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da Accord V6 3.0 7G 2004

in #testdrive6 years ago

Honda Accord V6 3.0
한국판 쿠로후네(黑船)
by jin ([email protected])

黑船

쿠로후네(黑船)란 검은 배를 뜻하는 일본어. 일본이 굳게 쇄국정책을 펴던 막부 말기 시절,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함대가 우라가에 출현해 그 압도적인 전투력의 차이를 직접 눈으로 본 일반인들에 의해 급격한 여론이 형성되어 쇄국은 개방으로 점차 변해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한발 앞서 중흥기에 들어간다. 이때 나타난 검은 증기선을 일본인은 쿠로후네라고 부르며 그 이후에도 외국에서 큰 영향력의 어떤 외세가 있을 때마다 "쿠로후네가 온다"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한국은 오랜 세월 동안 수입차에 대해서는 문을 꼭꼭 닫고 있었다. 수입차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여년이 조금 넘은 정도. 국산차와는 판매 간섭이 적은 최고급 모델을 중심으로 판매가 시작되었고 정부와 언론의 은근한 위화감 조성으로 일반인들이 수입차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다지 밝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수입차 구매를 고려하던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는 공통된 두 가지 화제가 있었으니 그 하나는 세무조사, 다른 하나는 지존파나 막가파 등 수입차로 대표되는 기득권 층에 대한 보복 범죄집단의 타겟에 대한 불안감이었으니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10여년쯤 지나면 수입차에 대한 이런 보이지 않는 압력이 우스개소리로 돌아다니지 않을까도 싶을 정도로 전근대적인 쇄국 분위기였던 것이다.

사실 한국의 수입차 시장을 개방한 주역은 미국이다. 하지만 재주는 미국이 부리고 돈은 독일에서 챙겼다. 당시엔 수입다변화 정책에 의해 일본 생산 차량은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수입되던 소수의 일본 브랜드 역시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모델 뿐. 미국이 문을 열고 독일이 자리를 편 수입차 시장에 일본차가 드디어 투입되기 시작했다. 첫 주자는 일본 토요타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렉서스. 토요타가 아닌 렉서스를 진출시킨 판단은 영단이었다. 미국 시장에서 인정 받은 숙성된 브랜드 프리미엄과 함께 일본산 고급차 특유의 예리한 마무리는 수입차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먹혀들었고 렉서스라는 네이밍도 반일 정서의 초점을 트릿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최근은 신모델 출시 저조로 다시 순위를 뺐기긴 했지만 진출 직후에 BMW를 제치고 판매 1위를 차지한 그런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약 반년 전에 드디어 토종 일본 브랜드가 처음으로 진출했다. 렉서스라는 국적불명의 네이밍이 아닌, 혼다라는 일본 토종 네이밍으로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뿌리 깊은 반일 정서와 수입차 배격 정서라는 두 가지 부담을 동시에 짊어진 부담스런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국산 모델과 판매 간섭도 있다. 우선 혼다에서 투입한 모델은 어코드 2.4와 3.0의 두 가지 배기량 라인업. 배기량도 차량 가격도 국산차와 애매하게 겹친다. 판매 간섭 모델이라면 그랜저와 오피러스 정도가 되겠지만 네티즌들은 오히려 배기량도 가격도 차이가 나는 쏘나타와의 비교로 노골적으로 어코드의 레벨을 낮추고 있다. 이런 네티즌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너무나 민감해서 게시판에서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 게다가 최근 출시한 코드네임 NF의 쏘나타의 출현도 이런 분위기의 미묘함에 일조하고 있다. 어코드의 출현으로 한국 자동차 마켓의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은 태풍의 눈 한가운데 있는 어코드를 월간 카비전의 협조로 시승해보았다. 과연 어코드는 한국의 쿠로후네가 될 것인가. 혹은 될 자격이 있는가.

Honda

마케팅의 토요타, 기술의 닛산, 그리고 엔진의 혼다.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를 칭할 때 항상 나오는 문구라 이제는 식상한지 오래다. 원래 이륜차 메이커로 출발한 혼다는 뒤늦게 사륜차 시장에 끼어들어 주로 소형차를 중심으로 마케팅을 진행해왔다. 일본 내 점유율은 토요타에 이어 닛산과 함께 2위를 왔다갔다 하는 정도. 일본 대형 자동차 메이커 중의 잇슨보시(一寸法師)와 같은 존재인지라 토요타의 셀시오, 크라운이나 닛산의 시마, 세드릭같은 대형 기함은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어코드의 일본판인 인스파이어 정도가 혼다 라인업의 탑 모델인 것이다. 전륜 구동의 소형차 중심으로 특히 그 엔진에 높은 평가를 받아 매니아 층도 매우 두터운 편이다.

