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과 싸운 박에스더, 박여선 부부

in #zzan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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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과 싸운 박에스더 그리고 박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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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미국 메사츄세츠.주에서 벤튼 목사의 딸로 태어난 메리는 나이 스물 하나에 결혼하여 스크랜턴이라는 성을 얻는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은 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일생의 결단을 한다. 예일 의대를 나온 의사 아들과 어머니 모두 선교사가 되어 듣도보도 못한 은자의 왕국 조선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 스크랜튼의 나이 쉰을 넘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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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885년, 조선에 오자마자 그녀는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벌인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 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 (이화 7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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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온전한 사람으로 쳐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글을 비하해서 여자나 쓰는 글이라 하여 암클이라고 군시렁대던 나라였지 않은가. 그런 세상에서 조선 여자를 그것도 노란머리 푸른눈의 양도깨비 외국인이 가르친다는 것은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면.부녀자들은 창문을 닫고 숨었고 아이들은 울며 달아났다." (스크랜튼 부인)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디에든 진취적인 인물이 있어 물꼬를 트는 법, 외국어를 배워 장차 왕비의 통역이 되어 보겠다는 어느 관리의 소실이 학당 문을 두드린 것이다. 1886년 5월 3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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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모르고 성은 남산에서 돌 던지면 열에 서넛은 맞을 김씨였던 이 '김부인'은 그로부터 오랜 역사를 이어갈 이화학당, 이화학교의 첫 학생으로 기록되지만 3개월만에 병으로 학업(?)을 그만둬 버렸다. 두 번째 학생은 "절대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서야 맡을 수 있었던 가난한 집 딸아이였고 세번째 학생은 버려진 콜레라 환자들 틈에서 거둬온 모녀 중 딸아이였다. 스크랜튼이 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도왔던 인부들은 남편도 버린 모녀를 도우려 애쓰는 스크랜튼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삯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저희가 좋은 일 하게 해 주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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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힘겹게 학생들을 모시면서 꾸려가던 이화학당에서 김점동은 네 번째로 피어난 배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서 잡무를 보던 이였기로 ‘양도깨비’들에 대한 공포를 일찌감치 졸업한 사람이었기에 딸의 손목을 잡고 이화학당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안 보고도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었다. 얼굴에 점이 있고 동생이라도 남자를 보겠다고 ‘점동’이라 이름 붙였던, 참으로 ‘조선스러운’ 김점동은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서양인들과 친숙했다지만 딸 김점동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 눈깔을 빼먹는다는” 서양 귀신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고 그녀의 회고로도 “ 스크랜턴이 난로 옆으로 오라고 하니까 아 저 여자가 드디어 나를 구워 먹으려는구나 생각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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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공부를 하면서 공포를 잊게 된다. 한글, 영어, 산수 등 모든 과목이 가르치는 지식을 그야말로 스폰지 물 빨아들이듯 흡수했고 특히 영어 경우는 일취월장이었다. 얼마 안 가 그녀는 선교사들과 ‘프리토킹’을 나눌 실력으로 성장했고 스크랜턴 부인이 남녀유별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이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는 것에 착안하여 세운 여성 전용 병원 보구여관의 통역을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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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의사라는 직업을 선망하지 않았다. 허구헌날 피가 튀기고 살을 째고 뼈를 붙이고 비명과 신음 속에 살아야 하는 일이 곱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어느날 그녀 앞에 심한 언청이 소녀가 부모와 함께 나타났다. 그러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소녀와 소녀의 부모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감사해 했고 의기양양하게 퇴원했다. 소녀의 일생은 앞으로 크게 달라지리라. 그런데 그 순간 인생이 바뀐 것은 소녀만이 아니었다. 그때껏 의사 일을 싫어라 하던 김점동, 김에스더의 마음에도 거대한 파문이 일었던 것이다. “나도 의사가 되겠다.” 그때 나이 열 다섯 살. 하지만 조선의 열 다섯 살 소녀가 의사의 길로 달려가기에는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그녀의 나이가 문제였다.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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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나이 마흔 돼서 결혼하는 경우도 귀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 나이 마흔이면 손자도 볼 나이였다. 여자 나이 열여덟을 넘으면 그 부모는 혼처 마련에 조급해질 때였고 스물을 넘었다면 뭔가 자신에 문제가 있거나 부모가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였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김점동의 집안에서도 성화를 부리게 된다. “의사는 뭔 의사. 빨리 시집이나 가거라” 그 뿐만 아니라 환자들까지 이상한 얼굴로 물어 본다. “아니 왜 처자는 시집을 안 가우?” 마침내 조급해진 김점동의 어머니는 선교사들에게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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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에스더의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라도 결혼을 시킬 수 밖에 없어요!”
