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리포트 춘자 _ 03 사라지지 않는다

in #stimcity4 years ago


"나 아무래도 유체이탈을 한 것 같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에 가족들은 질색을 하며 한마디씩 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꺼내지도 말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으나 내심 풀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인다면 겪은 일을 소상히 들려주고 싶었다. 나에게 이 경험은 오랜 시간 수행(?)을 통해 이룬 쾌거였으니까.


줄곧 생각했다. 죽음 이후에도 삶에서 가졌던 생각과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텐데. 가끔 필요 이상으로 내가 낳은 그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겼다. 슬픔도, 분노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조차도 내 것이었기에 품고 아꼈다. 그런데 죽음 후에 감정과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사라지는가? 없었던 것이 되는가? 삶은 나날이 활활 타오르며 내게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나는 생각과 감정이라는 자취들의 총체로 존재했다. 그것들은 때로는 뛰는 심장보다, 뜨거운 피보다 더 확실한 존재의 증거였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다. 아니, 사라지지 않아야 했다.

다른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이것저것 기웃거려 보았으나 세상이 생긴 모양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에게 믿음은 이미 충분했다. 알고 싶은 것은 신념을 넘어서는 실체였으나 알고자 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지만,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이들의 자신만만한 표정에는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고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초연한 표정은 더 싫었다. 위대한 인간들이 늘어놓은 이야기들도 결국 참고 자료일 뿐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방법으로 스스로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주의 근원, 죽음 이후의 세계, 물질과 정신, 상승하고 확장하는 차원, 그리고 시간, 시간.

삶과 죽음을 생각하려면 시간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먼저 시간의 모양을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과 끝이 없는 긴 실처럼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씨실과 날실이 드나들며 이룬 직물처럼 수많은 시간이 엮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포개진 문서 더미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간 날카로운 핀처럼 중첩된 모든 시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를 생각하다가. 그러다 최근에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착각이라는 어느 학자의 말에 최종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100%는 아니지만. 나의 믿음은 점점 힘을 얻어 갔다.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존재 그리고 사랑은 영원하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를 증명하고 싶었지만, 죽어 보지 않고는 죽음 이후를 증명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기술과 과학의 진보는 지구로부터 몇백억 킬로미터나 떨어진 태양계 너머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게 만들었지만, 인류는 여전히 죽음 이후의 세계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당장 집 밖을 나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언제나 죽음 가까이에 살면서도 말이다. 다행히도 열심히 구한 덕분에 내 믿음을 뒷받침해 줄 결정적인 경험을 몇 차례 했다. 죽은 자들이 나를 대신하여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온 것이다. 첫 번째 죽은 자는 나의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소식을 듣고 황급히 서울로 돌아왔지만,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장을 치르고 온 날 밤, 할머니는 내 꿈에 나타나 자신이 쓰러졌던 지하철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설 연휴가 지나고 다니던 병원으로 약을 받으러 가는 길에 지하철역 출구 계단에서 쓰러졌다. 꿈속의 나는 그 장면을 보고 흐느끼며 할머니를 부르고 또 불렀다. 호흡을 멈추기 전까지 그녀의 마지막 의식은 간절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얼마나 꿈속에서 울었던 걸까. 눈을 감은 채로 의식이 깨어났을 때, 귓가에 할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 뒤에도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따위의 메타포가 아니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죽은 존재들,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