혼다의 소형 모델인 시빅이나 인테그라에 Type-R이라는 이름의 최상위 라인업은 흡기 포트를 비롯한 엔진 부품을 하나하나 수작업을 마무리 한 메이커 튠 엔진을 장착해서 작은 엔진으로 고출력을 쥐어 짜내는 그 독특한 감성으로 실력을 인정 받고 몇 년 전 S2000이라는 혼다의 기념 모델로 회전수를 9000rpm까지 손쉽게 올릴 수 있는 컴피티션 급 엔진을 단순히 오일교환만으로 일반인들의 유지보수가 가능한 수준까지 양산해내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2리터 자연흡기 엔진으로 250마력이라는 전무후무한 숫자의 출현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만들 정도다. (참고로 한국의 대표 스포츠카인 투스카니의 경우 같은 2리터 엔진으로 143마력의 출력을 보여준다) 게다가 최근엔 혼다 피트라는 소형차가 일본 내 판매 1위 신화인 토요타 카롤라를 사상 처음으로 제치고 1위에 올라 일본 자동차 업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카롤라가 해치백부터 웨건까지 상당히 다양한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는 반면, 피트는 엔진이나 바디의 바리에이션이 전혀 없이 단지 1개의 모델로 카롤라를 판매 댓수에서 제쳤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피트는 그 이후에 피트 아리아라는 노치백을 추가하고 엔진 라인업도 2종류로 확대했다)

이렇게 화려한 실적의 혼다이지만 사실 일본 내에서는 토요타에 가려 상대적으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는 토요타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실제로 미국 내 딜러에서의 어코드는 캠리보다 가격 딜이 어렵다. 그래도 잘 팔린다. 시빅은 카롤라에 비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월등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튜닝 베이스 머신으로서도 유명하다. CR-V는 RAV4보다도 출력이 좋고 잔고장이 적어 중고차 가치가 더 높다. S2000과 같은 유일무이한 머신을 토요타 MR2가 대적하기엔 역부족이다. 일본인의 토요타 편애에 비하면 미국에서는 토요타와 거의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성공한 혼다가 미국 라인업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와 한국 공략을 시작했다. 어코드에 이어 CR-V가 10월 중에 발매될 예정이다. S2000의 투입도 계속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언론매체에서 거론된 적은 없지만 Pilot이라는 한국에서 충분히 통할만한 대형 SUV도 대기하고 있다.

Honda Accord

어코드는 1976년 첫 출시 이래로 26년간 6번을 모델체인지를 했다. 세계 140여개국에서 총 1,220만대가 판매되었으니 이름 그대로 글로벌 모델이라고 할만한 정도. 5세대까지는 내수/수출 구분 없이 동일한 모델로 생산이 되었지만 6세대부터는 일본/유럽과 북미로 크게 나뉘어 서로 다른 모델로 생산이 된다. 큼직하고 편하고 파워가 넘치는 취향의 북미와 정교하고 조종하는 재미를 원하는 일본/유럽의 취향을 하나의 같은 모델로 만족시키기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한국에 수입되는 어코드는 가장 최신에 발표된 7세대의 북미판 모델이다. 북미판에는 세단과 쿠페의 두가지 바디가 있지만 한국에는 세단만 수입된다. 쿠페의 수입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물론 사이드미러 방향지시등 등 한국 수입 모델에만 적용된 작은 부분이 있어 북미판과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세부 옵션 차이일 뿐 전체적인 패키징은 거의 동일하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에서는 2.4 위주로 판매가 되는데 비해 한국에는 3.0을 중심으로 마케팅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배기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휘발류 가격도 수배에 달하는 한국에서 미국보다도 더 큰 배기량을 선호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참고로 한국과 미국에 판매되는 어코드는 일본에서는 인스파이어라는 이름으로 일본 내수용 어코드 모델의 상위 모델로 판매가 되고 있다. 이 인스파이어는 한국과 미국 수출 모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한가지는 HiDS (Honda Intelligent Driver Support System)이라는 것으로 프론트 그릴에 장착된 레이더를 활용한 차속/차간 제어 기능(IHCC)과 전면 윈드실드 상단에 위치한 CMOS 카메라를 활용한 차선 유지 지원 기능 (LKAS)로 이루어져있다. 기존의 크루즈 콘트롤에서 격단 발전한 이 기능은 레이더로 앞서가는 차량과의 거리를 측정해 속도를 조절하고 카메라로 차선을 읽고 판단해 스티어링 휠을 자동으로 보정해준다. 전격제트작전의 키트 수준의 반 정도까지 왔다고 봐도 좋을까. 레이더로 앞차와의 거리를 체크해 속도를 보정해주는 기능은 이미 일본의 많은 메이커의 상위 모델이 채택하고 있고 차선을 읽어 스티어링 휠을 자동을 움직여주는 기능은 이미 닛산의 일부 모델에서도 탑재되어 출시되고 있다. 물론 운전자가 손을 놓고 잠을 자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깜빡 주의를 잃었을 때 조금씩 보정을 해준다는 정도의 기능이지만 아 이젠 정말 21세기에 들어왔구나 하는 느낌을 실감하게 해주는 옵션이다. 또 하나는 오히려 더 실용적인 것으로 가변 실린더 시스템이 그것으로 평소에는 6기통이 전부 움직이다가 엔진이 부하를 적게 받는 상황이 되면 리어뱅크의 실린더 3개의 내부 폭발이 정지한다. 6기통 3.0 엔진이 순간 3기통 1.5 엔진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다시 엔진에 힘이 필요한 때가 오면 자동적으로 쉬고 있던 실린더 내의 3기통에 불꽃이 돌아온다. 이런 혁신적인 기능으로 이 3.0 V6 엔진은 연비가 일본의 10.15모드 주행 연료 소비율로 11.6km/l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북미판을 포함한 한국에 들어오는 어코드는 이 두 가지의 재미난 옵션이 생략되어 있다. 그냥 참고로만 체크하자.

