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0 기록] 기록하라! 후손을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블록체인이 있지 않은가

in #sct4 years ago (edited)

연어입니다.


상해로 파견 나가기 전이다.

친가 친척을 거들떠 보기 싫었던 나 때문에 언제부턴가 집안 제사는 종손인 우리 가족만 조용히 지냈다. 헌데 어느 제사 때 부르지도 않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기어이 집으로 찾아왔다.

나이는 아버지와 비슷하나 항렬상 할아버지인 분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던 친척 중 한 명이었고 자신의 것이 아닌 집안 재산을 어떻게든 털어 먹으려 평생을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런 분이 부모님께 알듯말듯한 한 마디를 남겼다.

집안 땅 하나가 공탁이 걸려있네.

후두암 말기였던 할아버지는 이 말 한 마디 남기고는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셨다. 이 얘기가 무슨 의미였는지, 왜 굳이 이런 얘기를 집에까지 찾아와 남기고 갔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늘 글은 그 과정을 찾아가던 나의 여정이다.


■ 고조부(高祖父) 이야기

한 번은 방 정리를 하던 아버지께서 고조 할아버지의 유품을 보여주신 적이 있다. 학자였던 고조부는 늘 글을 쓰고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명필로 적어내린 한자 그득한 책을 보긴 했지만 나는 까막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집안과 자손을 위해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1백 여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은 늘 글을 쓰고 사려 깊었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평판, 일정 시대부터 기록된 토지 장부, 집안 족보, 그리고 전산화 된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뒤적일 수 있었던 현 시대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덕분에 고조부를 생전 뵌 적조차 없던 나는 마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기록을 통해 고조부의 고민과 결단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증조부(曾祖父), 즉 고조부의 맏아들이었던 분은 희대의 난봉꾼이었다. 씨족 마을의 종가집 맏아들로 태어나 준수한 외모, 학식, 넉넉한 재산을 배경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오렌지족 쯤 되는 생활을 누렸다.

증조부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역시 토지대장의 거래 내역과 건물 등기 등을 살펴보면 죄다 추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온갖 여자를 거느렸고 그분들에게 집과 살 땅을 마련해 주느나 재산을 뿌리고 다니기 바빴다. 나의 고조부는 세상이 내것인 것처럼 철없이 살아가던 큰아들을 보며 가문의 미래를 심히 걱정했던 것이 틀림 없다.

그런 고조부가 이윽고 결단을 내린다. 산과 밭 등 재산 중 적지 않은 부분을 툭 잘라내어 나이 어린 사촌 동생에게 증여를 해버린다. 그리고 유훈을 남긴다.

이 땅을 네게 주지만 네 것은 아니다. 집안 대대로 물려 받으며 지키되 적당한 시점이 되거든 반드시 되돌려 주도록 하라.

아들인 증조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 주었다가는 종가의 재산이 풍비박살이 날 것이라 예감했던 고조부는 그렇게 재산을 증조부를 우회하여 전해지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제 그 재산의 열쇠는 이를 넘겨받은 집안의 양심에 달린 셈이다.


■ 협잡꾼 할아버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집안마다 꼭 이런 사람이 한 명 씩은 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땅이나 재산을 탐하고, 늘 그런 정보를 귀동냥 하고 다니며, 마을 이장이나 시청 공무원들과 친하게 지내며 행정 부문까지 지원받아가는 사람.

앞에서 얘기한 뜬금없이 제사 때 나타나 한 마디 남기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런 분이었다. 난 그 분을 늘 협잡꾼이라 불렀다.

이 분은 만주에서 태어나셨다. 마을에서 불륜 비스므리한 일을 저지른 집안 어르신 한 분이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다시피 한 곳이 만주였다. 그곳에서 일본인으로 오해를 받아 총탄에 맞고 운명하였다. 여자는 간난 아이를 업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며 여자와 간난 아기에게 욕을 해댔다. 그 때 간난 아기를 받아준 분이 바로 당시 청년이었던 나의 친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돌아가셨다는 분을 추모하며 그래도 내 동생이라고 추운 겨울 모포자락에 안겨있던 간난 아기를 받아주신 것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맡기고는 떠났고, 아이는 아버지 본부인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남편을 뺏은 여자가 남편과 남긴 자식. 그런 자식을 정성스레 키우기나 했을까 싶다.

