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 그리고 <아이덴티티>

in #multiple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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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 포스터

다음 내용은 제가 학지사에 근무하던 시절에 발간될 예정 중이었던 사보에 게재하려고 쓴 것입니다(사보는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아이덴티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스킵해 주세요.


다중인격 장애 혹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고, 매스컴이나 미디어에서도 자주 다루어져 왔습니다.

한 사람이 순간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듯이 각기 다른 특성과 기억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정체성마저 바뀐다는 다중인격 장애의 증상은 접신 상태의 무당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18~19세기까지도 다중인격 장애는 빙의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영적 현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현재에도 일부 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적 진단의 표준으로 활용되고 있는 미국정신의학회(APA)의 『DSM-IV(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4판)』의 진단 기준에 따르면 다중인격 장애(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다음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A. 둘 이상의 각기 구별되는 정체감이나 인격 상태가 존재한다(각각의 정체감은 환경과 자기에 대해 독자적으로 지각하고 관계하며 사고하는, 비교적 지속적인 패턴을 갖고 있다).
B. 적어도 둘 이상의 정체감이나 인격 상태가 반복적으로 개인의 행동을 통제한다.
C. 중요한 개인적 정보를 회상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 광범위하게 나타나서 일시적인 망각으로 설명될 수 없다.
D. 장해는 물질(예: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의 일시적인 의식상실이나 무질서한 행동)이나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예: 복합성 부분 간질)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로 인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DSM-III까지는 다중인격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DSM-IV 이후부터는 ‘다중인격 장애’라는 용어의 사용을 지양하고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로 대체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중인격’이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신비주의적 뉘앙스를 제거하고, 한편으로는 환자가 복수의 인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 하나의 인격에 포함된 복합적인 측면이 표출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중인격’ 또는 ‘다중인격 장애’라는 용어로 표기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용어에 대한 반론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다중인격 장애 외에도 해리성 기억상실, 해리성 둔주, 이인성 장애 등을 포괄하는 ‘해리성 장애’는 의식, 기억, 정체감, 환경에 대한 지각에서 붕괴(해리)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 정신의학이 해리성 장애를 (빙의와 같은 영적 현상이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문제로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 밖의 여러 문헌에 따르면, 다중인격 장애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다중인격 장애 환자 중 상당수는 소아기에 심각한 신체적,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3~9배 정도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환자 중 대다수가 최면에 민감하며 피암시성이 강한 특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상당수는 대단히 감성적인 면을 갖고 있다.
  • 다중인격 장애 환자들의 부모 역시 해리 관련 증상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러한 부모 슬하에서 성장한 자녀의 증상은 잠복되어 있다가 성장하여 자신의 가정을 갖게 된 후에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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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얼굴>

이와 같은 다중인격 장애의 특성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는 두 편의 영화, 즉 <이브의 세 얼굴(The Three Faces of Eve)>과 <악몽(Sybil)>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두 작품은 다수의 정신의학 및 심리학 문헌에서 다중인격 장애를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외상으로 인해 해리 증상을 갖게 된 여성 환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힌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Psycho)>에 등장하는 노먼 베이츠는 이 두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입니다. 노먼 베이츠는 <이브의 세 얼굴> <악몽>의 주인공처럼 히스테리적인 증상을 보이며 자신과 가족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는 데 불과한 ‘가여운 희생양’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파멸시키거나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악마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히치콕 감독은 <싸이코> 외에도 정신질환자를 묘사한 영화를 여러 편 남겼지만 다수의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들에게 ‘정신질환자가 위험하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영속화’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의학 및 심리학 문헌에서 기술하고 있는 다중인격 장애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벗어난 환자도 다수 보고되고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실존 인물인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입니다.