외관

어코드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평범하면서도 재미난 구석이 있다. 전체적인 볼륨은 현대의 그랜저와 비슷하다. 하지만 얼굴이 매우 젊다. 그랜저가 인생의 단맛 쓴맛 전부 다 보고 이제는 세월의 잔주름이 적당히 얼굴에 붙어있는 안성기와 비슷한 느낌이라면 어코드는 이제 막 가정의 품에서 세상으로 뛰쳐나와 아직도 얼굴에 엄마가 발라준 보습크림이 채 말라있지 않은 느낌의 조인성과 흡사하다. 치켜 뜨고 있는 두 눈은 예전 전성기의 김민희 냄새도 나지만… 연예인에 빗대는건 이 정도로.

미끈덩하면서 당돌한 인상이랄까. 처음에 이 신형 어코드를 미국에서 봤을 때 한국의 기아 리오의 마스크와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보면 뉴 BMW 5시리즈도 리오의 뒷면과 비슷한 인상이 있으니 어찌 보면 리오는 세계 자동차 디자인의 최첨단의 흐름을 앞장서는 그런 숨겨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재미난 생각도 든다. 스포츠 세단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기 위해 약간 오버한 듯한 마스크가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계속 두고 보면 볼 수록 귀여워질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아쉬운 점이라면 엔진 후드와 사이드 펜더와의 단차가 조금 큰 편이라 그 라인이 디자인의 전체적인 흐름을 감상하는데 계속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범퍼 아래쪽엔 안개등이 얌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뒷면의 디자인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얌전하다.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는 쿠페 모델의 뒷모습은 앞모습의 과격한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반면에 세단은 약간 그 과격도의 수위를 살짝 낮춘 느낌. 최근 발매된 신형 쏘나타의 뒷면과 매우 닮았다. 예전에도 쏘나타2 이전 뉴쏘나타의 후면 컴비네이션 램프가 어코드와 매우 흡사했던 적이 있는데 이런 부분을 체크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뒷범퍼에는 두개의 후방 센서가 달려있다. 사이드는 매우 평범하다. 적당히 기분 좋게 부풀어있는 세단의 표준형에 가까워서 앞과 뒤를 살짝 가린다면 무슨 차인지 맞추기가 어려울 정도. 세단으로서의 사이드 디자인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수출 모델에만 특별히 추가된 사이드미러의 방향지시등이 눈에 띈다. 시승차는 프리미엄 화이트 펄이라는 이름의 흰색의 색상이었는데 메탈릭 페인트의 흰색이므로 컴파운드가 들어간 흰색 전용 왁스를 사용하면 안되겠다. 흰색은 표백된 느낌의 흰색이 아닌, 살짝 따뜻한 온기가 들어간 흰색에 가깝다. 예전에 혼다에서 이런 흰색을 챔피온 화이트 였던가 그런 이름으로 부른 적이 있었는데 좋게 보면 따뜻하고 친근하고 깊은 느낌의 흰색이고 나쁘게 평하자면 관리를 제대로 안해 살짝 빛이 바래 노랗게 변해가는 예전의 흰색 페인트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장

내장의 톤은 두 가지로 준비되어 있다. 외장이 흰색인 경우엔 밝은 베이지 계의 톤으로 구성되어 있고 흰색 이외의 경우는 블랙으로 통일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두운 차는 밝은 내장, 밝은 차는 어두운 내장의 조합이 밸런스가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이 어코드의 경우는 반대. 베이지 내장의 경우는 우드 그레인이 포함되는데 블랙 내장은 그 부분이 대신 메탈릭 처리가 되어있다. 미국의 자동차 잡지의 평가를 보면 이 우드 그레인은 지금까지 본 가장 훌륭한 모방 나뭇결 무늬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우드 그레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평가는 유보하는 편이 낫겠다. 단, 색상이나 밝기는 전체적인 내장 톤과 매우 잘 어울리는 편. 내장의 베이지도 상하 투톤으로 배색이 되어있는데 고급스럽고 안락한 느낌을 주기엔 뭔가 약간 부족한 느낌이다. 저렴하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좌석은 운전석, 조수석 모두 전동식에 운전석은 럼버 서포트가 포함되어 있다. 전동식이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메모리 기능이 없다는 것. 이래서는 전동식의 의미가 없다. 차를 부부가 번갈아가며 운전할 때 매번 좌석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상당히 번거롭다. 짧은 시간 내에 최적의 위치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F-1 드라이버가 운전석 위치를 최적으로 맞추기 위해 시간과 예산을 퍼붓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좋은 운전을 하기 위한 첫 번째 순서도 이 좌석 위치를 최적화시켜 자세를 맞추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메모리 기능의 전동식 시트가 위력을 발휘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쨌든 아쉽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전동식 시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수동식이라면 손쉽게 순간적으로 원하는 위치에 딱 맞출 수 있는 반면, 스위치를 눌러 이잉이잉하는 모터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어색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메모리 기능으로 원하는 위치에 바로 맞출 수 있다는 장점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었는데 메모리 기능이 생략된 전동식은 필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편 럼버 서포트는 그 위치가 다른 차에 비해 너무 높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운전을 해보니 무척 편안하게 척추를 받쳐주었다. 이번 시승의 숨은 1등 공신일지도 모르겠다.

