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레이스] 크레타섬 하니아, 그곳엔 조르바가 있다 1

in #tripsteem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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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도착하고부터는 쭉 조르바 생각을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늘 읽고 싶었지만 잘 읽히지 않아 늘 두 서장만 읽고 책장 깊숙이 꽂아 두었던 책이다. 올해 초 대학 동기와 후배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서 내가 이 책을 읽자고 한 것은 밀린 숙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너무도 묵은 짐이어서 한시바삐 털어버리고 싶었다. 책 속에서 조르바는 시시때때로 여성을 폄하하는 말들을 내뱉었는데 처음 그런 구절을 맞닥뜨렸을 때는 곤혹스러웠다. 기분 나빠 해야 할지 웃어 넘겨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읽다 보니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 하는 조르바라는 인간의 특성과 시대적이고 공간적인 배경을 결합하니 100%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이해가 됐다. 아니 심지어 조르바가 여자를 비하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충실한 행동은 ‘츤데레’에 가깝다는 생각까지 한 걸 보면 난 어지간히 조르바에 빠졌는지도.

네 번째로 탄 크루즈의 첫 번째 기항지인 크레타섬의 ‘하니아’에서는 아무런 정보 없이 지도 한 장을 들고 작은 도시를 누볐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리스의 독립 기념일이었다. 나는 공원에 앉아 그리스 독립과 관련한 기사를 검색하다 시인 바이런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언제나 변치 않고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유에 대한 강한 애정이고, 또 하나는 위선에 대한 혐오이다.”

늘 자유를 원하고 위선을 저주한 바이런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고 그것은 그의 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고 영향을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세기 초 투르크로부터 자유를 갈구하는 그리스의 무장 독립운동에 직접 참전했다. 고대 그리스를 사상과 문화의 조국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자금과 물자까지 조달하던 그는 참전한 이듬해 열병으로 그리스에서 눈을 감게 된다. 파랑과 하양이 교차된 그리스 국기가 독립 기념일을 기리는 사람들 손에서, 창문 옆에서, 가판대에서 유난히 펄럭였다. 주저하지 않고 연대의 손을 내밀어 행동한 바이런과 펄럭이는 그리스의 국기가 교차되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던 바이런의 시 몇 편을 쏟아지는 지중해의 햇살을 맞으며 읽었다.

길에서 어른이고 아이고 국기를 든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조지 고든 바이런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토록 늦은 한밤중에
지금도 가슴속엔 사랑이 깃들고
지금도 달빛은 훤하지만

칼을 쓰면 칼집이 해지고
영혼이 괴로우면 가슴이 허하나니,
심장도 숨 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에도 휴식이 있어야 하느니라.

밤은 사랑을 위해 있고,
낮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돌아오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달빛 사이를……

시를 음미하며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일상인 내가 곧은 마음으로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되는 어느 날을 상상했다. 주저하지 않고 확신으로 가득 차 행동할 수 있는 어느 날을..

크레타섬 하니아의 등대. 베네치아인들이 건축했지만 19세기 중반에 이집트인들이 복원했다.

옛 터키식 모스크인 키오우추크 하싼 모스크

도시는 꽤 텅 비어있었다. 텅 빈 도시를 지나 베네치아 항구에 도착해 어슬렁 어슬렁 항구를 거닐었다. 크레타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해 비잔틴 제국, 베네치아 공국, 오스만 제국까지 주변 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베네치안 성벽, 모스크, 아랍 양식의 등대까지 베네치아 항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유적은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썰물처럼 쓸려나간 지배의 상흔이 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크레타는 어땠을까? 바람 잘 날 없는 크레타는 역시나 그 당시 독립 전쟁과 발칸 전쟁, 제 1차 세계대전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위즈덤 레이스] 크레타섬 하니아, 그곳엔 조르바가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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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잘 알면 여행이 더욱 재밌있을것 같아요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조르바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

역사를 알고 보니 더 재미난 점도 있더라고요! 조르바는 최근 그리스 원전 번역이 나왔다해서 저도 다시 읽어보려고요 :)

나란히 햇볕에 앉은
노부부의 모습이
파란 하늘보다 높게 보입니다.

크으 한 편의 시네요. 노부부가 국기를 들고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모습도, 아이들이 국기를 들고 뛰어 다니는 모습도 참 찬란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