1977년, 빌리 밀리건이라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대학가에서 연쇄 성폭행, 납치 등을 저지른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범행의 증거가 확실한데도 자신이 그런 죄를 저지른 사실을 도무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청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백을 받아 내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 젊은이는 빌리 말고도 무려 스물세 가지 인격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아버지를 미워하는 에이프릴, 육체파 행동주의자 레이건, 마약에 찌든 절도범 케빈, 영국 신사 아서, 사기꾼 앨런, 애정에 굶주린 레즈비언 에이들라나, 3세의 영국 소녀 크리스틴, 예술가 타미, 뉴욕 출신의 폭력배 필립 등의 인격이 순간순간 나타나고 핵심 인격인 빌리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말하는 억양과 성격, 행동 특성 및 재능, 필체까지 모두 달리했던 이들 중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는 애정결핍 레즈비언 에이들라나였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빌리는 미국에서 다중인격 장애로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환자이고, 그의 이야기는 책으로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법정에 제출된 조지 하딩 박사의 진술서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환자 본인의 말에 의하면 …… 계부인 밀리건 씨로부터 항문성교를 포함한 가학적인 성적 학대를 당했다. 환자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환자가 8~9세경이었을 때, 1년여에 걸쳐 주로 계부와 단둘이 농장에 있을 때 이런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환자는 항상 계부에게서 ‘마구간에 묻어 버리고 엄마에겐 도망갔다고 하겠다’는 협박을 받아서 살해당할까 봐 두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빌리 밀리건 사례의 영화화는 2000년대 이후로 계속 추진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다중인격 사례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핵심 인격을 포함해서 모두 스물네 개의 너무도 많은 인격을 가진 복잡한 사례여서인지 그동안 제작이 계속 지연되어 왔습니다. 많은 영화 팬들이 이 영화가 만들어지길 기다리고 있지만 현실적인 난점이 산적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아이덴티티>는 빌리 밀리건 사례를 그대로 영화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얻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빌리 밀리건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드문 남성 다중인격 환자가 과거의 외상을 내면에 가둔 ‘희생양’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외상으로 인한 분노를 반사회적 행위로 표출함으로써 ‘가해자’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는 어두침침한 사무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정신과 의사인 맬릭 박사가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대와 방임 속에서 성장한 연쇄살인범 말콤 리버스와의 인터뷰 녹음 내용을 듣습니다. 사형집행을 하루 남겨 둔 시점에서 맬릭은 말콤의 범죄는 정신이상으로 인한 것이므로 무죄로 판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판사를 찾아갑니다.

연쇄살인범이 본래의 인격 외에도 여러 개의 다른 인격을 갖고 있으며 그중 하나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맬릭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 판사는 여전히 완고한 입장을 취합니다. 이때 맬릭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다중인격 환자를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인격(들)을 모두 인식하게 하고, 그 인격(들)을 하나둘 제거하면서 통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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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게 지나치게 공감하는' 정신과 의사 맬릭

판사와 맬릭이 말콤 리버스에 대한 처벌 여부를 논의할 때 장면이 바뀌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 영화 제작사와 갈등을 빚고 있는 속물 여배우와 그녀의 운전수인 전직 경찰 에드가 탄 차량이 실수로 한 중년 여성을 치게 됩니다. 사고를 당한 여성은 남편, 아들과 함께 여행 중이었습니다. 사고를 덮어 버리고 도망치자는 여배우를 모텔에 남겨 둔 채 에드는 사고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신혼여행 중인 지니, 로우 부부와 새 출발을 위한 여정 중인 매춘부 파리스를 만나고 그들에게 도움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폭우가 심하고 전화도 되지 않아 병원으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함께 다시 모텔로 들어가 응급처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전직 경찰인 에드와 달리 ‘현직’ 경찰인 로디스와 그가 호송 중인 죄수가 모텔로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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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이 영화는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인물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히고, 범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또는 그중 어느 누구든 범인일 수 있는 상태로) 한 명씩 한 명씩 잔혹하게 살해되는 전형적인 연쇄살인 스릴러가 됩니다.

여배우는 목이 잘리고, 신혼부부 중 남편 로우는 복부를 난자당합니다. 이와 같이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범인이 건장한 남성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죄수가 도망치지만 그 역시 시체로 발견됩니다. 남은 생존자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모든 시체에서 1부터 9까지의 숫자 중 하나가 새겨진 방 열쇠가 발견되었다는 것과 모텔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성이 모두 미국의 지명과 같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제와 관련된 각 등장인물의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둘씩 밝혀집니다. 사고를 당한 부부의 아이는 실제로는 입양아였고, 전직 경찰 에드는 누군가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퇴직한 것이었습니다. 지니와 로우 부부는 ‘원치 않은 임신’ 때문에 결혼하게 되었고, 현직 경찰 로디스 역시 실제로는 호송 중이던 경찰을 살해한 후 경찰로 위장한 범죄자였습니다. 모텔 주인조차도 사실은 이곳저곳을 떠돌던 부랑자일 뿐이었습니다.

살해 방법으로 볼 때 여전히 여성 생존자들에게 혐의를 두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지니와 모텔 주인이 살해당하고, 사고를 당한 부부 역시 모두 죽게 됩니다. 특히 이 부부의 죽음은 관객으로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였던 아내는 자연사인 것으로 보이는데도 연쇄살인의 희생양임을 의미하는 방 열쇠가 시신 옆에서 발견되었고, 그녀의 남편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자동차에 치어 죽었지만 어쨌든 의도적인 살인을 당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는데도 주머니에서 방 열쇠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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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범인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뿐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사고에 의한 죽음까지도 계획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일까, 그리고 미국 지명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10명씩이나 한 장소에 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관객은 범죄 스릴러 영화로서 구성이 허술하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죠.