스티어링 휠은 전형적인 혼다 스타일의 4스포크 휠. 크기도 그립도 만족스럽다. 물론 그립 일부에 우드가 들어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다. 휠에 부속되어 있는 버튼 들의 크기나 형상이나 눌렀을 때의 감성 품질도 뛰어나다. 좌측에는 오디오 관련 버튼, 그리고 우측에는 오토 크루즈 관련 버튼이 배치되어 있다. 스티어링 휠을 통해 보는 계기판은 극히 심플하다. 멋을 최소한으로 자제하고 극도로 절제된 배치와 디자인. 하지만 속도계에 마일까지 병기된 것은 조금 의아스럽긴 했다. 아마 캐나다 수출용의 계기판 판넬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평소에는 km를 사용하다가 가끔 미국 국경을 넘어 여행하자면 마일도 필요할테니. 계기판은 시원시원한 흰색의 투과식 조명. 처음엔 밝기 조절 다이얼을 찾지 못해 당황스러웠지만 거리 적산계 리셋 버튼을 돌리니 적당한 단계로 조절이 쉽게 되었다. 기어 단수 표시도 라이트가 차례로 점등되는 식이라 오히려 문자나 숫자가 직접 표시되는 디지털 식보다 간결하고 보기 편했다.

운전석 좌측 송풍구 아래에는 썬루프 버튼과 TCS 버튼이 있다. 썬루프 버튼이 머리 위쪽이 아니고 왼쪽 무릎 가까이 위치한 것도 혼다의 전통.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탐탁지 못하다. 운전 중에 버튼을 찾기도 쉽지 않고 동승자가 조작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그리고 원터치도 아니고 계속 누르고 있어야 작동한다. 여러 다양한 썬루프 스위치를 보아왔지만 역시 최고는 그냥 평범한 다이얼식이라고 생각한다.

센터페시아는 어코드 인테리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처음에 사진으로 봤을 때는 V자 형상의 전체적인 배치가 약간 경박스럽게 느껴졌는데 직접 보니 훨씬 깔끔했고 작동해보니 너무나 편리했다. 상단에 몰려 적당히 누워있는 배치는 이전 6세대의 어코드와 비슷한 느낌인데 전체적으로 훨씬 고급스러워졌다. 큼직한 세 개의 다이얼은 매우 직관적이고 오디오나 공조장치의 버튼 배치도 심플하고 알기 쉬워서 매뉴얼을 따로 볼 필요도 없이 순간적으로 적응이 되었다. 최근 몇 년 간 시승했던 수많은 차량 중에 가장 빨리 익숙해진 경우다. CD는 인대시로 6장이 수납된다. CD 체인저가 따로 있지 않다는 점도 일단 반갑다. 그 아래쪽에는 큼직한 수납 공간이 있는데 열어보면 CD 케이스를 세로로 마치 책장처럼 주욱 꽂아 넣을 수 있게 되어있다. CD 플레이어가 있는 차의 경우 콘솔박스, 뒷좌석, 그리고 바닥까지 CD 케이스로 어지럽게 널려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유용한 공간이다.

변속 레버는 익숙한 예전의 I 형식으로 약간 의아스러웠던 부분이다. 레트로나 키치 스타일이 아닐까 순간 생각했을 정도로 과거의 유물 냄새가 풀풀 나는 디자인. 물론 조작면에서 우수하고 오토매틱의 매뉴얼 모드가 사실은 별로 쓰일 일이 없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 같은 I 형식이라도 동생뻘인 시빅은 약간 더 다듬어진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많은 수의 구매 예정자가 이 부분을 보고 실망해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과장된 생각까지도 든다. 다음 모델 체인지에서는 어떻게 좀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 변속 레버 좌우에는 이제는 기본이 된 시트 히터 스위치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시승

도어를 열고 자리에 앉는다. 도어는 적당히 묵직하고 두텁고 닫을 때의 공기가 압축되는 듯한 체감 밀폐성도 뛰어나다. 좌석은 약간 높은 듯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차체가 큰 편이라 바로 익숙해진다. 도어를 열고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계기판에 라이트가 아주 약하게 들어와 있다. 키를 꽂고 시동을 걸면 단계적으로 더 밝아진다. 언젠가부터 계기판의 이런 "시동 의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이륜차의 세계에서는 스즈키 하야부사부터 시동키를 돌리면 계기판 바늘이 오른쪽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그런 액션이 히트를 쳐서 지금은 대배기량 이륜차는 메이커를 막론하고 유행이 되어버렸다. 사륜차는 스바루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키를 꽂아 시동을 걸면 계기판의 라이트가 단계적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매우 그럴싸하다. 어코드는 약간 그런 분위기를 흉내낸 것인지 그냥 편의를 위해 미리 살짝 라이트를 밝히는 건지 애매할 정도로 소극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조금 더 과잉 액션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부분에서의 연출 연구가 좀 필요할 듯도 싶다. 어코드의 계기판은 투과식으로 낮에도 라이트가 들어와야 보이는 설정이다. 시원스러운 흰색을 중심으로 뚜렷한 시인성을 보여주지만 가끔 약간 거슬릴 때도 있다. 계기판을 거의 보지 않고 운전하는 개인 취향 탓인지도 모르겠다.

