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준비하던 글을 지워버렸다. 그 글의 제목은 '휘발성의 생명력'이었다. 서론에서 영속성과 휘발성을 비교하고, 객관적 시각이 아닌 주관적 시각에서는 휘발성이 역동적인 생명력을 갖는다는 글이었다. 그 글을 펼치기 위해 완전히 휘발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저장하는 기억을 분리해야했다. 기억 또한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는 휘발성을 가지고 있지만 경험에 비하면 저장기간이 길다. 그래서 계속해서 휘발성을 정제하려고 했다. 저장기간이 비교적 긴 기억과 경험을 분리하고, 순수한 경험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번씩 내가 오래토록 준비한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영감이 없었다. 내 사유의 폭은 한정적이고, 내 글솜씨도 부족하다. 평소, 나는 영감에 의존해서 표현하고, 영감에 의존해서 통찰한다. 독자들 또한 이를 반긴다. 평생에 걸친 사유를 풀어놓는 대목이 아니라, 번득이는 영감에 의해 순식간에 탄생한, 나도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모를 정도로, 그저 손가락에게 맡겨놓은 글이 인기가 많다. 이렇게 논쟁에 다시 불이 붙는다. 블럭체인에 기록된 영속적인 글, 그 글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게 아니라 휘발성을 지닌 영감이라는 조미료가 더해졌을 때 가치를 얻었다. 내 평생의 사유도 영감 없이는 싱거운 음식이다.
이틀 전에 올린 글을 생각해본다. 오리지널리티를 잃은 인류라는 글은, 두개의 댓글에 의해 탄생했다. 마인드 업로딩, 자아의 와해, 군중심리, 그리고 원본의 가치, 나는 이 키워드들을 섞어서 글을 써야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전에 키워드를 택한건 아니었다. 나는 정신 나간 주제, 환영, 필요, 나에게라는 글에서 주제를 공모했다. 다양한 키워드들이 있었고, 그 키워드들 중 무엇으로 글을 시작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았다. 당시에 막연히 생각하기론,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한 사회와 윤리에 대해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자아의 와해라던가 군중심리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해놓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휘발성을 가진 영감에 의존한 글이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 결국 자아의 와해, 군중심리라는 키워드까지도 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영속적인 블럭체인에 기록된 글이 가치있는가, 즉흥적으로 주어진 키워드들을 엮어낼 수 있는 영감이 가치있는가? 아니면 그 영감을 엮어낼 수 있었던 내 사유가 가치있는가?
여기서 실마리를 찾았다. 영감 없이 시작했던 '휘발성의 생명력'이라는 글은 영속적으로 폐기되었다. 하지만 그 글이 없었다면 휘발적인 영감이 솟지 않았을 것이고, 이 글도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단단하게 결합된 영속성과 휘발성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경험과 기억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번득임.
느낌.
순간 뭔가 머릿속을 지나간 느낌.
감정의 미묘한 변화.
이런 것들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저도 그런 것들이 주는 힘을 믿고있어요.
혹시라도 그런 것이 휘발되지 않을까 싶어 적어놓기도 하구요(그런데 적어놓으면 그 느낌이 아니더라구요..)
엇.... 어디서 오는 거죠? 이런 건? 나중에 ‘영감’이 떠오르면 써주세요!!
우리가 쓰는 언어는 뇌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모조리 기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게 아닐까요.
독창성을 잃은 인류라는 글은 정말 재미있고, 생각해 볼만한 글 같습니다. 좀 더 생각을 더 해봐도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님 덕분에 이런 저런 깊이 있는 사고를 엿볼 수 있어서 재미가 있어요. 가즈앗!!! ^^
크... 역시 오래 봐주셔서 제가 좋아하는 말을 아시는군요. 감사합니다.
ㅋㅋㅋ 전 성격상 아부는 못합니다~ 그냥 느낀 대로 가즈앗!!!
말씀하신 대로 그 영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는 그저 의식과 무의식의 무한 랠리, 그 어디즈음을 캐치할 뿐이지요.
다음엔 김반장님도 서브 한번 넣어주세요. 내가 잘 살릴 수 있는 키워드들로...
언젠가 다시한번 불쑥 찾아오지 않을까요?? 글을 쓴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인거 같습니다
읽는데 암호화폐외 블럭체인의 관계가 이런게 아닐까 하는 잡생각이 ㅎㅎㅎ 너무 암호화폐에 빠져 사나봅니다.