간난 아기는 어른으로 자랐지만 똑똑한 머리를 비뚤게 쓰기 시작했다. 자신도 가문의 핏줄임을 인정받고 싶어했을까? 늘 행정가나 정치인을 가까이 했고, 이를 뒷배경으로 집안 재산을 파헤쳐가기 시작했다. 모두 자신의 것은 아니었기에 방법은 이간질이나 선동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집안 재산을 빼먹어가기 시작했고, 여기에 가장 많이 당한 분이 친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의 아버지였다. 어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처럼 아버지가 군복무 시절 인감 도장을 맡고 있던 작은 할아버지와 친척들이 대거에 재산을 팔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을 찾아보며 모두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사욕에 눈이 먼 친척들

나의 친할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아마도 증조부께서 마음껏 인생을 즐길 수 있었던 데에는 듬직한 장손 하나 잘 낳았다는 자부심이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할아버지가 요절하셨다. 일전에 글을 남긴 적이 있지만 할아버지는 여순 사건의 최대 피해자였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지자 많은 것들이 엉망이 되어갔다. 집안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사이 탐욕에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협잡꾼 할아버지가 온갖 가이드를 한다. 미친 듯이 집안 재산을 팔아재끼기 시작한다.

그러다 멈춘다. 몰래 팔아먹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팔아 먹으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들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왜 팔 수 없었는지를. 그리고는 그 내막을 감춘다. 교묘히 포장한다. 그리고 떠벌린다.

역시 그 최대 피해자는 나이 어린 아버지였다. 종손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읜 집안의 아들로. 앞으로는 제사를 비롯해 장손으로서의 모든 짐을 지우고. 뒤로는 헤쳐먹고 감추고.

오롯이 아버지 재산으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인이 물려받은 재산이 있다고 평생 믿고 계셨다. 왜냐하면 모든 친척들이 그렇게 얘기해 줬으니까. 이 산도 자네 것이네. 이 집도 자네 것이네. 이 밭과 논도 자네 것이네.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니 아버지는 그리 믿고 계셨다. 젊은 아버지는 그렇게 서울로 상경하셨던 것이다.


■ 백년 만에 돌아온 재산

어느날 친척 한 분에게서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병원에 있어 찾아가기가 어렵네. 번거롭겠지만 병원으로 찾아와 줄 수 있겠나.

일전에 고조부에게서 재산을 증여받았다는 어린 사촌 동생의 후손이다. 아버지보다 연배가 높은 그 분이 노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는 어르신들에게서 들은 바가 있어 이 분이 고조부에게서 넘겨받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오래전 전해 내려오는 얘기일 뿐 그 재산을 돌려달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런 그분이 만나자고 연락을 준 것이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제 어르신들에게 들은 얘기대로 자네 집안 재산을 돌려줄 때가 된 것 같네. 미안한 것은 나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있었는지 내 소유로 되어 있는 재산을 굳이 돌려줘야 하는지 갈등이 많았었네. 그런데 이리 몸이 아프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니 그런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구려. 이제 조상님들의 유훈대로 할 때가 되었나 보오.

재산의 1/4 정도는 웃대 어느 분이 토지 보상으로 챙겨가긴 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토지가 그대로 넘겨지게 되었다. 재산을 넘겨주려는 분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었고, 그분의 조언대로 서둘러 증여 처리를 마무리 하게 되었다. 증여가 끝난 후 몇일이 지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고조부에게서 증여된 재산이 백여년이 지나 다시 증여로서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난봉꾼인 증조할아버지를 피해서, 요절한 할아버지를 건너 뛰어서, 집안 재산을 팔아 해치우던 철없는 후손들의 손길을 피해서.

난 이 모든 역사를 집에서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수십장에 가까운 토지 기록과 등기부등본, 족보를 모두 뒤져가면서 말이다. 사려 깊었던 고조부의 결단은 성공한 것이었다.


■ 공탁 걸린 것이 무엇이길래?

상해로 갈 준비 중이었던 내게 아버지께서 물어보셨다. 저번에 (협잡꾼 할아버지가) 해주고 간 얘기가 무슨 얘기 같니? 글쎄요. 그분 살아온 인생으로 봐서는 뭔가 해먹지 못해 억울한게 있었나보죠. 한 번 찾아 볼까요?

나는 인터넷에서 시청 공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문 하나를 찾게 되었다.

20XX년 엑스포 준비를 위한 도로 확장 과정에서 아무개 명의의 토지를 침범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유자의 연락처를 확인할 수 없음. 보상금 XXX를 XXX까지 공탁 예정이니 관련자들이 찾아가길 바람.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중에 추적해 알게 된 일이지만 엑스포 준비 과정에서 집안 재산 일부가 보상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협잡꾼 할아버지가 또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미 후두암 진행 상황인데도 말이다. 죽기 전까지 처자식에게 집안 재산을 빼돌려 물려 주려는 강인한 욕망은 실로 암의 고통마저 버틸 수 있게 하는가 보다.

