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리포트 춘자 _ 06 기브 앤 테이크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내가 속한 세계를 다시 확인해야 했던 그 황홀했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오후, 건물 주인 타비따에게 전화가 왔다.


"교회에 가져가서 사람들 나누어 주려고 하는데 바나나 머핀 열 개만 구워줄래? 내일 아침 일찍 찾으러 갈게."


라다크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낮에는 대체로 정전 상태였고, 여섯 시 넘어 동네 한복판에 자리 잡은 화력 발전소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그제야 전기가 들어왔다. 갑자기 정전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봉긋하게 솟아오르다가 푹 꺼져버린 머핀을 처리하느라 고역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머핀은 언제나 저녁에 구워두는 편이었다.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이 간밤의 해프닝에 대해 우주니 에너지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는 사이 나는 부엌에서 머핀을 구웠고, 예쁘게 구워진 머핀 열 개를 상자에 담아 카운터 위에 올려 두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늦은 밤이었다. 조용하고 평온한 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던 친구가 하얗게 질린 채로 "왜 머핀이 아홉 개뿐이야?"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부엌으로 가서 확인하니 가장자리에 있던 머핀 한 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장난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친구를 다그쳤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우리가 앉아 있던 창가에서는 카페로 올라오는 계단이 내려다보이고 발소리까지 들리기 때문에 누군가 몰래 카페에 들어와 머핀을 훔쳐 갔을 가능성은 없었고, 개나 고양이가 기어들어 와 상자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머핀 한 개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쏙 빼갔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아홉 개의 머핀만이 담겨있는 상자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다이였다.


"어제 그들이 와서 가져갔나 보다."

"누구?"

"외계의 존재들. 우리가 어제 초대했잖아."

"다이. 그런 말 하지 마. 무섭단 말이야."


무서워하는 우리를 나무라듯 다이가 말했다.


"우리가 초대해서 와 주었는데 무서워하면 어떻게 해? 고마워해야지. 머핀도 딱 하나만 가져갔어. 매너 있는 애들이야. 마음에 들어."


머핀 한 개가 분명 감쪽같이 사라졌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미스터리. 나는 결국 그들의 방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핀 실종 사건' 이후, 나는 그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인간과 우주'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이런 말을 했었다. 외계의 존재를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말라고. 경찰에 신고하지도 말라고.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라고. 수업의 교재는 그가 쓴 책으로 제목은 <눈 감으면 우주가 내 안에 있고 눈 뜨면 나는 우주 안에 있다>였고, 내용은 몹시 난해했다. 수업은 더 했다. 그는 칠판에 물리학 수식들을 마구 휘갈기다가 천지인, 유불선, 음양오행, 주역 등을 이야기하곤 했으며, 기말고사 때는 진짜 글자 그대로 자신의 '인생관'을 적으라고 했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과 환호하며 신나게 시험지 앞뒤 꽉꽉 채워 적는 동안 황망한 표정으로 턱 괴고 앉아있던 이공계 학우들의 깊은 한숨 소리도 기억난다. 그때는 외계의 존재를 만나면 인사를 하라는 그의 말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 밤 이후 나는 정말로 당황하지 않고, 물론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다크에서 만났으니까 라다크 말로 '줄레'라고 인사를 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단맛을 좋아하는 그들을 위해서 살구 머핀도 굽고, 초콜릿 머핀도 구웠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카페 두레를 찾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다이가 한창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던 이른 저녁이었다.


"바질이랑 오레가노 어디 있어?"

"오레가노 거의 안 남았을 텐데... 어디 있었더라."


선반 구석에서 오레가노 통을 찾아냈다. 그런데 며칠 전 반의반도 남아있지 않았던 걸 확인했던 오레가노 통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음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누가 오레가노 새로 사다 놨어?"


나도, 당신도 틀렸다. 아무도 오레가노를 새로 사다 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득 찬 오레가노 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머핀 잘 먹었다고 답례로 오레가노 주고 간 것이 아닐까?"

"기브 앤 테이크. 역시 매너가 있는 애들이야."


머핀을 주고, 오레가노를 받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기브 앤 테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