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세이] 모든 것은 이미, 이 순간 안에 있다. <보이후드>

in #kr9 years ago

-시작하기 전에-
아무리 봐도 제 글은 영화의 내용보단 그것을 보고난 후의 생각, 주장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영화 리뷰’가 아닌 ‘영화에세이’로 제목을 표현합니다!



(카페에서 100% 수작업으로 그린, 말도 안 되게 허접했던 스토리보드)

#01.
영화를 찍었던 적이 있다. 4년 전 이 맘 때쯤.
1주일 동안 촬영을 하고 한 달 넘게 편집을 해서 만든 40분짜리 영화.
지금 봐도 엉성하기 짝이 없고 부족한 부분만 보이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쓸데없는 그 짓을 다시 반복할 것 같은 소중한 기억이다.

대학교 소학회에서 친구들끼리 만든 영화라 교내에서 나름 상영회도 했었다.
‘영화계를 뒤집어버리겠다’ 같은 큰 의미는 없었다.

영화 한 번 찍어보는 게 재밌겠다 싶었고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재미있었고 뿌듯했다. 그럼 됐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에 연기를 했던 한 후배가 내게 해준 한마디가 있었고,
<보이후드>를 보는 내내 그 말이 떠올랐다.

‘제 인생을 영화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듣기엔 너무도 과분하고 예쁜 말이어서 아직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보이후드>라는 영화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의 인생이 영화라면 어떨까요?’


#02.
160분 동안 한 사람의 12년을 봤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마주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인생’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영화 속에는 인생이 들어있지만 이 영화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너무도 특이하고 신기했다.
6살 꼬마가 대학교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무려 12년을 촬영했고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몇 년의 세월이 한 컷에 변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 묘하다.
시간이 가진 웅장함과 함께 왠지 모를 무서움도 느껴진다.


#03.
타인의 인생을 보고 있자니 당연하게? 생각이 나에게 넘어온다.
내 인생은 어떤가.

좋은 기억들만 떠올리려 애썼지만, 늘 그렇듯 항상 현실이라는 물 한 방울이 떨어지니 색깔이 완전히 바뀐다.

나는 바쁘다.
특히, 마음이 바쁘다.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이 더 많고, 여유와 휴식을 잘못처럼 여기며, 초조함과 불안함, 다급함으로 꽉 차있다.

성장하기 위해 애쓰지만 방식이 맞는지도 모를뿐더러 불확실한 내일은 현재마저 제대로 느낄 수 없게 한다.

이런 상황 속 세월의 흐름을 그냥 보여주는 이 영화는 생각보다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주인공은 이런 인생을 살았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단지 그 순간을 곱씹으려 노력하기만 하라’고 말하는 듯 했다.

가타부타하며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라보고 믿어주겠다는 느낌.
진짜 위로란 그것이 전부임을 어렴풋이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은근하게 나를 위로했다.


#04.
모든 시간에는 기억이 들어있다.
마치 옛날 노래를 다시 들으면 그것을 맨 처음 들었던 순간의 느낌, 사건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만약 보이후드처럼 내 인생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기억해보는 순간이 있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더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운 행동들, 멍청한 생각과 결정에 소름이 돋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아 저 때의 나는 저랬었구나.’ 하고 웃을 것 같다.
‘그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어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아름답게 포장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문득, 굳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내 인생을 보며 ‘저러지 말 걸, 이랬어야 했는데’ 해야 하나 싶다.

그냥 '오늘을 미래의 내가 보고 있는 순간처럼 살아가면 될 것 같다' 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렵겠지만 노력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매 순간을 천천히 느껴보는 삶을 살도록 애써봐야겠다.

바꿀 수도 없고 계획한대로 흘러가지도 않는 인생이라면, 마주칠 모든 순간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살아가는 방법밖엔 없으니.


#05.
‘뒤돌아보니 나의 모든 순간 또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본 한 평론가의 평이다.

어쩌면 ‘영화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이 순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영화일지도 모른다.


Boyhood
드라마 / 미국 / 165분
2014 .10.23 개봉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Boyhood 속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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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링클레이터.. 시간의 감독! 비포 시리즈도 훌륭하죠! 보이후드도 봐야지봐야지 해놓고 못보고 있었는데 시간 내서 꼭 봐야겠네요

비포시리즈!! 정말 아름다운 영화인 것 같아요!!
역시 yidar님!!

글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주위에서 보이후드를 추천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저도 조만간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실제로 긴 시간동안 한 배우를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는 설정 자체가 신기했거든요 ㅎㅎ

주위에서 추천하시는 분들이 많다니 신기하네요! 몇 시간 안에 급변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묘합니다ㅎㅎ

내 인생이 영화라... 상상도 못해 본 관점이네요. 시나리오 쓴 사람이 누구죠? 좀 조패야겠어요. 러브라인이 너무 이상한데요?

아아ㅠㅠ 생각해보니 저도 러브라인은...

아 이게 그.. 12년간 촬영했다는 영화군요
나중에 시간나면 꼭 봐야겠네요

네 어마어마한 촬영기간으로 상당히 유명하죠ㅎㅎ 나중에 보시길 추천합니다!

저도 12년간 제작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참 경이로웠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인데, 이번 달에는 꼭 봐야겠습니다. 아 그런데, 더덕님이 만드신 영화도 참 궁금하네요 : )

말도 안 되는 저퀄리티의... 멜로? 성장? 영화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해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