남에겐 가치가 없어도 저에겐 가치가 있을 수 있죠.
생각해보니 휘발적인 영감도 블록체인을 통해서 영속성을 갖게 되겠군요. :)
항상 철학적인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고 저는 철학을 잘 모르기에 인간의 삶 애기라 생각하고 잘 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주제라고 해도 항상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들입니다. ㅎ
잘 읽힌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ㅎㅎ
저도 처음 떠올랐던 생각과 맥락이,
실제 글을 쓰면 달라질때가 많더라고요ㅎ
아마도 글을 쓸 때 머릿속에 떠다니던 여러개의 노드들이 쏟아져나와 결합하는듯 해요.
철저하게 준비한 글의 논리가 즉흥적인 글에 밀리는건 좀 비참하기도 합니다 ㅎㅎ
이렇게 글을 쓸 때면 쓰면서도 신이 나지요.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추지 않고 춤을 춥니다. 내가 쓰는 건지 손가락이 쓰는 건지 모를, 몰입감이 대단한 글쓰기가 되지요.
허나, 그런 영감은 매번 채굴되지 않는 게 문제죠.ㅎ 영감을 풀어놓고 나면, 아 다음엔 또 뭘? 하는 고민이 시작되지요.
그래서 주제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키운다면, 꽃이 피지 않는 날이 줄어들겠죠.
이 글을 읽으면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손은 몸 밖에 나와 있는 뇌이다'
선생님의 사유의 근거가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 놓고 갑니다
스팀파워가 바닥이라서요
이렇게 멋진 글을 값없이 읽어서 죄송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정도 값도 못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외람되지만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는 완전한 자기창작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모방을 통한 모반이 있을뿐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선생님께서는
모방과 모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또 모방의 근사치는 어디까지 허용되어도 좋을까요
각 문단이 품은 아이디어는 모방에서 시작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문단들이 모여 이루는 메세지가 독창성이 있다면 모방을 넘어 재창조의 영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죠. 반대로 글 전체의 메세지가 독창성을 띄고 있지 않다고 해도 메세지를 끌어내기 위한 문단의 구성이 독창적이라면, 그것도 가치 있는 글입니다.
요약하면 글 전체의 메세지가 독창적이지 않고, 글의 전개 또한 진부하다면 창작물로서의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모방을 통해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지요? 게다가 뚜렷한 주제와 그에 따른 누구나의 사유를 끌어낼 수 있어야한다는 고견으로 알아 듣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조족지혈이지만 보팅파워 가득 채워져서 젤 먼저 뛰어 왔습니다 보팅 드릴래요 진짜 조족지혈이지만요 좋은 글을 어떻게 공짜로 읽겠어요 이제서야 맘이 좋아요
이 글이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기쁩니다.
전의 글들도 읽었지요
차마 빈손으로 댓글 달기 죄송스러워서 도둑읽기만 했습니다
사라진 그 글은 무언가 새 생명을 점지해놓고 갔을듯 하네요.
저는 생각을 계속 하다보면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때가 있어요. 그럼 바로 적어놓는답니다. 사실 이런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과거에 그린 그림이나 경험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아요. 아마 더 생각을 많이 해봐야 영감이란게 번뜩 하고 튀어나오는건 아닌가 싶어요 :)
메모를 글로 옮기는게 또 엄청나게 어려운 작업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메모를 자세히 하지도 않아요. 키워드 위주로 메모하고, 같은 주제로 한 메모가 아니더라도 키워드들을 쭉 모아놓고 보다보면 영감이 생길 때가 있더라구요.
영속성이 있는 불록체인이라고 하여 그것이 우리에게도 영속적인 속성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속적으로 기록되지만 실상은 7일, 아니 3일도 가치를 유지하지 못 한다는 비관론도 심심찮게 보이지요.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합니다.
결국 빠르게 큐레이팅을 받지 못 한 글들은 사라지는 것이죠...