그런데 한계에 부딪혔다.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이다. 예전엔 공무원과 동네 사람들 몇 명 구워 삶으면 되던 일이 모든 것이 자료화 되고 공개된 현대에 와서는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타인의 재산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 할아버지가 들쑤시고 다니는 과정에서 큰 토지 하나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원래 자기가 먹고 싶었겠지. 그러나 그리 되지는 않고, 괜히 공론화 되는 바람에 공탁이 걸리며 공문까지 뜬 것이었다. 협잡꾼 할아버지는 이것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차라리 아무도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얘기를 흘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는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세상을 뜨는 날까지 그 분 다운 행동이었다.

나는 집안의 역사를 상세히 알지는 못했다. 고조부가 무엇을 하신 분인지, 증조부가 무엇을 하신 분인지도 헷갈렸다. 워낙 스토리가 많이 얽혀있고 사실상 서울쪽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시골 집안의 일과 얽기설기 모여있는 서울쪽 일가 친척들의 스토리들이 선뜻 기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저 네트워크로 연결된 PC 한 대와 프린트 한 대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하였다. 공문을 찾고, 민원24를 통해 토지를 확인해 나가고, 프린트 하고, 아버지의 고향 마을을 지도로 검색하고, 각 토지들을 지번별로 모두 쪼개어 역사를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협잡꾼 할아버지가 자랑스레 만들어둔 족보를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족보, 토지대장, 등기부등본, 건축 대장 등등 내가 찾고 모을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하나씩 내용을 살펴나갔다.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토리가 엮이기 시작했다. 간간히 들었언 이야기들의 진짜 내막을 구성해 낼 수 있었다. 나는 100여년 간 나의 친가가 어떤 사연으로 얽히고 설혔는지 대하드라마를 보듯이 한 편 한 편 그려낼 수 있었다. 틈틈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종가집 장손으로서 나의 뿌리와 역사를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이 스토리에는 심지어 아버지도 그 어떤 친척도 모르는 내용이 있었다.

고조부가 벌인 일, 증조부가 벌인 일, 증조부가 계실 때 마을 어르신들이 벌인 일, 요절한 할아버지 앞에서 하이에나들이 벌인 일. 재산의 거래 장부는 실로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전해주었다.

고조부의 고심, 증조부의 후회, 할아버지의 억울함, 아버지의 설움. 그 모든 것을 접하며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내가 손에 쥔 것은 그저 수십 장의 프린트 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조상들이 내게 사연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기록의 힘이었다.


■ 친척들과의 절교

나는 대한민국 민법이 유산을 어떻게 정리하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년도별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고조부 때의 법, 증조부 때의 법이 다르다. 예를 들어 딸에게는 재산을 넘겨주지 않을 때가 있었다. 출가 외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법은 계속 바뀐다. 집안 장손에게만 재산을 넘겨주는 때가 있었고, 모든 자식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나눠주는 때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의 분할을 파악해 현재 본인과 가족, 그리고 일가 친척들이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갖게 되는지 확인해야 했다. 문제의 공탁된 재산은 증조부때의 재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바뀌어 아버지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합의를 보고 처리를 해야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핏줄의 한 명이 사망하면 후손 모두가 합의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아래로 갈수록 합의가 어려워진다. 어디에 사는지 불분명하거나 연락이 끊기거나 동조를 안해주거나 등등. 다행히 나이 많으신 분이 생존해 계신다. 그러니 지금 빠른 시간 내에 합의를 보지 못하면 그 재산은 공탁 기간을 다하며 국가에 귀속되게 된다.

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장손이었다. 게다가 일가 친척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하이에나들이 드글거렸지만 어머니와 나는 중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맞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탐욕이 멈추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는 상황을 정리하고 시나리오를 짰다. 최선의 합의를 이루기 위한 내용을 가다듬었다. 동시에 나는 이 기회를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회로 삼고자 했다. 서로 등을 돌리고 사는 일가 친척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유일 한 기회. 나는 그 기회를 위해 이번 해프닝이 생겼다고 의미를 두었다.