시동을 걸면 어코드의 심장 3.0리터 VTEC 엔진이 깨어난다. 역시 대배기량에 V6라는 레이아웃 탓인지 묵직하면서도 듬직한 존재감이 일품이다. 엔진 소음 유입은 준수하다. 렉서스처럼 시동을 걸고 깜빡 잊고 또 걸만큼 소음이 차단되어있지는 않지만 미미하게 들릴까 말까 하는 소음 차폐 수준은 합격선. 시승차는 3.0리터 VTEC V6 모델인데 하나 아랫급의 2.4리터 모델은 조금 더 발전된 i-VTEC 엔진이 들어간다. 이제는 혼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VTEC엔진은 rpm에 따라 밸브 타이밍과 리프트 양을 변화시키는 메커니즘으로 혼다의 엔진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기술이다. rpm에 따라 리니어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고 rpm의 미리 지정된 한 점을 경계로 밸브 타이밍/리프트가 전환이 된다. 다른 엔진이라면 고회전으로 가면서 토크가 이제 슬슬 떨어질 시점에 VTEC은 밸브 변화로 그 토크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매뉴얼 트랜스미션과 조합된 VTEC 엔진을 시승해보면 그 전환 시점이 미묘하게 느껴지는데 그 시점을 보통 VTEC이 터진다… 라고 표현한다. 일부 시승기에서는 VTEC이 터지는 것을 터보와 비교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토크가 그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하지는 않으니 차체 움직임에도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볼륨을 몇 클릭 갑자기 올린 듯이 사운드가 호쾌하게 터지는 느낌이 일품이다. i-VTEC의 경우는 속칭 이 VTEC이 터지는 시점을 미리 고정시키지 않고 엔진이 스스로 판단해 알아서 조절한다는 점이 다르다. VTEC의 발전형이라고 보면 된다. VTEC은 사실 고회전을 위한 설정이라기보다는 저회전을 위한 설정에 더 가깝다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고회전은 엔진 정밀도와 밸브 시스템이 크게 좌우한다. 정밀도를 높이면 고회전의 엔진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회전에 맞춰진 밸브 타이밍은 저회전에서는 그 힘을 발휘 못한다. 다루기 매우 어려워지는 엔진이 되는 것이다. 엔진은 이미 고회전에 맞춰 그 품질, 내구성, 정밀도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고 저회전의 엔진 부조 발생을 막기 위해 VTEC 시스템으로 밸브 타이밍/리프트를 변화시키는 의미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뭐, 조삼모사 식의 발상인지도 모르겠지만.

좌석을 조절하고 스티어링 휠의 높이를 맞추고 리어뷰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조절한다. 리어뷰미러가 빛을 흡수하는 ECM 미러가 아니라는 점은 의외였다. 뒤에 하이빔을 켜고 달리는 미련한 운전자가 있다면 미러 아래쪽의 똑딱이로 조절해서 빛을 일부 차단하는 수 밖에 없다. 사이드미러는 물론 자동 접이식. 시트는 적당히 푹신하고 적당히 자세를 잡아준다. 사이드 볼스터가 그렇게 두툼하진 않으니 코너에서 몸이 좀 밀릴 수도 있겠지만 장거리 여행에는 최적이겠다.
오토매틱 변속 레버를 D로 옮긴다. P-R-N-D-D3-2-1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N-D-D3은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자유스럽게 왔다 갔다 하니 처음 D로 레버를 옮길 때 D3로 가지 않게 신경써야 한다는 점은 좀 납득하기 힘들다. 레버도 게이지도 보지 않고 그냥 투루룩 옮길 수 있는 셋팅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맨 아래까지 내려버리면 D가 되는 BMW나 벤츠의 그것이 좋다. 어쨌든 이 변속 레버의 디자인과 셋팅은 어코드의 전체적인 품질과 완성도를 낮추고 있다. 액셀과 브레이크의 답력은 평균 수준. 독일차의 돌덩이 같은 느낌과는 많이 틀리다. 오히려 한국차에 가까우니 이 부분은 위화감이 적게 누구나 금방 적응이 가능하겠다. 물론 취향에 따라 평가가 나뉠 수 있는 부분이다.

파워는 넘쳐난다. 240마력이라는 숫자는 지금까지 이 가격에 접근 가능한 차로서는 한국에서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토크는 물론 자연흡기 엔진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엔진 배기량의 리터 단위에 10을 곱하면 kg.m 단위의 토크와 흡사하게 나온다. 과급기 없이 토크를 올리는 방법은 압축비를 높이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인데 이런 대중을 위한 세단은 운전자가 어디서 어떤 품질의 휘발류를 넣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노킹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만들 수 밖에 없으니 그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게 토크의 한계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파워를 높이는 방법은 허용 회전수를 높여 마력을 끌어올리는 방법 밖에 없다. 회전수를 높여도 토크가 살아있는 엔진이야말로 혼다의 가장 자신 있는 장기.

