 대신 자신의 욕구와 내 욕구가 조화될 수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막대는 중요하지 않았고, 아이는 나에게서 건네 받은 모든 막대를 양손에 쥐고 성취된 욕구를 환호하는 춤을 신나게 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