영화의 장면은 다시 판사와 맬릭의 설전으로 전환됩니다. 맬릭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휠체어에 묶여 있는 말콤 리버스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말콤이 나타내는 다양한 인격의 극적 전환을 목격하고서야 판사는 맬릭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관객 역시 모텔에서의 연쇄살인은 실제가 아니라 말콤의 내면에서 일어난(또는 구성된) 사건임을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영화의 장면은 잠시 동안 모텔에서 전개되는 연쇄살인극으로 바뀝니다. 건장한 남성이자 ‘유이’한 용의자가 된 전현직 경찰 에드와 로디스는 서로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남아 있는 말콤의 복수 인격 중 두 사람이 사라집니다.

현실에서는 결국 정신이상이 인정되어 사형은 취소되고 말콤은 맬릭과 함께 호송됩니다. 그리고 말콤의 내면에 생존해 있는 파리스는 그동안 모아 둔 돈으로 구입한 농장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기약합니다. 그런데 모텔 연쇄살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파리스 외에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입양된 남자아이는 어디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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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부 따위에게 새로운 인생은 없어."

아이는 농장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파리스 앞에 나타나 마지막 과업을 완수합니다. “매춘부 따위에게 새로운 인생은 없어.”라고 내뱉으면서. 내면 속의 아이가 파리스를 ‘제거’하는 동안 현실에서는 말콤이 맬릭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모텔에서(혹은 말콤의 내면에서) 일어난 모든 살인사건의 범인이 바로 아이임을 관객에게 설명하는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말콤 리버스의 생모가 매춘부였다는 것, 그리고 내면 속 아이의 부모가 양부모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말콤 리버스와 그 내면의 아이는 역설적으로는 이 마지막 살인을 통해 (맬릭이 말했던) ‘복수 인격의 통합을 통한 치료’에 성공한 셈입니다.

<아이덴티티>는 다중인격 장애에 관한 영화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서 정신의학 및 심리학 문헌에서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해당 장애에 관한 오해와 편견을 초래할 수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히치콕의 <사이코>처럼 극적 반전을 위해 특정 정신질환을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환자를 살인마로 묘사함으로써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일반인들의 왜곡된 상식을 영속화하고 환자를 영구적 격리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전쯤에 처음 봤던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본 후에 든 생각은 이 영화가 다중인격 장애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말콤 리버스의 장애도 부모(이 영화에선 생모)의 학대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다중인격 장애 환자들은 말콤처럼 극단적인 반사회성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빌리 밀리건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환자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중인격 장애 환자의 부모 역시 다중인격 또는 그 밖의 해리성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학대가 또 다른 학대를 낳고,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를 그들의 2세까지도 이어받는 셈입니다. 실존인물인 빌리 밀리건과 영화 속의 말콤 리버스는 어떤 면에서는 내면의 외상으로 인한 분노를 자녀 대신 혈연관계가 없는 타인에게 표출함으로써 학대의 악순환을 끊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이 담당한 환자에 대한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정신과 의사 맬릭이 끝내 살해당하는 것은 다중인격 장애 치료 시에 실제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 '치료자의 지나친 공감과 감정이입'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정신질환의 이해에 있어 <아이덴티티>와 같은 영화는 단순히 참고자료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이 두려움보다는 공감과 이해의 대상이 되길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이들이 반드시 사회에 무해한 ‘가엾은 희생양’으로 머물러야 할까요? 어떠한 정신질환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도, 그 질환을 가진 환자를 정형화하는 것도, 그런 정의나 정형화에서 벗어난 환자를 예외로 치부하는 것도 우리의 집단적 이기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학대뿐만 아니라 현재에 품고 있는 분노마저 외면하기 위해서 말이죠.


참고자료

다중인격 장애의 진단기준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1995).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4판(이근후 외 공역). 서울: 하나의학사.

다중인격 장애의 전형적 특성, 다중인격 장애라는 용어에 대한 이견
McWilliams, N. (2008). 정신분석적 진단: 성격 구조의 이해(정남운, 이기련 공역). 서울: 학지사.

영화 <싸이코> <이브의 세 얼굴> <악몽>에 대한 정신의학계 및 심리학계의 평가
Wedding, D., Boyd, M. A., & Niemiec, R. M. (2012). 영화와 심리학: 필름에 그려진 인간의 심연. 서울: 학지사.

빌리 밀리건 사례
Keyes, D. (2007). 빌리 밀리건(박현주 역). 서울: 황금부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