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리포트 춘자 _ 09 공존하거나 극복하거나

in #stimcity4 years ago


두려움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공존하거나 극복하거나. 진화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심어진 것이든 살면서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든 이는 어디까지나 두려움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이고 애초에 두려움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맨몸으로 하늘을 날지만, 운전은 못 한다. 운전하는 꿈은 악몽이다. 운전하는 법을 모르는 채로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마구잡이로 핸들을 돌리는 곡예 운전을 하다가 언제나 온몸이 굳어 잠에서 깨어난다. 물론 실제로도 운전을 못 한다. 평생 안 할 것이다. 주저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긴 한데 이건 퍽 억울한 일이다.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세계에는 정말 큰 차이가 있으니까. 이 억울한 트라우마의 시작은 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는 언니가 면허를 따자마자 차를 샀는데 드라이브 시켜주겠다는 말을 듣고 차에 따라 탔다가 시내 한복판에서 두 번의 사고를 겪은 것이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은 가벼운 접촉사고였다. 두려웠던 것은 사고로 죽거나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던 그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능력이나 의지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한 인간이 순식간에 패닉을 맞는 과정 말이다. 그 짧은 시간 언니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던 과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피와 살에 스민 것이 틀림없다. 비슷한 성질의 크고 작은 패닉을 겪을 때마다 여전히 언니의 비명과 굳어진 뒷모습이 떠오른다. 반면 그녀는 사고로 인해 오히려 일찌감치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드라이버로 거듭난 것인지 이후 새 차를 끌고 여기저기 잘만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나만 억울한 일이다.

대학생 때는 '자전거 탈 줄 알면 누구나 스쿠터를 탈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별생각 없이 올라탔다가 식당 통유리 창을 향해 돌진하는 스쿠터 위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는데(멈추는 법을 몰랐다), 이후 스쿠터 타겠다는 생각도 접었다. 작년에는 전동 킥보드를 타다가 고꾸라져 죽을 뻔 해서 이제 전동 킥보드도 살상 무기 쯤으로 여긴다. 자율주행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운명인 건가. 어쨌든 나는 두려움과의 공존을 택했다.


물론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한 경험도 있다. 스노보드를 처음 배울 때 일이다. 날 가르쳤던 사람은 친한 선배 오빠였다. 슬로프 꼭대기에 서니 아래에서 올려다본 것과 완전히 달랐다. 슬로프의 경사는 훨씬 더 가파르고, 그 끝은 저 멀리 까마득했다. 무엇보다 나의 두 발이 보드에 고정되어 자유롭지 않으며, 스노보드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속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 온몸에 석고붕대를 감은 사람처럼 엉거주춤 서서 바들바들 떠는 나를 붙잡고 선배 오빠가 외친 말들은 막연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가고 싶은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면 몸이 저절로 따라간다'든지, '몸을 돌리려 하지 말고 그저 바라보라'든지 동작이나 자세보다는 마음가짐(?)에 대한 것들이었다.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자 배우러 온 주제에 그의 가르침이 좀 아니꼽게 느껴졌다. 그가 "자, 시선을 멀리 두고. 천천히 천천히."라고 하면, 나는 "보고 있잖아! 보고 있다고!"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나면 여지없이 넘어졌다. 악에 받쳐 일어설 때마다 긴장한 몸은 속수무책으로 굳어졌고 더 역동적으로 눈밭을 뒹굴었다. 반대로 몸에 힘이 빠진다 싶으면 보드는 하늘을 날 기세로 빨라졌다. 통제할 수 없는 속도감에 기겁해서 이번에는 자진해서 눈밭에 몸을 던졌다. 그런 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그의 모습을 견뎌내는 것은 더 큰 고역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스스로를 원망하며 다시 스노보드 탄다고 하나 봐라 이를 갈았지만, 결국 그해 겨울 도전을 거듭한 결과 '턴의 마법'을 깨우쳤다. 이거구나 하고 몸이 스스로 깨달은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얼마나 기뻤는지 그날은 넘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극복하는 중이다.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습관처럼 남아 꿈속에서 발작을 일으킬 때는 아직 멀었구나 싶기도 하다. 작년에는 기이한 꿈을 하나 꾸었다.

