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이달의 작가 응모작, 소설 「바람」

in #zzan4 years ago (edited)

오랜만에 돌아왔어요.
zzan 9회 이달의 작가 응모작 소설 부문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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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설

주한의 좌우명은 단 하나였다.
세상에 무엇도 바라지 않을 것.

가깝게는 곁에 머무는 사람들부터 멀게는 꿈까지, 그가 열망하는 모든 것들은 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그를 배반했다.

시작점은 열일곱부터였다.

주한은 같은 반 아이의 고백으로 첫 연애를 시작했으나 주한의 연애상대는 두 달 만에 주한의 친구를 만났다. 빤하게도 장면을 목도한 주인공 역시 주한이었다. 학원가 근처 카페에서 서로의 볼을 꼬집던 그들을 발견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크나큰 상실감을 느꼈다. 그 상실은 주한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는데, 주한이 연애상대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허무함이 들었다는 이유였다. 자신의 우울이 연애로서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가 좌절되었던 사건이었으므로 그는 지금에 와서도 그 기억을 잊지 못했다.

또한 열일곱을 지점으로 그가 바라는 모든 일들은 천천히 어긋났다. 다양한 이유로 주한은 그 순간을 떠올렸다. 종종 일어나는 불행을 겪을 때도 그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 아이를 만난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됐을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그는 그때보다도 불행한 일이 많음에도 왜 그 장면을 잊지 못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가 바라는 일은 아주 조금씩 어긋났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시인이 꿈이었던 그는 스물에 시인이 되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한 줌의 소변과 미켈란젤로’라는 제목의 시를 실은 지역 신문은 주한에게 18,600원을 주었다. 원고료였다. 신문은 주한에게 매당 2천원을 중심으로 계산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등단 날 친구들을 불러 산 술값만 하더라도 5만원을 가뿐히 넘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온갖 출판사에서 러브콜이 오리라고 짐작했으나 오는 건 친구들의 물음이었다. 그는 안부를 묻는 지인들을 차단했고 부랴부랴 신문사에 보낼 답장을 썼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단행본을 내기 위해 여러 출판사에 응모작을 투고하다 가끔은 시적인 극본을 쓰겠다며 희곡 수업도 참여했으나 나가는 건 돈뿐이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들여야 하냐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도 희곡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는 밤이면 카페에 나가 커피를 탔고 이른 아침 극본 소재를 찾기 위해 밖을 거닐었다.

한 시간 근방을 걷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노트북을 펼쳤다. 어쩐지 9년 전 신문사에게, 자신이 무어라 말했는지 궁금해졌다. 이쯤 되면 청춘의 열정으로 어떤 객기를 펼쳤는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한은 30분 간 케케 묵은 아이디를 찾아내 메일함에 접속했다. 신문사의 발송 주소로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당선으로부터 3개월 뒤인, 2012년 1월의 메일이었다.

한주한 시인님의 앞으로 단행본을 요청 드리려 합니다. 예상 출판일은 6개월 뒤입니다. 확인하시면 연락 바랍니다.

그는 철지난 문장을 하염없이 읽으며 어쩌면 그의 바람은 사실 어긋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자책하는 마음은 옅어졌으나 때는 이미 지난 뒤였다. 여태껏 그가 지녔던 마음가짐과도 비슷했다.


@hyuny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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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작가님이십니다. 엄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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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독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제 속을 채우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현요아 님 글을 오랜만에 읽으니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