액셀도 상당히 민감하다. 조금만 밟아도 팍팍 튀어나가니 얌전하게 운전하기엔 너무도 본능을 자극한다. 엔진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어떻게 해서든 성능을 과시하고자 하는 셋팅일까. 골목에서 큰길로 가볍게 진입하는 정도로도 휠스핀을 일으키며 타이어 스킬음과 함께 어랏 싶을 정도로 튀어나가니 가끔 깜짝 놀라기도 한다. 뒷좌석에 사장님을 태우고 이렇게 달리다간 하루도 못 버티고 짤릴지도 모르겠다. 액셀을 깊게 밟으면 잠시 멈칫하다가 굉음을 지르며 rpm이 순식간에 튀어 오른다. 엔진 반응이 매우 빠른 반면 트랜스미션은 한 호흡 느린 편이다. 노멀/스포츠 모드 변환 기능이 없는 점도 아쉽다. 엔진 반응과 사운드는 영락없는 혼다. rpm이 올라가면 그 느낌이 둔해지고 불쾌해지는 대다수의 엔진에 비하면 이 혼다 엔진은 매우 특출하다. rpm을 레드존 가까이 올리면 그제서야 제 자리를 찾은 듯 매끄럽게 돌아가는 회전과 소프라노 하이톤의 엔진 사운드만으로도 이 어코드는 구입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국산 엔진도 많이 발전했고 외국산 엔진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시승해본 국산 엔진 중 이렇게 대단한 엔진은 없었다. 최근 시승한 코드네임 NF의 신형 쏘나타 2.0 엔진도 고회전 영역에서의 감성 품질은 기대 이하였다. 국산 엔진은 이 혼다 엔진에 비하면 아직도 멀고 멀었다는 생각이다. 높은 출력, 고회전에서의 감성, VTEC 덕에 저회전에서의 충분한 토크, 검증된 내구성, 준중형 수준의 연비, 게다가 각종 레이스에서 잘 알려진 브랜드 파워까지 이 이상의 엔진은 없다고 단언하고 싶을 정도이다.

기어비는 탑 기어에서 80km/h에 1,500rpm. 대배기량 다운 넉넉한 설정이다. 얌전히 가속할 때는 기어 변속 시점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부드럽지만 급가속 시에는 물론 변속이 느껴진다. 기어비가 조금 더 촘촘하고 반응이 즉각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패밀리 세단의 설정으로서는 나쁘지 않다. 만인을 위한 패밀리 세단에 혼다 특유의 스포츠성을 추가한다는 점이 어느 시각으로 보자면 모순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최근 미국 자동차 시장의 분위기로 보자면 GT-R이나 Type-R 등 매니악한 스포츠 모델을 왜 투입하지 않는걸까 싶을 정도로 소형 세단이건 미니밴이건 스포츠성을 내세우고 있으니 어쩌면 어코드는 라이벌 캠리에 비해 시장을 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세상의 흐름이 이번에는 혼다 편에 서있는 것일지도. 액셀을 밟기가 무서울 정도로 즉각적인 엔진에 약간은 반응이 느린 낮은 기어비의 트랜스미션의 조합은 그래서 오히려 적절한 매칭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고속 순항은 대 배기량의 세단이 그렇듯 매우 편안하고 안락하다. 오른 발에 힘을 주면 그대로 폭발적인 몬스터가 되는 엔진의 존재가 아무 때나 원할 때 추월이 가능하리라는 안심감을 주는 점도 좋다.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시승차의 문제인지 직진안정성이 약간 불안하다는 점이었다. 직진안정성이 불안하다기보다는 스티어링 휠의 센터 유격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는 쪽이 맞을지도. 계속해서 직진을 보정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였다. 토우인을 조금 조이면 해결될 문제인 것도 같고. 사실 스포츠 세단이라기보다는 듬직한 투어링 세단이 더 어울리는 명칭이겠지만 다른 메이커도 스포츠를 남용하는 와중인지라 스포츠의 스포츠 혼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분류일지도 모르겠다.

