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역 앞 우동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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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역 앞, 점심 먹으러 수색역 아래 지하도를 건너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다소 단장됐지만 이 지하돟 정말.... 한때는 타임터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때는 말이 서울이지 난지도 옆 동네였던 상암동이 상전벽해를 해서 고층빌딩과 깔끔한 거리가 깔린 반면 지하도 건너 수색은 7~80년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또 바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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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에 흔한 역전우동집이 하나 있습니다. 20년 전 제가 촬영을 한 곳인데 주인도 바뀌었고 손님도 달라졌겠으나 똑같은 업종으로 그 장소에서 손님을 받고 있더군요. 20년 전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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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발길이 번다하게 오가는 거리 한켠에는‘역전우동’이라는 이름의 허름한 식당이 있었습니다. 주인장은 원래 그 리어카에 비닐 둘러치고 포장마차 밤샘 장사를 수색역 앞에서 20년 동안 해 온 분이었지요. 그러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한동안 포장마차를 걷어 치웠다가 ‘천직을 거역할 수 없어’ 다시 시작한 것이 이 작은 가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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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를 하던 습관 탓에 그는 매일 해가 저문 다음에야 하루 종일 끓여댄 우동 국물통을 리어카에 싣고 가서 가게의 셔터를 올리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20년간 밤낮이 바뀌다 보니까 어쩔 수가 없네요. 낮에는 졸리고 밤에는 말똥말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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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음식은 역시 우동이었습니다. 온갖 비법과 재료의 비밀이 엄격하게 배합된 ‘정통 일본 우동’과는 거리가 멀었고, 입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고픈 배를 채우는데 그 의의를 둘 법한 ‘역전우동’이었지만, 그 집 주인장의 우동에는 뭐가 특별한 것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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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냐고? 돈 만 원 가지고 가족들 외식할 수 있는 데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친 택시 기사 아저씨는 아내와 세 아이를 대동하고 있었죠. 우동 하나에 2천원이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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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님 가족의 집은 반포였습니다. (2020년 주 : 와 당시 반포주공아파트라고 했는데.... 아마도 초대박났을...... )우동값을 상쇄할만한 기름값을 아스팔트에 흘리면서 그들은 굳이 이곳을 찾은 겁니다. 이 가게에는 그 기사님같은 ‘광팬’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정처없는 심야의 나그네나 뜨거운 국물에 목마른 술꾼들 말고도 말입니다. 이 집엔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 호기심의 안테나를 세워가는데, 식당 밖 거리에서 누군가가 내지르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제 귀를 잡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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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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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로의 신사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뭉쳐진 얼굴로 입을 크게 벌린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아니 이 양반이 아직 장사를 하고 있었네그려. 하아 참, 이게 얼마만이야. 야 이거 정말.....” 초로의 신사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살아 있으니 만나는구나”를 연발하다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리 와! 그리고 너희들도 빨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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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을 바라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떼의 남녀가 웅성웅성 몰려 왔습니다. 창경원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초로의 신사는 그들을 가게 앞에 집합시킨 뒤 말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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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내 환갑이야. 환갑잔치 하는 날이라 우리 식구들 다 왔다고. 여보! 이 양반 알지? 그 왜 포장마차! 당신도 나랑 왔었잖아! 너희들도 이리 와 다 인사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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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신사는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얼굴이 되어 자식들을 소개합니다. 이놈은 의사가 됐고, 이놈은 대기업 다니고, 우리 사위는 육군 대위고........ 느닷없이 길거리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우동 가게 주인에게 단체 인사를 드리게 된 아들딸과 며느리와 사위들은 당황한 낯빛이었지만 깡총깡총 뛰어오를 듯한 아버지에게 서둘러 분위기를 맞췄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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늠름하게 늘어선 자식들을 뒤로 하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초로의 신사는 일손 바쁜 주인장의 손을 놓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 이렇게 만나는구나, 살아 있으니 만나는구나 혼잣말을 열 번 스무번 되풀이하면서요...... 아저씨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제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반가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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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꺼진 포장마차에서 저 사장님은 꽁꽁 언 손으로 안주 만들고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소주 마시면서 서로 힘냅시다 했었던 기억도 나고...... 우리 둘 다 무지하게 고생할 때였거든요. 아마 서로 보면서 아 저 사람보단 내가 낫다 하고 위로를 삼았을 거야 아마...... 어느날 포장마차 말도 없이 그만둬서 내가 얼마나 섭섭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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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아저씨가 포장마차를 시작하던 즈음만 해도 수색 일대엔 초가집이 남아 있을 정도로 살림살이가 빈한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옛 모습 간직한 수색역과 그 앞 버스정류장에 내린 고단한 인생들은 아저씨의 우동을 앞에 두고 "서로 쳐다보면서 위로를 삼으면서" 그들의 힘든 젊은 날을 삭혔던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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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잔치를 끝내고 자식들에 둘러싸여 한없이 행복했던 한 남자가 눈물까지 글썽였던 건 어쩌면 사라진 줄 알았던 자신의 옛 세월의 조각을 되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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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멀어져가는 옛 손님을 눈으로 쫓으면서 주인장 아저씨는 제게 엉뚱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주방을 왜 이렇게 거리 쪽으로 냈는지 알아요?” (앗! 그러고보니 주방이 떡볶이집처럼 거리 쪽으로 나 있습니다.)
“.......”
“예전에 포장마차 할 때 오던 손님들이 나를 봐 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렇게 나를 알아보고 견물생심(?)으로 들어오는 분들이 꽤 되거든요. 그냥 보고 싶어요. 보여 주고 싶고. 가족 데리고 오는 손님들도 나랑 같은 마음일 거예요. 옛날보다는 지금이 나으니까, 그 행복한 틈에서 자기 옛날을 보고 싶은 거지 한 번쯤. 그러다 습관이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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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게 나 여기 있소! 하는 마음을 보내고파서 겨울에는 찬 바람이 자발없이 몰아치고 여름에는 숨막히는 공기가 엄습하는 주방을, '밖으로 창을 낸' 주방을 꾸린 주인과, 그를 만난 반가움에 식구들까지 도열시켜 인사드리라 성화를 부리던 환갑맞은 손님의 영상은 지켜보는 사람의 가슴 한켠을 뻐근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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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둘의 어깨에는 아픈 옛 추억이 훈장이 되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었겠지요. 그 만남을 내내 지켜보면서 저는 스치듯 지나가며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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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가고 싶은 것은 그 시절의 가난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미덕이었다”(소설가 공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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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주인장의 소식은 그 후로도 몇 번 들었습니다. "배고픈 설움을 아는 탓에" 그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도움을 베푸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그래서 간혹 언론에 미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풍문으로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가 알지 못할 사정 때문에 역전우동 가게를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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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무얼 하고 계신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색 일대를 오가는 많은 이들은 특이하게도 거리로 뻥 뚫려 있는 한 우동집 주방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겁니다. 자신들을 무던히 보고 싶어했던 한 주인장의 푸근한 얼굴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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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오늘.... 20년 전 그 가게의 주인장과 손님을 떠올립니다. 이제 그 손님은 팔순을 맞았겠군요.......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엄지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