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레이스] 크레타섬 하니아, 그곳엔 조르바가 있다 2

in #tripsteem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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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항구의 풍경, 보정을 하지 않은 그대로의 하늘과 바다 색이다.

파도가 철썩이는 베네치아 항구를 옆에 두고 걷는데 나는 자꾸만 어지러웠다. 전정기관이 고장 난 것처럼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분명히 난 두 발을 땅에 디디고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땅이 바다처럼 일렁이는 느낌에 심한 멀미가 밀려왔다. 처음 느껴본 증상이었다. 하얀 요트가 줄지어 정박한 베네치아 항구의 아름다움이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꽤 심하게 비틀거리며 한 카페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분명 술에 얼큰하게 취한 술주정뱅이처럼 보였을 거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심호흡을 깊게 하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난 한번도 공황장애나 폐소 공포증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공황장애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뱃사람들이 배를 오래 타면 육지에 내려서 땅멀미를 겪는다고 언뜻 들은 게 떠올랐다. 이건 땅멀미가 분명했다.

‘이거 이거 뱃사람 다 됐구만. 그래, 땅멀미 정도는 겪어야 배 좀 탔다 으스댈 수 있지’

따지고 보면 땅멀미는 배로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이거나 꼭 한번 쯤을 겪어야 했을 통과 의례이기도 하다.

조르바를 닮은 거친 파도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바다 쪽을 걸었다. 청량한 짠내가 코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지중해의 냄새이다. 잔뜩 성이 난 파도가 쉴새 없이 밀려들어와 암석을 덮친다. 파도의 하얀 포말이 검은 돌 위로 부서지고 쓸려나갔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이토록 아름답고도 화가 난 바다는 본 적이 없다. 크레타섬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이거니와 거칠게 몰아닥치는 파도는 조르바와 닮아서 크레타섬에 있는 동안 나는 조르바를 계속 생각했다.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듯 계속, 오래, 자주 생각했다. 아름다운 베네치아 항구와 지중해 바다를 끼고 앉아있는 연인들은 부끄러움 같은 건 없다는 듯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지독하게 새파란 하늘과 바다, 황토색 돌벽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키스는 꼭 연출된 장면 같다.

크레타에서 만년설을 볼 수 있는 화이트 마운틴, 레프카 오리

하지만 가장 할 말을 잃게 만든 장면은 따뜻한 기후의 크레타에서 상상도 못 한 설산이 베네치아의 항구와 어우러져 빚어낸 마법 같은 풍경이었다. 하얀 산의 이름은 레프카 오리다.

그리스다운 식재료로 구성된 다코스와 로컬 맥주

밀려오는 허기를 잠재우기 위해 들어간 바다를 낀 작은 가게에서 다코스와 로컬 맥주를 시켰다. 다코스는 빵 위에 다진 토마토와 치즈, 올리브를 듬뿍 뿌린 크레타 지역의 전통 음식이다.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e-book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열었다. 첫 문장을 읽고 소름이 끼쳤다.

  •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기 직전인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내가 거쳐온 피레에프스 항구가 조르바와 주인공이 만난 항구였고 그들이 배를 타고 온 여정을 내가 온전히 거쳐 왔었던 거다.

  •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 구절을 인용한다면 나는 죽기도 한참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하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었다. 한밤중의 에게 해도, 아침의 해를 잔뜩 머금은 에게 해도, 해 질 녘의 에게 해도 만끽한 나는 단지 복이 있는 것도 아닌 어마어마한 복이 있는 사람이겠다. 3월 말의 그리스는 해는 뜨거워도 바람은 차가웠다. 야외석 그늘에 앉은 나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추워서 떨었고 전율에 떨었다. 책을 계속 읽다가 문득 조르바가 먹은 샐비어 술이 궁금해졌다. 다시 메뉴를 살피었지만 샐비어 술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리스 전통술 라키가 눈에 띄었다. 고작 1유로 였다.

“라키 한 잔만 주세요.”

몸을 데울 요령으로 시킨 라키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꽤나 시간이 지나서 웨이터가 라키 한 잔을 가져왔고 착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이 술은 우리가 대접하는 거예요.”

술꾼으로 여행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공짜 술을 얻어먹는 순간이다. 라키는 포도 찌꺼기로 만든 증류주로 스트레이트로 먹기도 하고 물을 섞어 마시기도 하고 따뜻하게 데운 뒤 꿀을 섞어 마시기도 한다. 분명 물을 섞으면 불투명해진다는 걸 알고 얼음 물을 섞었지만 라키는 여전히 투명했다. 물을 섞은 라키 한잔을 마시니 온 몸에 깃들었던 추위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술이 내 몸을 데우기도 했겠고 작은 가게의 호의가 나의 몸을 데운 덕도 있을 거다. 약간의 취기를 온몸에 담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진으로만 봐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크레타의 태양

베네치아 항구에서 가장 가까워 다녀온 해변. 바다에서 떠밀려온 쓰레기와 나뭇가지로 악취가 났다.