기껏 알뜰살뜰 키워 놓은 저 영어도 잘하고 능력도 있는 조선 여성을 제사상 차리고 불씨 지키는 조선의 보통 며느리로 만들기는 싫었던 선교사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에스더 신랑 구하기 작전에 나선다. 김점동과 함께 일하던 여의사 로제타, 앞서 언청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 김점동의 인생을 바꾸는데 큰 기여를 했던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박유산이라는 조선 청년이 있는데....... ” (원래 이름은 박여선인데 선교사들은 발음 쉽게 박유산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서울에서 행세깨나 했고 광산 김씨 양반 가문이라는 자존심이 살아 있던 김점동의 집안 사람들의 얼굴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가문 체면이 있지 아버지가 훈장이라고는 하지만 집 나온 떠돌이에 선교사 마부하던 친구를…… ’ 그러나 이런 논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김점동은 단호하게 그 입을 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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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도 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관습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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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1893년 5월 결혼한다. 김점동. 우리 나이로 열 일곱. 박유산 나이 스물 여섯. 그런데 그 얼마 뒤 둘을 결혼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윌리엄 홀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남편을 잃은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미국행 준비를 서두르던 어느날 로제타는 김점동 부부의 방문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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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미국에 함께 갔으면 합니다.” 김점동은 필생의 소원이었던 의학 공부 하기를 원했고 박유산 또한 미국에 가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박유산과 박에스더 (미국에 가면서 남편 성을 따르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니 앞으로는 김점동의 호칭을 박에스더로 통일한다) 부부는 태평양을 건너가게 된다. 박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미국 적응을 마치고 볼티모어 의과대학에 입학하는데 박유산은 그러지 않았다. 태평양을 건너올 때 그에게도 포부가 있었고 꿈이 있었을 것이다. 갑신정변 때 활약하다가 천하의 역적이 돼 미국으로 도망쳤던 서재필이 의사가 되고 미국 시민이 돼 금의환향하는 모습에 부러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유산은 자신의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일단 거둬들였다. 아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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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당신이 나보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할 것 같소. 내가 당신을 도우리다. 당신은 공부만 하시오. 내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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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끝물의 조선 시대였다. 아마 조선 팔도 이천만 백성을 통틀어 이런 ‘마인드’의 남편은 한 줌도 안되었으리라. 박에스더는 그녀가 믿고 섬기던 하느님으로부터 세상 없는 큰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박유산은 로제타의 친정에서 경영하던 농장 노동자로, 식당 종업원으로 나서 부인 대신 외국 생활의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밤늦게 돌아와 정신없이 곯아떨어지는 남편을 보면서 박에스더는 이를 악물었을 것이고 간혹 “I'm sorry."를 부르짖으며 잠꼬대하는 남편을 공부를 멈추고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남편의 상투 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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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조선을 떠나던 1895년, 조선 정부는 단발령을 내린 바 있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카락 하나 터럭 하나도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손 댈 수 없다던 보수파의 반발도 있었지만 조선 천지에서도 단발은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물며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고 미국까지 와서 아내를 의사로 만들기 위한 도우미 노릇을 자처하던 박유산이 상투를 고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박유산은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서양인들과 어울릴 때에도 각양각색 외국인들과 땀흘려 일할 때에도 박유산의 상투는 유난히 우뚝했다. 박유산은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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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컨대 그것은 아내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즉 “조선을 잊지 말라.”는 호소 말이다. 미국 생활 10년에 필립 제이슨이라는 서양 이름을 얻고 우리 말까지 더듬거렸던 서재필처럼 살아가지 말고 반드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래서 당신이 지금 배운 것들을 조선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무언의 시위가 아니었을까. 