코너에 들어선다. 시승에 늘 이용하는 중미산 코너인데 이제는 슬슬 질려서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첫 코너를 눈 앞에 두고 일단 속도를 충분히 낸 다음, 적당히 브레이크로 감속하고 코너에 진입하며 다시 액셀로 수위 조절을 하는데… 타이어가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차가 옆으로 흐른다. 아직 익숙하지 차라서 페이스를 많이 올리지도 않았는데 첫 코너에서, 그것도 오르막에서 타이어가 꾸엑 미끄러지다니 어랏 하는 생각에 두 번째 코너는 조금 신중하게 그립을 느끼며 진입했다. 하지만 역시 꾸엑-. 타이어의 그립이 좀 심할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 그립이 자신 없으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미끄러뜨리며 가볼까 하는 탁미식 발상도 해보았지만 사실 그 정도의 운전 실력은 없으니 그냥 적당히 대충 가보자 라는 생각에 계속 페이스를 조금씩 올려보는데… 어 의외로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적당히 중량이 있으니 하중 이동도 급하지 않고 스무스해서 리듬을 타기도 쉽고 타이어 그립이 낮은 반면 네바퀴의 접지 상태를 정확히 리니어하게 판단이 가능하며 그런 움직임을 마음대로 제어가 가능한 혼다 엔진의 240마력도 즉각적으로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FF라는 점도 마음의 여유를 더해주었다. 코너에 들어서서 액셀을 밟아 트랙션을 확보하는데 조금 과도하게 밟으면 바로 언더가 나면서 예상 라인에서 벗어난다. 액셀을 살짝 되돌리면 바로 턱인이 되며 앞머리는 코너 안쪽으로 향하는데 그때 스티어링 휠로 적당히 오차 수정을 하며 코너를 마무리한다. 이때는 조향을 위한다기보단 그 언더와 턱인 사이의 불안정함을 보정하는 수정 도구로 활용한다는 편이 더 맞겠다. 완만한 코너에서 스티어링 휠을 조금 더 안쪽으로 꺾고 액셀을 충분히 밟아 네바퀴를 미끄러뜨리며 일부러 언더를 만들어 예상 라인을 잡아나가는 액션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속칭 끝이 말리는 코너의 경우는 액셀을 조금 되돌리기만 하면 앞머리는 알아서 안으로 같이 말려드니 그 것도 재미있고 또한 안전했다. 드리프트는 기본적으로 언더라는데 어쩌면 드리프트에 가장 어울리는 구조는 FR이 아닌 FF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파워 슬라이드로 코너 도중에 뒤를 흘리는건 FR쪽이 간단하지만 파워 슬라이드가 아닌, 관성으로 만들어내는 드리프트는 FF쪽이 더 안전하게 접근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다. 코너가 예상보다 급하면 액셀에서 발을 떼는 그런 본능적인 자연스러운 행동에도 FF쪽의 구성이 결과적으로 딱 맞는다. 그립력이 낮은 타이어의 미스매치가 오히려 이번 시승의 최고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던 점은 새옹지마였다. 일본의 드리프트 매니아들은 일부러 후륜에 그립이 낮은 바이어스 타이어를 끼우고 연습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코드는 드리프트를 위해 태어난 머신일까. 전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시승 직후 느꼈던 인상은 어쨌든 그랬다. 결과적으로는 예상치 못한 즐거운 시승이었지만 역시나 이 어코드의 본래의 목적을 생각해본다면 단점으로 지적된다. 그립이 더 높은 타이어로 바꿔주었으면 한다. 시승을 마치고 생각해보니 TCS는 꺼보지도 못했다. 코너에서 적당히 둔중한 움직임을 보여야 TCS를 꺼볼 생각을 했을텐데 이미 신나게 네 바퀴를 미끄러뜨리며 코너마다 차를 집어 던지고 나니 TCS는 이미 작동 중이었다. 역시 타이어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서스펜션은 혼다가 오래 숙성시킨 더블위시본이다. 2001년이던가 풀모델 체인지된 시빅과 인테그라(미국에서는 RSX)가 더블위시본에서 스트럿으로 바뀌어 초반에 좀 어색한 거동을 보여 아쉬웠는데 이번 어코드 모델 체인지에는 더블위시본 구조를 유지해준 점이 고맙다. 더블위시본이 스트럿보다 우수한 구조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구조건 상관없이 얼마나 오래 숙성을 시켜 최적의 한 점의 셋팅 값을 찾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이유로 현대 자동차에서 FR 스포츠카를 갑자기 띡 만들어준다고 해도 기존 숙성된 FF보다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많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다. 댐핑 스트로크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 노면이 고른 도로에서는 충분히 부드러운 상급 살룬의 주행 감각을 보여준다. 승차감이 부드러운데 비해 코너에서는 의외로 롤이 적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스티어링 휠의 조타 감각도 나쁘지 않고 다이렉트했지만 복원력이 의외로 강해 코너링 도중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 탓에 스티어링 감각이 예리하지 못하다는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브레이크 성능도 합격점이다. ABS 개입도 늦은 편이라 체감적으로는 이번 시승은 TCS도 ABS도 없는 제네릭한 스포츠카를 시승한 인상에 가깝다.