휘발성은 곧 영속성이고, 이것이 영감이 아닌가요? 고로, '휘발성의 생명력'을 영감없이 시작했다고 하시는데, 영감이 있었기 때문에 ' 휘발성의 생명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예. 그래서 구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같은 번뜩임이라도 깊은 사유를 만났기에 의의가 있고, 같은 사유라도 우연적인 번뜩임이 있었기에 더 빛을 발하는 것같습니다. 양손과 양뇌에 함께 지니고 가는, 즐겁고 맛있는? 삶의 길일듯합니다..^^
불가분의 관계인건, 굳이 따로 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네요.
지난달에 쓰신 글에 심상, 메모를 말씀하시면서 경험이란 것에 대해 잠깐 언급이 있으셔서 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살짝쿵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네요. 왠지 모르게 행복한 결론을 내리신거 같아서 마음이 좋아요.
그렇습니까 ㅎㅎ
영감에 의한 글은 읽는이로 하여금
깨어남과 깨우침을 주는듯 합니다
살아있는 글과 죽어 있는 글의 차이가 될듯도 합니다
살아있는 글을 일고 기쁘게 방문하고 갑니다
그래도 영감이 아닌 지성에 의존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며, 두가지를 구분하는게 무슨 의미겠냐는 깨달음을 얻었네요.
두가지를 다 갖출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닐까생각합니다 ㅎ
지성이 뒷바침되고
영성으르 빛나서 모두에게
지성과 영성을 깨우칠수 있다면 좋을까하고 개인적 짧은 생각을...
지서은 횡적이고
영성은 종적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의 질서를 잡기가 쉽지가 않은데, 교통정리를 잘 하시는 분이...사유가 한정적이고 글 솜씨가 부족하다 하시면...아마 비슷한 의미로 스프링필드님의 댓글에서 킴리님의 댓글을 본 적이 있는데 킴리님이 이리 말씀하시면...ㅎㅎㅎ
감사한 말씀입니다.
휘발성의 생명력 정말 중요한
개념 같습니다
영감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시가 시처럼 보인다면 더 이상 시가 아니지요
시처럼 보이는 동시에 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게 진정한 시라고 믿어요
시적 중단 가능성이 있어야 시가 존재합니다
중단을 통해 모순과 역설의 모양새로 종결되지 않을까요
휘발성 생명력의 중요성 다시 인식하고 싶습니다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향하여
삶은 기쁨과 슬픔의 도가니지요
역설적이게도, 휘발성이 영속성에 비해 높은 생명력을 지니지요. 휘발성은 영속성이 가지지 못 한 역동성을 지녔으니까요. 굵고 짧습니다.
덴마크 살 때 만났던 친구들은 마리화나 같은 것이 부분적 합법이기 때문에 자주 하는데, 흡연할 때 무의식의 휘발성이 있는 영감이 생긴다며, 메모를 할 준비를 하고 피더라고요 ㅎㅎㅎ그들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하나의 여정이 될까요?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영속성과 휘발성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동의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 같아요.
어제랑 주제는 다른데 결론은 "구분해서 뭐 해?"로 수렴했네요.
좋은 글 잘읽고가요~
굉장한 깊이가 느껴지는 글이에요~
좋은 관점 감사합니다.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행복한 휴일 보내셔요!
감사합니다. 평안하시길.
어떤 과정이든 글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스팀잇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종착점이 아니어도 여전히 포스팅 소재가 될수 있는 점이 말이죠. 저도 파일을 '날'려먹은 걸로(....) 소재를 '날'로 먹었습니다.
맨날 옛날에 그린 그림만 보다가 새 그림 좀 보려니까 컴퓨터가 말을 안 듣네요.
영속성과 휘발성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받는 개념들이군요
글쓰기도 예술이니까.. 씨앗은 영감에서 오는 것 같아요.
영감이 떠오르기 전에 필자가 이미 계발시켜 놓은 글쓰기 능력이라는 컨베어밸트를 통과하면 번뜩이며 읽기 좋은 글이 나오죠. 공감이야 독자 마음이니 신경쓸 거 없구요^^
그럼요. 감상은 독자의 몫이죠. 아쉬우면 더 잘 쓸 수 밖에...
날것은 날것대로 특유의 매력이 있는데, 얼마나 더 잘쓰시려구요--;
이런 글을 쓰신다는 것 자체가 철학적인 사유의 표현을 확실히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 팔로우할게요
문득...
뭐라도 쓰자. 아끼다 똥된다!
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vimva님께서 작성하신
포스트가 떠올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