엄마와 강변을 걷고 있는데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더니 번개가 내리꽂혔다. 강물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이내 지진이 났다. 곧 다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내가 딛고 선 땅이 갈라졌다. 우리는 끝을 모르고 어두운 심연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당신은 모든 감각을 잃게 됩니다." ARS 전화 응답의 익숙한 그 목소리였다. 경고보다는 친절한 안내처럼 들렸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 손가락과 발가락부터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 길고 긴 죽음의 길을 빠르게 통과하고 있는 거라고. 허우적거리던 팔다리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완전한 어둠이 나를 덮쳤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홀로 놀이동산 같은 곳에 있었다. 오락실의 전자음이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VR 카레이싱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었다.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했지만 꼴등을 했고, 꼴등을 한 나에게 다음 단계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유리한 행동을 선택하려면 아이템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아이템을 살 수 있는 게임머니가 없었다. 게임머니는 게임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결과를 알면서도 불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삐’ 하는 버저 소리와 함께 신부님과 수녀님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내게 알약을 건넸다. 이 알약을 먹고 이 생의 기억을 모두 지우면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만약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면 놀이공원에 갇혀 자동차 경주 게임으로 게임머니를 획득하며 영원히 살아야 한다고. 완전히 사라지거나 영원히 무의미한 게임을 하거나. 너무나도 아찔하여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알약을 삼켰다. 분노와 슬픔이 배꼽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성난 동물처럼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밀쳐내고 성당을 도망쳐 나왔다.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인 얼굴을 하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끝나지 않는 게임을 영원히 반복할 수도 없다고. 울부짖는 내 곁을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지나갔다. 삐용삐용 소리가 더 커다랗게 울렸다. 여전히 두려움과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꿈에서도 산다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말이다.


세 번째 이탈 후, 정리되지 않은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은 속도를 달리하며 내 곁에 무언가를 잔뜩 쌓아 놓기도 하고 그것들을 한꺼번에 쓸어가 버리기도 했다. 나는 아무래도 쌓이는 편이 좋았다. 손으로 해야 할 일, 눈으로 해야 할 일, 결정해야 할 일, 약간의 관심을 가져야 할 일, 큰 관심을 가져야 할 일 등이 나를 먼저 다루어 달라며 득달같이 몰려와서는 머리통 주변을 한동안 맴돌았다. 총량이 정해져 있는 집중력을 여러 대상에 나누어 썼는데, 그건 단지 시간을 나누어 쓰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서너 가지의 딴생각을 골고루, 그리고 최대한 동시에 했다. 생각만 그렇게 할 뿐 실제로 멀티 태스킹을 하지는 않는다. 비효율적인 집중, 달리 말하면 효율적인 산만함이다. 이렇게 산만한 데다가 성질까지 급하니 '차근차근'이 어렵다. 기억력도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일을 그르친 적도 몇 번 있다. 지난 두 차례의 이탈 때도 이 조급증 때문에 금방 몸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이탈을 미션이나 게임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두려움 없는 상태는 분명 이탈의 전제조건이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찬찬히 둘러보고 하나하나 뜯어보고 서서히 받아들일 시간을 건너뛰어 버리기도 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무언가 배운다. 겁이 너무 없어도 문제다. 마룻바닥을 닦던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나는 어째서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얼굴을, 거울 속에 비칠 내 모습을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걸까.

다음 이탈까지는 보름이 걸렸다. 몸에서 빠져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Sort:  



Join the community in our migration to Hive, a community built blockchain for the community. All Steem account holders will receive equivalent stake on the new Hive blockchain.

Please follow @innerhive on twitter for more information.

전동킥보드, 사람들이 워낙 많이 타기에 최근에 저도 올라가봤었는데 속도 조절이 어려워 죽을 뻔했습니다 ㅠㅠ 꿈이 정말 미스테리하게 생생하네요.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ㅠㅠ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어요 라운드라운드님. 좋은 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