아쉬운 점

일단은 가격이다. 물론 한국의 수입차 가격을 미국 등과 비교한다면 참 답답할 정도로 그 격차가 크지만 최근까지의 수입차의 라인업은 주로 그런 가격 차이에 구애되지 않는 상류층을 대상으로 했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혼다 어코드의 경우 처음 설계부터 미국의 중산층의 취향에 맞춰 제작된, 실용성에 집중한 대중차인 것이라 당연하겠지만 하이엔드 고급차가 아니기 때문에 차량의 전반적인 고급감과 옵션 등에서는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수입차와는 여러모로 격차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대중차가 한국에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못한 가격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 차의 국내 가격은 3,890만원이다. 비슷한 옵션의 동일한 모델이 미국에서는 실제로 23,000달러 정도로 거래되고 있다. (MSRP로는 26,000달러가 넘지만 미국은 한국과 달리 딜러와 가격 협상이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실제 거래되는 가격은 소매 가격은 물론, 알려진 도매 가격보다 낮은 경우도 많다) 실질 평균 소득이 한국의 두 배 가량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이 어코드의 가격을 한국 실정으로 환산하면 체감적으로 1,500만원 미만으로 구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어코드가 1,500만원이라면 매우 매력적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세단의 위치에 등극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차가 제비용까지 포함해 4천만원이 넘는다는 점은 조금 납득하기 힘들다. 이미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구름 위의 존재로 올라가버린 다른 수입차의 경우와는 조금 틀린 것이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국산차 수요까지 일부 흡수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의 어코드의 이 가격 책정은 분명 오버프라이스다. 컴퓨터가 차선을 읽고 앞차와의 거리를 계산해 키트처럼 알아서 달리고 6기통에서 3기통으로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는 초 하이테크 덩어리인 혼다 인스파이어의 경우도 일본 내 가격은 한국의 어코드 가격에 못 미친다. 일본 내 평균 소득을 생각해보면 다시 한번 좌절이다. 혼다코리아에서는 노마진 정책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차량 수입 가격에 (심지어 운송비까지 포함시켜) 40% 가까이 세금을 붙이는 한국의 관세 정책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항간에서는 미국 소매 가격에 한국 세금을 계산하면 적당한 가격대라는 얘기도 있지만 미국 소매 가격에 차를 수입한다면 그건 이미 혼다코리아가 아닌 보따리상에 불과하다. 3.0 모델의 경우 3천만원 초반대가 적정 가격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3천 후반 대에 수입해도 한국인들은 줄을 서서 구입할 정도니 더 비싸게 부를걸 하고 아쉬워하는 혼다코리아 경영진의 얼굴도 괜히 상상이 되고 이래저래 착잡해진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타이어. 미셰린의 205/60R16이 들어가는데 왜 이런 타이어를 달아서 판매했을까 싶을 정도로 미스매칭이었다. 코너에 차를 던질 때만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 급하게 사거리에 진입해 좌회전을 하거나 정지선에서 급하게 출발할 때, 특히 골목에서 도로로 급히 진입할 때마다 듣는 타이어의 불쾌한 스킬음은 매일 이용하는 패밀리 세단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한정된 계층을 위한 스포츠카의 경우 구입 직후 휠이나 타이어를 교환하는 경우가 많으니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겠지만 차에 신경쓰기 싫고 단순히 실용성을 위주로 구입하는 일반 가정의 가장에게 이 타이어를 이해시키기엔 좀 문제가 있다. 일단 안전성에서도 그렇다. 어쨌든 타이어는 불합격.

다음은 어코드는 어디까지나 패밀리 세단이라는 점과 수입차라는 점, 그리고 스포츠성이 매우 강하다는 점과 고급스러운 질감면에서는 조금 떨어진다는 점. 이 네가지 요소가 서로간에 위화감이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오랫동안 문호가 닫혀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수입차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리고 그 동안 그 환상의 바탕 위에 상상 속의 기대감을 지금까지 구축해 왔다. 물론 어코드는 BMW 7시리즈가 아니지만 수입차에 대해서는 가격을 떠나서 원하는 기대치가 있고 그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음엔 실제 이상으로 실망감이 커지게 마련이다. 특히 그 기대치라는 부분에서는 스포츠성 보다는 차의 크기, 고급스러운 질감, 그리고 부드러운 승차감 등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엔진 회전을 레드존 가까이 올려 240마력을 발휘하는 영역에서의 감성으로 수입 패밀리 세단을 판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적 인식의 기준 내에서의 어코드는 쉽사리 평가 절하되기 쉽다. 이 부분은 어코드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쿠로후네의 진정한 의미

이런 상황에서의 어코드의 출현은 몇가지 불안 요소를 떠나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차나 일부 한정 계층을 위한 스페셜티 모델이 아닌, 검증된 대중적인 차가 수입차로서 국내에 상륙한 것이다. 물론 가격이 조금 부담스러운 부분은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수입차의 가격대와 비교해본다면 충분히 저렴한 선이다. 게다가 한국차의 가격이 최근 꾸준히 올라 이제는 수입차와의 가격 갭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환상으로서의 구름 위의 존재의 수입차가 아닌, 현실의 눈 앞에 존재하는 수입차가 한대 출현한 것이다. 어코드의 첫 출발은 나쁘지 않다. 나쁘기는 커녕 진출 직후에 단지 한가지 차종으로 이미 준 베스트셀러 수준에 올라가는 위업을 달성했다. 예상 이상의 실적이다. 어코드의 딜레마 이상으로 한국인들이 그 동안 적당한 가격의 수입차에 얼마나 목말라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국산 브랜드는 대적 상대가 없이 온실 속에서 성장해왔다. 수입차 시장이 개방되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판매 간섭이 거의 없이 완전히 분리된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틀리다. 그랜저, 오피러스와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는 가격과 성능과 패키지의 수입차가 상륙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차도 그 동안 온실 속에서 충분히 튼튼해져 어코드에 대해 충분한 메리트를 가지고 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싸움이 아닌, 매우 흥미진진하고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고무적인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혼다 어코드가 한국 시장에서 앞으로 얼마나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어코드를 시작으로 비슷한 급의 대중 수입차가 얼마나 더 추가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코드 투입을 시작으로 한국차는 긍정적인 자극으로 앞으로 대단한 성장을 할 것임에 틀림 없다. 초반에는 반일감정과 왜곡된 애국심, 그리고 근거 없는 수입차 선호 사상 등의 복합적인 요소로 인해 거품이 걷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단순히 개방 초기의 잠깐의 부작용일 뿐이다. 어코드의 출현도 흥미롭지만 사실은 어코드로 인해 앞으로 얼마나 한국차가 성장할지 두근두근 기대된다. 소비자들은 그저 그 경쟁을 즐기고 경쟁의 부산물인 좋은 차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이런 의미로 보자면 어코드는 한국판 쿠로후네의 자격이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