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 이라는 경제 질서

in #kr5 years ago (edited)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국회 의사당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 질서는 오랜 시간 수많은 규칙이 추가 되고 제거 되어 가며 만들어졌습니다. 수많은 규칙들은 주로 법의 테두리 속에 만들어져 공권력을 통해 보호 되고 강제 되는 질서 입니다.

법이라는 규칙을 통해 강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속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질서가 있는데 이것은 전통 또는 관습이라는 형태로 법전 속에 문서화 돼있지는 않지만 모든 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관습은 법을 벗어나 있으며 많은 경우 시장을 왜곡 시키는 비정상적인 상황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은 상상 하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관공서도 매우 느리고 비효율적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시절에 서류처리를 가속화 하기 위해 담당 공무원에게 지불하던 특별요금(?)이 있었는데 이것을 급행료라고 불렀죠.

주로 법체계와 조직 질서가 자리 잡히지 않은 후진적인 사회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업무를 보는 공무원들은 공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금전적인 보수가 매우 낮은 환경에서 많은 업무량을 처리하다 보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런 지역에선 매우 당연하게 받아 들이며 공식적인 비용으로 잡히지는 않지만 엄연히 실존하는 비용이 됩니다.

각 지역마다 관습은 여러가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때로 차한잔을 대접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과일 상자 (문자 그대로 식품)를 줘야만 업무가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과일 상자에 두둑한 현금을 채워야만 하는 곳도 있죠.

이런 관습은 해당 지역에 새로 진입하여 사업을 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큰 장벽이 됩니다. 해당 지역에서도 계층마다 다른 관습들이 지배하고 있고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려는 이들은 이런 세세한 관습으로 지배 받는 질서를 숙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할 기회를 얻기 어려워 집니다.

결국 이러한 장벽들은 부의 세습을 보호하는 장치가 됩니다. 아버지나 선친으로부터 이러한 질서를 배울 기회가 있는 이들과 전혀 지식을 모르는 이들은 사업 진행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죠. 하루 이틀만에 형성된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질서들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새로운 참여자들을 배척하게 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집중된 비지니스가 의류 생산과 유통입니다. 이 곳에서도 법질서를 벗어난 많은 규칙들이 있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장사는 자리 라는 말이 있죠. 좋은 위치에 있는 상점을 확보하려는 경쟁은 어느 곳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경쟁이 과도하다 보면 이상한 관습이 만들어 지기도 하는데 이곳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도 약 30년전부터 쟈베(열쇠) 즉 키머니 라는 것이 만들어 집니다. 일반적인 계약에는 매달 월세 액수와 보증금과 기한을 정하고 계약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약서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는 엄청난 액수의 뒷돈을 제시하며 좋은 위치의 가게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하게 되죠.
가장 많은 액수의 키머니를 지불하는 사람이 계약을 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관습으로 인하여 계약에 표기 돼지도 않은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 액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좋은 위치의 가게를 얻는데 3년 월세 계약을 하게 되고 이에 대한 키머니가 30만불을 상회 하는 정도입니다. 최근 불경기 여파로 이 액수가 낮아 지긴 했지만 아직도 매우 고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키머니는 대부분 계약당일 일시불로 지불하는 형태 였지만 할부로 편의를 봐주는 형태가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정식 계약이 아니어서 임차인에게 차용증을 만들어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건물주와 어떤 형태로 합의 되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6개월 할부가 조건이었다면 차용증을 6개 만들어 매달 돈을 갚아가는 형태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악랄한 관습인가 하면 만약 3년을 계약으로 일반 월세계약을 할 경우 보증금과 월세만 내면 됩니다. 그리고 1년쯤 하다가 사업이 부진하여 망하면 계약 파기하고 1 ~ 2달 월세정도만 물어주면 됩니다. 하지만 키머니가 개입되면 가게 계약과 동시에 빌리 지도 않은 돈을 빌린 것처럼 하여 채무자가 되어버리죠.
1년만에 망해도 키머니는 채무로 남기 때문에 몇 십만불의 법적인 채무가 남게 됩니다.

이런 점을 악용하는 악덕 건물주가 있죠. 즉 위치 좋은 부동산을 계약하고 6개월 에서 1년 만에 쫓아 내고 다시 새로 계약하고 또 반복 하면 키머니를 두둑하게 챙 길수 있게 됩니다.
물론 쫓아 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월세를 받지 않거나 월세를 받고도 위조된 영수증을 발부하여 임대인을 상대로 조용히 소송을 제기 합니다. 주소를 살짝 다르게 하는 형태로 제대로 된 법원 서류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법원에 출두하여 해명할 기회도 없이 판결이 결정되면 퇴거 명령과 함께 쫓겨 나게 됩니다. 장사 하다가 갑자기 날벼락을 받게 되는 것이죠. 물론 키머니는 채무로 남아 있으니 이것도 갚아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악랄한 건물주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세입자는 합법적으로 자신이 싸인 해준 채무로 거액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꼭 이런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관습이 발생시킬 수 있는 수많은 일중 하나일 뿐이죠.

남미국가들의 특징 중 또 다른 한가지는 매우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관은 매우 까다롭고 관습의 영향이 가장 큰 곳 중에 한곳입니다.

세관에 형성된 관습적 질서는 여러가지 지연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이들 조직(?)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수입되는 제품도 이들 조직과 합의 되지 못한 상태에선 몇 달씩 묶여 있기도 하고 수입 제한 품목도 이들을 통하면 쉽게 통관 되기도 하죠.

이렇게 관습이라는 것은 법이라는 질서를 뛰어넘어 삶 속에 매우 큰 축을 차지 합니다.
법이 우리 삶의 많은 것을 해결해 주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소한 일부터 중요한 일들까지 관습의 영향 속에 있는 것이죠.

이곳 현지인 들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관습적 규칙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들을 “땅에 대한 권리”(Derecho de piso) 라는 문장으로 표현 합니다. 즉 내가 서있을 땅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비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이죠.

어떤 곳에 서있더라도 그곳에 서있을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지불 해야 한다는 것이죠. 많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어떤 사회도 이런 식의 관습적 비용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르헨티나에서 비지니스를 하며 초기에 이러한 문제로 매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문제들과 투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습적 질서를 얼마나 빨리 터득하느냐가 바로 그곳 사회에서 얼마나 빨리 적응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신규 사업자들이 아무리 좋은 제품과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지고 뛰어 들어도 이러한 관습적 질서는 매우 높은 장벽을 만들어 기존 사업자들을 보호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비즈니스의 발생으로 관습적 경제 질서의 역할이 매우 축소되며 기존 사업자들을 보호해주던 장벽도 사라졌습니다.

비대면 방식의 비즈니스 발달로 관습적 질서의 역할은 줄어들고 디지털 세계의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세계로 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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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잘보고 있습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