다시 조선으로 들어간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박에스더 부부가 악전고투하며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밝혔다. 그래서 웬만하면 포기하고 조선으로 들어오라고, 여기에도 할 일이 많다고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박에스더는 또 한 번 단호한 답장으로 로제타의 말문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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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여기에서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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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생을 함께 한 부부였으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박에스더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00년 6월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학위를 받기 20여일 전, 1900년 5월 28일 남편 박유산은 고된 노동 끝에 얻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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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 가장 기쁜 일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기쁜 일은 에스더 당신을 만난 일이라” 하며 묵묵히 일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공부를 돕던 남편의 죽음 앞에서 박에스더가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지금도 남아 있는 박유산의 묘비에는 필시 박에스더가 선택했을 성경 구절이 새겨져 남아 있다. 마태복음 25장 35절. “내가 나그네였을 때 나를 영접하였고…” (When I was a stranger, ye took me 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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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앞에서 박에스더는 짧았던 그녀의 결혼 생활을 되짚었을 것이다. 우선 결혼을 안 할 수도, 할 수도 없던 열 여섯 살 꿈 많은 조선 처녀의 암울함이 떠올라 왔을 것이고, 그 정처없고 오갈데도 없는 나그네 신세의 손을 잡아 준 남편,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아내의 꿈을 ‘영접’했던 남편의 모습을 그리며 남편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통곡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뤄 준 파트너의 상실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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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는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철석같이 했다. 안정된 미국의 의사 자리를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그 첫 출발일 뿐이었다. 자신이 통역으로 근무했던 보구여관 (최초의 여성 병원) 의사가 되어 병이 들어도 의사에게 보일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도왔고, 열 달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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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역시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옮긴 뒤에는 쉬지 않고 인근의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 활동을 펼치는 한편 간호사 양성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10여년을 보낸 뒤 박에스더는 그녀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가 남편을 쓰러뜨린 바로 그 병마, 결핵에 걸려 세상을 뜬다. 1910년 4월 13일, 나이 서른 셋의 너무도 아까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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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 박에스더 부부는 그렇게 모두 폐결핵의 희생자가 됐지만 그 부부의 삶을 지켜봤던 로제타와 윌리엄의 아들 셔우드 홀은 이모같이 지낸 박에스더에게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반드시 결핵 전문의가 되어 조선의 결핵 환자들을 돕겠어요” 결핵 환자 돕기 운동의 일환으로 많이들 구입했던 ‘크리스마스 실’은 이 셔우드 홀이 만든 것이다. 홀 가문은 3대에 걸쳐 조선과 한국을 도왔고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아마도 그들은 조선에서의 한평생 박에스더와 박유산 부부를 떠올리며 살았을 것이다. “에스더는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던 로제타 홀의 감탄처럼. 그리고 그 에스더를 도와 기어코 의사를 만들어냈던 상투 자르지 않은 기독교인 박유산을 함께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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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만류 무릅쓰고, 임신한 아내를 두고 대구로 달려갔다는 의사 선생님 소식 들으며 가슴이 찡하다. 사실 별 것 아닌 병으로 온 나라가 수선이다 싶을 수도 있으나 의사는 병의 경중을 떠나 그 공포와도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분들의 건투를 빈다. 결핵으로 남편을 잃었고 결핵과 싸웠고 결핵에 쓰러졌으나 또 다른 사람에게 바톤을 넘겼던. 박에스더, 김점동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