햇살 자체는 뜨겁지 않고 기분이 딱 좋은 정도의 따사로운 봄 햇살이었다. 한데 그 빛의 크기와 눈부심이 압도적이다. 태양 자체는 늘 내가 보는 정도의 크기이지만 태양을 둘러싸고 빛이 크게 번져서 그 크기가 다섯 배는 더 커 보인다. 해를 바라보고 걸으면 해를 등지고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일 미터 전까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다. 크레타의 바다를 더 보고 싶어 2km 정도 더 걸어가 도착한 해변에는 나무 조각과 쓰레기로 가득했다. 더러웠고 쓰레기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면을 본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싫지 않았다. 너무 완벽하면 또 매력이 떨어지는 법이 아니던가?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적나라한 민낯을 고스란히 가진 크레타의 하니아가 더 좋아졌다.

  • 조르바는 단숨에 첫 번째 철탑 아래로 달려가 줄을 당겨 기를 내렸다. 파국은 벼락처럼 우리를 덮쳤다. 케이블에 매단 통나무엔 흡사 악령과 같은 가속도가 붙었다. 두 번째 통나무가 풀려났다. 철탑이 흔들리며 통나무에 속도가 붙어 흡사 돌고래처럼 뛰며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세 번째 통나무는 엄청나게 텄다. 산꼭대기에서 풀어 놓자마자 통나무는 벼락 같은 소리를 내었다. 마을 사람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철탑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번째 통나무가 풀려났다. 다시 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철탑은 카드장처럼 차례차례 쓰러졌다. (요약)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이다. 조르바와 주인공이 심혈을 기울인 케이블 사업이 파국으로 치닿고 일체의 구조물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은 어찌나 코메디 같던지 손뼉 치며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철탑이 차례로 쓰러지고 불이 붙고 난장판이 되자 사람들은 모두 줄행랑을 치고 해변에는 둘만이 남게 된다.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봐도 나는 조르바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으로 보이지도 않고 대단한 인간 같지도 않다. 다만 공들였던 모든 것이 끝장난 순간에도 평소처럼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는 그의 무던함을, 좇망의 순간에도 자갈밭을 짓이기며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 즐길 수 있는 대범함을, 아무렇지 않게 툭 걸친 외투처럼 모든 것을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그 자유분방함을 사랑했다.

크루즈에서 바라본 석양

크루즈에서 크레타의 석양을 보고 싶어 허겁지겁 버스를 타고 배로 돌아갔다. 서두른다 했지만 약간 늦어 해가 바다 뒤로 숨어드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사라진 해 뒤의 아련하게 남은 자취만을 볼 수 있었다. 해 뒤켠의 그 아스라한 모습은 명확하고 확실하게 보이는 해 자체보다 아름다웠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에 붉은 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며 조르바처럼 럼을 마셨다. 럼은 너무 독해 한 번에 마실 수 없어서 몇 번에 나눠 홀짝였다. 하늘은 하염없이 식어가는데 내 가슴은 천천히 데워졌다. 독한 알코올 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나는 약간의 술기운에 조그맣게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에 적힌 글을 읊조렸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손발이 오글거렸지만 쾌감이 밀려왔다. 여행하는 그 무수한 시간 동안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자유롭길 바라며 나는 몇 번이고 더 속으로 읊조렸다.




[위즈덤 레이스] 크레타섬 하니아, 그곳엔 조르바가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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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이 환상적이네요~

베네치아 항구를 걷다가 등대가 있는 길로 유턴을 하면 설산이 짠 하고 나타나는데, 드라마틱하기도 하고 정말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라 정말 넋놓고 바라봤어요 :)

완전 멋진 블링 블링 블루 💙
행복한 ♥ 오늘 보내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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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엔젤님은 아이디 답게 블루를 좋아하시는 군요! 새파란 블루 블루, 남색에 가까운 블루~

예~압~! 그렇습니당~💙
편안한 밤 보내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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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뱅이 zen魔의 마력이 매력으로 글빨化하얗소.

크레타산 정취, 조르바의 정신, 배멀미가남긴 여운 그리고 술이주는 가벼운 횐각이 버무린 에머랄드 뽕글

아 피터님! 너무도 적절한 요약본 입니다! 그래도 이번 글은 술냄새가 좀 옅게 난 거 같은데...

바다랑 하늘이 예술이네요~ ^^
책속의 여정과 같은 여정이었다니 저도 읽으면서도 소름이~
저도 좋아하는 책속의 배경에 가서 그 책을 다시 읽고픈 비슷한 꿈이 있어서 공감되네요 ^^

정말 ebook을 열자마자 온몸에 닭살이..ㄷㄷ
스클라라님(이렇게 읽는게 맞을련지..)가고 싶은 책 속의 배경과 책이 뭔지도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