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동거하기 (To live with technology)

in #technology8 years ago (edited)

영화사에 길이 남을 스탠리 큐브릭의 명작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도입은 우연히 도구를 발견하는 유인원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최근의 인류학적 연구는 인류의 조상들이 몇백만년 전부터 도구를 사용해 왔다고 증언한다. 남아 있는 인류학적 증거가 그 시점이니, 사실 훨씬 오래전부터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적인 도구에 대해 ‘기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류는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해 왔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기술과 함께 한 역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가축을 길들여 기르는 일, 볍씨를 심어 농작물을 재배하는 일, 돌을 파서 글자를 새기는 작업,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일, 나무의 꽃이나 뿌리 등에서 즙을 내어 천을 염색하는 방법 등은,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것이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한 삶의 방식 같지만 사실은 그 기술 하나 하나가 사회에 자리잡기까지는 최소 수백년에서 수천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발전한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인간보다 더 바둑을 잘 두는 알파고(Alphogo)와 동거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알파고는 시작에 불과하다. 베타고와 감마고가 나올 때쯤에 우리는 인간과 기계를 어떤 기준으로 구분해야 하는가를 두고 철학적 논쟁을 벌여야할 것이다.

이 흐름은 비가역적이다. 한번 사회에 수용된 기술은 인간에게 일종의 환경처럼, 숙명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기술은 마치 유전자가 진화하듯 끊임없이 진화한다. 기술의 역사를 보자면 마치 기술에서도 다윈주의가 관철되는 듯하다. 기술은 정말로 진화한다.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기술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이렇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기술에 대해 인간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제시된다. 기술을 수용하고 적응하고 활용하던가 아니면 기술에 의해 외면 당하던가.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술만능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 만능주의는 기술에 빗대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위장막일 뿐이다. 기술결정론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모든 결정론은 회고적 시점에 불과하다. 역사를 구성했던 다양한 요소들을 되돌이켜보자면 마치 '그것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하게 되는 사후적인 필연성이 존재한다. 마치 그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듯이... 그러나 이러한 사후적인 필연성은 그 역사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건들의 개요들과 역사적으로 확정된 결과들을 엮어서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후 얻게 되는 사후적인 판단일 뿐이다. 결정론은 사후적인 판단을 과거로 투사하여 마치 그것이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오인하는 착각일 뿐이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과거는 필연적이다. 그렇다고 미래까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기술만능주의와 기술결정론의 반대편 극단인 기술무용론 혹은 기술로부터의 도피 역시 의미 없는 담론이다. 기술 무용론은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무용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환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사는데, 그 환경을 구성하는 무시못할 요소가 기술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로부터 도피하자는 주장은 현대사회에서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은 ‘선동’이다. 이미 우리는 온통 기술들에 둘러쌓여 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기술과 동떨어진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의미가 없지도 않다. 어느 정도 기술과 동떨어져 고즈넉한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회의 다수가 그 주장에 동의해서 ‘기술 없이’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필자는 그런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즉 우리는 기술을 피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기술은 인간에게 하나의 환경이자 숙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이라는 숙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그 숙명을 어떻게 다루어나갈지에 대해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