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밋에 글을 쓰는 모든 분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

in #kr6 years ago

빵굽는타자기.jpg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은 폴 오스터의 책이다. 압도적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확실히 모든 작가는 자기 체험을 얘기할 때 더 생생하고, 진실되고, 아름답다.

<빵 굽는 타자기>가 왜 재미있는고 하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책 뒤 쪽에 나오는 두 편의 희곡을 제시한다. 나는 이 희곡들을 한 번에 10페이지 씩 넘겨서 봤는데 그건 나에게 속독술이나 투시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겨 책을 뭉개버리고 싶을 정도로 두 희곡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폴 오스터 혐오자가 왜 또 다시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들어보라. 사실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환상의 책> 이후로 그와는 완전히 짜이찌엔, 굿 바이, 사요나라 해 버렸으니까. 도저히 그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얼마전 <그림과 문장들>이란 책을 읽으며 어마어마한 문장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기적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중략) 한쪽에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돈이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 다룰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p.146).

이 말은 우리 우주에 사는,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생물들을 위한 잠언이다. 이 말 하나만 가슴에 품고 살면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진리요 빛이요 바다를 집어 삼킨 캄캄한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등대의 가르침이다. 명심하라.

누구나 돈을 갖진 못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을 갖고 있다.

폴 오스터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에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결국 시간과 돈을 모두 잃고 말았다.

나는 너무 늦게서야 이 진리를 만났다. 돈은 애초에 없었으니 별로 원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많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일 초도 멈추지 않고 꼬박 꼬박 쌓이는 시간을 수십 년이나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담은 그릇은 밑 빠진 독이었고 시간은 빠진 밑을 따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시간은 헤어진 연인, 혹은 제 때에 뒤집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삼겹살과 같다. 떠나간 연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타버린 삼겹살을 먹는 건 자유지만 자유란 결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무적의 화폐가 아니란 걸 알아두시길. 어쩌면 그 놈의 자유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은 주인공 일지도 모른다. 자유는 쓰기는 쉽지만 길들이기란 죽을만큼 어려운 괴물이니까. 당신의 인생이 왜 이리 누추한지 알고 싶다면 이 괴물이 어디에서 뛰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혹시 그 곤궁한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으면 괴물을 가장 놓고 싶지 않은 곳에 데려다 놓으라. 그리하면 고통과 함께 원하는 것을 얻을지니.

1947년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1977년이 되서야 이 진리를 깨달았는데,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한참이나 어두운 통로를 헤매다 1978년에는 파경을 맞았고 1981년이나 1982년, 혹은 1983년 쯤에 겨우 겨우 한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리고 소설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2).

정말 소름끼치게도,

그 마지막 한 번의 노력이 나와 당신에게 폴 오스터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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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에 띈 책인 가장 빨리 부자 되는 법 이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거기도 시간과 일의 효율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거든요

시간이냐 일이냐. 같은 말 같은데 같지가 않은 게 묘하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폴오스터의 환상의책은 저에게도 환상적으로 지루했습니다, 문체가 저와 맞지않는듯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페이지가 넘어가질 않더군요, 빵굽는 타자기는 갑자기 읽어싶어졌습니다 ^^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할게요

빵굽는 타자기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입니다. 맹세.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꼭 한번 읽어보세요.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입니다.

오늘 아침에 유진님 글 중에서

"나는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저 당장의 (짧은) 행복감만을 원하는 일차원적인 게으름벵이여서 할 일을 미루는 것이다."

라는 문구를 봤는데, 하룻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글과 맥락을 같이하는거 같네요ㅎ
비겁한 제 자신, 지금 이 순간의 편안함에 지곤했던 제 자신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꺼에요!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님. 저는 퇴사 전문가입니다. 벌써 여덟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네요. 댓글과 완전히 딴소리지만, 최대한 많은 퇴사를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ㅋㅋ

편안함에 지는 삶이 꼭 나쁜 건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거 아닌가 싶고요. 하지만 뜻이 있다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고통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화이팅입니다.

나이 서른에 깨달은 폴 오스터는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뒤로도 재미없는 지루한 책을 계속 썼나요?
한때 치열함이 최고인줄 알고 살아가던 저는언젠가부터 시간을 줄줄 한쪽으로 흘리면서 살고 있어요. 시간단위로 하루 계획을 세우면서 살아도 마찬가지네요. 그래서인가 돈도 모아놓은게 없어요. ㅋ

다행히 폴 오스터의 책이 지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을 겁니다. 저는 엄청 절약하고 절약하고 살았는데도 모아 놓은 게 없습니다! 저축을 작년부터 시작했어요. 저는 계속 치열하게 살면서 돈벌레가 될 생각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머리를 치는 명언이네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문장이었습니다.

