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어떤 번역으로 읽어야 하나?

in #kr5 years ago (edited)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어떤 번역으로 읽어야 하나? 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한 가지 방법

현재 ‘알라딘’에서 유통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요 번역자는 아래와 같다. 번역자 뒤에 붙인 건 4부의 마지막 두 시의 제목이다(편의상 ‘시’라고 칭했다). 역자의 이름순으로 열거했고, 초판 출판 연도는 따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내 기억으로 중판(重版)인 경우는 별도로 지적했다.

강대석 (한길사, 2011 +중판) : 취한 노래 / 신호
곽복록 (동서문화사, 2007 +중판) : 취한 자의 노래 / 징조
김인순 (열린책들, 2015) : 밤에 돌아다니는 자들의 노래 / 징조
두행숙 (부북스, 2011) : 밤에 취한 노래 / 징후(徵候)
박성현 (야그, 2007) : 밤에 산책하는 사람의 노래 / 징조
사지원 (홍신문화사, 2006 +중판) :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 징후
정동호 (책세상, 2000) : 명정의 노래 / 조짐 [*명정(酩酊):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몹시 취함]
정해창 (민음사, 2004) : 밤 산책자의 노래 / 징조
최민홍 (집문당, 2006 +중판) : 술 노래 / 징후
최승자 (청하, 1984) : 취가 / 조짐
홍성광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취한 자의 노래 / 조짐
황문수 (문예출판사, 2010 +중판) : 취가 / 조짐

끝에서 두 번째 시의 제목은 의미 차이가 크게 하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한편에는 ‘취한 노래’, ‘취한 자의 노래’,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명정의 노래’, ‘술 노래’, ‘취가’, ‘취한 자의 노래’, ‘취가’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밤에 돌아다니는 자들의 노래’, ‘밤에 산책하는 사람의 노래’, ‘밤 산책자의 노래’가 있다. 그 중간에 애매하게 ‘밤에 취한 노래’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짐작에는, 가장 유명하면서도 많이 읽힌 카우프만의 영어 번역본(1954년)에서 “The Drunken Song”이라고 번역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일단 차라투스트라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를 ‘술에 취함’과 관련짓는 건 얼토당토않다! 따라서 이 맥락으로 번역한 첫째 부류의 책들은, 좀 심하게 말하면, 버리는 편이 낫다. 극히 최근의 새 번역에서도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은 개탄할 일이다.

현재 콜리와 몬티나리의 고증판 전집에 따르면 이 시의 제목은 “Das Nachtwandler-Lied”이다. 그리고 “Nachtwandler”의 사전적 의미는 ‘몽유병자’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몽유병자의 노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이 절의 내용은 ‘몽유병’과도 전혀 상관없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힌트가 되는 구절은 2절의 마지막 문단이다. 이 문단은 아래와 같고, 전부 강조체로 되어 있다. "Kommt! Kommt! Kommt! Lasst uns jetzo wandeln! Es ist die Stunde: lasst uns in die Nacht wandeln!" 번역하자면 이렇다. “오라! 오라! 오라! 지금 산책하자. 때가 되었다. 밤으로 산책하자!” 여기서 동사 wandeln은 zielloses umhergehen,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소요(逍遙)하다’ 정도의 뜻이어서, ‘소요하다’로 옮겨도 되지만, 소리 내서 읽었을 때 이해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산책하다’로 옮기는 편이 낫다. 이 시의 내용은 3부의 끝에서 두 번째 시인 “또 다른 춤 노래”(Das andere Tanzlied)의 3절에 대한 해설이다. 여기서는 ‘한밤중(Mitternacht)’이 들려주는 소리를 경청하는 일이 핵심이며, 실제로 ‘영원회귀’와 ‘운명애’(또는 ‘필연적인 것에 대한 사랑’)가 ‘쾌감/기쁨/만족/희열(Lust)’을 매개로 증명되고 있는 니체 사상의 최고봉이다. 아무튼 제목은 “밤 산책자의 노래”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한글 번역에서 이를 적절하게 담고 있는 판본은 두 개다.

한글 번역에서 ‘신호, 징조, 징후, 조짐’이라고 옮긴 마지막 시의 제목은 “Das Zeichen”이며 영어로는 “The Sign”이다. 독일어 Zeichen은 이렇게 정의된다. “Ein Zeichen ist im weitesten Sinne etwas, das auf etwas anderes zeigt.”(가장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Zeichen은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는 어떤 것이다) 이를 우리는 ‘기호(記號)’라고 말한다. 시 속에서 Zeichen은 ‘사자’이며 그것은 ‘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등장한다. 즉 ‘사자’는 ‘아이’의 Zeichen이다. 본문을 직접 확인하자면, 우선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의 포효를 듣고 “Das Zeichen kommt”(기호가 왔다)이라고 말한 뒤, 여기에 “meine Kinder sind nahe, meine Kinder”(내 아이들이 가까이 있다, 내 아이들이)라는 ‘한 마디 말만(nur Ein Wort)’ 덧붙인다. 즉 사자를 보고 그것이 아이를 가리킨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Zeichen을 ‘징조’나 ‘조짐’보다 훨씬 더 강한 뜻으로 썼으며, 말하자면 ‘필연적인(nothwendig)’ 사태를 말하기 위해 썼다. 그리고 그것을 ‘기호’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훗날 들뢰즈가 주해하고 정의한 ‘기호(signe)’ 개념의 원천이 바로 이곳이다. 한글 번역본 중 이를 반영한 것은 없다.

새 번역이 필요한 이유이다.

★ 추가: 장희창이 옮긴 민음사 번역은 해당 시의 제목은 잘 옮겼지만(근데, 제목만이다!) 2절의 해당 구절은 이렇게 옮기고 있다. "자! 자! 자! 이제 떠나자! 때가 왔다. 밤 속으로 떠나자!" 이런 식이면 제목을 '밤으로 떠나는 자의 노래'라 했어야 맞았을 터. 어젯밤에 텍스트를 곁에 두지 않고 글을 적는 통에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장희창 번역은 나쁜 쪽에서부터 꼽을 때 상위권에 속한다. 내가 그 번역을 추천한 게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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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terodox님의 1월초에 무상임대 해주신 분들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게 ..

저는 초반은 아니고, HF20 다운데이트가 있을 때 armdown 철학자님한테 스파임대를 받았습니다. ㅎㅎㅎ 지금 글 쓰는 것도 그 덕입니다. ㅎㅎㅎ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번역서의 글이 난해할 때마다 이 번역 제대로 될걸까 의심병자 중 한명입니다.

펭귄클래식에서 번역한 책을 읽었는데... 야그에서 번역한 책을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한 출판사로 통일해서 읽기보다는 가장 잘 번역되었다고 평가받는 책을 찾아서 읽어야겠습니다.
잘 번역되었다고 생각되는 책을 이렇게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호라는 개념은 어렵군요. 그 차이를 다른 출판사들이 다 놓치고 있군요. 번역의 깊이가 중요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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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형아~! 고마웡~♥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디클릭 ♥ 사랑 함께 응원합니당~!
행복한 일욜 보내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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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가끔 번역기 사용하는데 불안불안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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