증조부 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일들이 증조부 명의의 토지를 후손들이 합의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욕심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랬다. 협잡꾼 할아버지가 어떻게 친척들을 이간질 시켜왔는지, 어떻게 하다가 토지가 공개되고 공탁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집안의 의미를 되찾고 원만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지. 제안했다. 그리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나 개인적으론 단 한 평의 땅이라도, 단 10원이라도 종가집 장손으로서 고생하셨던 아버지에게 '유산'이란 것을 찾아드리고 싶었다. 앞서 돌려받았다는 고조부의 재산은 '증여'였다. 엄밀히 말하며 후손으로서 당연히 얻게 되는 상속의 권리가 아닌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누리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유산'이란 것을 처음 물려드리기 위해 이번 합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부가적으로 찾게된 땅들이 있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던 것이었고 내가 찾아낸 것이었다. 일평생 땅을 찾아 헤매었지만 협잡꾼 할아버지마저 어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이리도 무서운 것이다. 나는 아버지 고향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도 없고, 마을 이장도 모르고, 시청 공무원도 모르고, 구워 삶을 동네 사람들도 모르지만.. 세상이 바뀐 탓에 그 협잡꾼 할아버지 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찾은 땅까지 이야기 해주었다. 이번에 원만히 합의하면 그 합의를 바탕으로 새로 찾게 되는 재산들까지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고.

그런데. 그들이 거부했다. 거부는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유다. 돌아가신 협잡꾼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 차마 못 그러겠다고 한다. 모두가 미쳤다. 미쳤거나 아둔한 것이다. 난 더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 집안은 이것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여기에 관해 난 냉정했다.

이것은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아버지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친가 친척과 관련한 모든 인연을 끊자고 건의했던 나의 의견을 다시금 드리게 된 사건이었다. 모두가 미쳤습니다 아버지. 이런 친척들과 단 하루라도 인연을 맺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삽시다.


■ 후련함. 그리고 아쉬움

짧았던 그 시간을 통해 아버지와 나의 핏줄에 흐르는 집안 역사의 풀지 못했던 퍼즐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아버지 뿐만 아니라 나의 카타르시스이기도 했다. 지방 법원을 오가는 사이에 아버지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청년이었던 아버지가 풀고자 했으나 정보 부족으로 인해, 지원 부족으로 인해 포기했던 것을 아들이었던 내가 수십년이 지나 풀어낸 것이었다. 아버지가 고마워했다.

재산을 찾고 안 찾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나는 가문의 역사를 찾고 해석해 냈다는 것으로 많은 것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친가는 현대사의 비극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나는 내 친가의 역사를 되짚어 가며 한국사를 다시금 읽어내려간 셈이었다.

일말의 아쉬움이 있다면, 끝끝내 아버지에게 조상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찾아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 한 평이라도 토지를 '증여'가 아닌 '상속'으로 받았다면 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서 최소한의 대접은 받는 셈이었는데. 여기까지였다. 나의 노력은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해야했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이라면 그 재산들이 공탁으로, 그리고 이후 발견될 재산들마저 줄줄이 공탁을 거쳐 국가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게 왜 아쉬웠냐고? 나라에 귀속되는 건 억울하지 않은데.. 그 때의 정부가 내가 싫어하던 박 모씨의 정부였다. 그건 좀 꺼림직했다. 그냥 그랬다.

그런 마음으로 난 상해행 비행기를 탔다.


■ 기록하라. 우리에겐 블록체인이 있지 않은가?

백년 전 고조부는 고민했다. 과연 집안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이 무엇일까? 글쎄. 그 분이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록이 똑똑히 말해준다. 분명 그 분은 그렇게 실천했다.

그리고 믿어야 할지 말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그 얘기가 실제로 돌고돌아 이루어졌다. 나는 그 모든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했다.

기록은 힘은 엄청나다. 기록은 언젠가 재구성 된다. 조상들의 기록이, 관청의 기록이, 자료화 된 기록, 공개된 기록이... 모이고 모여 역사로 재구성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남기는 이 기록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구성될지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겨라. 남겨야 한다.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그 기록을 헛되이 쓸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기록의 중요성을 알고 더 크게 활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록은 그 현명한 사람을 통해 더 크게 쓰일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기록하고 남기는 일이다.

이제 블록체인도 있다. 블록체인이야 말로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우리가 스팀잇에 모이게 된 것도 허튼 이유는 아니다.

기록하자. 구구절절 길고긴 글을 굳이 쓴 이유도 그러하다. 굳이 개인사를 들춰내면서까지 얘기하고픈 것도 그러하다.

기록하라. 우리에겐 불록체인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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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듯 하네요 ~ 핏줄끼리 생기는 문제는 정말 풀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 명문장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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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못 찾은 것이 아쉽네요;;
집안 재산분할 문제는 어려운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