음...방금 님의 글을 읽고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뭐라 불러드릴지...데드피엑소사이어티?
일단 팔로버튼을 오랫만에 누르고 봅니다. 글이 꿈틀거리는군요.ㅎ

저는 데쏘님이라고 부릅니다 ㅎㅎㅎ

오! 굿굿!! 데쏘님도 찬성하실듯.^^

저는 Dead Pixel Society 입니다. 나중에 만들 게임 회사의 이름이에요. 도트 찍는 법과 Unity를 공부 중입니다. ㅋㅋ

좋아하는 작가는 아닌데 이런 글도 썼군요. 아~~~

저도 좋아하는 작가 진짜 아닌데, 이 책은 진정한 명저입니다.

와.. 정말 울림이 큰 문장이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처음으로 책상 앞에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든 문장이에요.

시간과 돈, 어느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는 가치이지만 둘 모두를 쫓다가 모두 놓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섬짓해집니다.. 어떤 위치에 와있는지 스스로의 점검이 필요한 때군요

저는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온갖 잡다한 일을 통해서요 ㅋㅋ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빵굽는 타자기.. 딱 맞는 부제 내요.. 얼마나 닥치는 대로 글을 썼으면 타자기에 열에 의해 빵이 굽힐까요?
아마 저는 이 책을 죽을 때 까지 읽을 일이 없을 겁니다.
왠지 그냥 실습니다. 책 내용이 제 삶과 비슷한거 같아서요

그래도 한번 읽어보세요 정말 재밌습니다. 우울한 분위기지만 우린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잖아요.

능력부족으로 만화로나 나와야 읽어 질것 같아요.. 아님 누가 읽어 주면 들어줄수는 잇을 것 같아요^^

좋은글입니다. 보팅과 리스팀할게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사고 싶은 책 목록에 더해야겠어요. 누구나 시간을 갖고 있지만, 읽을 책이 그에 비해 너무나 넘쳐나네요. 맛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책! 많이 읽은 사람들끼리 만나도 실제로 접점이 그렇게 크지 않은 걸 보면 정말 독서의 세계의 무한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는 쓰기는 쉽지만 길들이기란 죽을만큼 어려운 괴물이니까. ' 처음 듣는 정의입니다 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지만, 제가 이 '자유'를 길들이고 있는지 의문이 드네요 ㅠ 잘읽었습니다~

자유를 길들이는 건 평생의 과업이죠. 아직까지 이걸 완전히 정복한 사람은 없을거에요.

폴오스터!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라서 반가워서 클릭했습니다. 달의 궁전. 빵굽는 타자기. 단식광대. 허겁지겁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사실 내용은 기억이 안나요. 그냥 허겁지겁했던 그 당시 제 모습만 기억에 남는군요..

엄청 지루한 작간데, 간혹 태양처럼 빛나는 작품을 내놓곤 하죠.

"빵 굽는 타자기" 작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주네요. 일단 다르기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책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제목을 잘 지어야 할 이유죠!

네 맞습니다. 제목은 정말 중요해요. 하지만 구린 제목의 책에서 어마어마한 내용을 만났을 때 맞는 쾌감도 대단하죠.

허허.. 무시무시하군요

시무시무하죠. 돈오점수!

보팅합니다.^^
팔로잉두요..ㅎ
저도 책소개글 하나올렸는데
시간되시면 읽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아아 무거운 말이네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 이 모두가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는데 말이죠. 삶이라는 틀에서 말입니다... 빵굽는 타자기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후루룩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입니다. 뒤에 수록된 희곡은 읽으실 필요 없어요.

앞서 살았던 수 많은 현인들이 먼저 앞서 걷고 그 발자국을 따라 그와 같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한발씩 따라 걷는 모습이 생각되네요
아무리 세대가 바뀌어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같은 말이네요
글 잘보고 갑니다

우리는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죠.

@deadpxsociety 님의 글 중에서 가장 뇌리를 친 글이 아닐까 싶네요

시간과 자유라는 괴물

내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줄 착각하지만 실상 나를 궁지로 몰아넣을수도 있는 괴물

앞으로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ㅋ 더 많이 뇌리를 치기 위해!

오, 아주 강렬하군요!!

매우 강렬하지요!

👨 저는 시간에 약간 집착하는데요. 일하는 시간, 돈버는 시간이 아니라
오롯이 제가 쉬고 노는시간에 집착이 심합니다. ㅋㅋㅋ
가만히 누워서 천장보고 숨만 쉬어도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면
행복하거든요. 그래서 가난한가...그냥 돈이 없을뿐 ㅎㅎㅎ

제가 아는 사람과 비슷하네요. 꿈과 취미와 특기가 딩굴딩굴입니다. 저도 주말은 내내 딩굴딩굴이에요. 에너지는 온전히 평일에만 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