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 안누시아성녀 - 독립전쟁의 목격자

in #kr6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스팀잇 초보입니다. 가끔씩 메모해뒀던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세례명 누시아) 여사의 생애를 소설 형식으로 몇 차례로 나눠 올립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입니다.

글머리에
광복 60년이던 2005년 11월. 평화사절단(단장 송기인 신부)을 따라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일본 후쿠오카~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강점기 전후로 이주한 한인 후손들을 만났다. 생존 독립지사 정덕수 김병길 박정오 선생과 중·일·러 3개국에서 초청된 어린이 6명도 동행했다. 해외 이주 1세대의 손자와 손자의 손자들은 우리의 말과 역사를 힘겹게 지키고 있었다. 한편으론 우리의 말과 역사를 시나브로 잊어가고 있었다.

그해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 여사가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다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 부산 남구 천주교 묘지의 무덤도 확인했다. 당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는 안성녀가 없었다. 각종 독립운동 사료에도 안성녀라는 세 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해 아흔을 넘긴 안 여사의 며느리 오항선(1910~2006) 지사만이 시어머니의 항일투쟁을 기억하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2018년 여름, 광복절을 앞두고 안성녀 여사의 손자 권혁우 선생을 다시 만났다. 오항선 여사는 글쓴이가 만난 이듬해인 2006년 서거했다.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안성녀의 발자취는 여전히 복원된 게 없었다. 안성녀는 여전히 역사의 변방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역사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선조들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 투쟁에서 빛났던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피를 토하여 광복을 위해 흙먼지에 피와 눈물을 뿌렸던 그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돌아간 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다.

일러두기

  1. 이 글은 온전히 소설이다. 안성녀의 70평생 가운데 그의 삶의 궤적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거의 없다. 글쓴이가 지어낸 대목과 역사적 사실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

  2. 안성녀의 삶은 대체로 며느리 오항선(1910~2006) 여사가 생전 구술한 독립운동 증언집(국가보훈처 홈페이지)과 오 여사가 2005년 국제신문과 가진 인터뷰 내용에 바탕한 것이다. 중국에 사는 안성녀 여사의 외손녀가 국내 후손들에게 보낸 편지와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안성녀에 대한 글(2005년 안성녀 공적서)도 참고했다. 안성녀의 남편 권승복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뢰순감옥에서 사망한 1910년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 1980년 부산에서 사망했다.

  3. 안성녀가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의 현장에 있었다는 대목은 글쓴이가 지어낸 것이다. 남편 권승복의 행적과 아들 권헌의 일제 강점기 시절 행적 역시 사료에 남아있지 않아 글쓴이의 상상력에 의존했다.

  4. 이 글이 안성녀 여사의 생애를 복원하는 씨앗이라도 되길 바란다.

2005년 7월. 뱀 또아리를 튼 백양산 중턱 골목길에 바람이 갇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텁텁한 열기가 가로등 불빛에 정체를 드러낸다. 하늘과 맞닿은 동네를 오르느라 자동차들의 굉음이 유난히 크다. 담배 한모금 깊게 들이킨 이 기자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낸다.
“배 기자. 오늘은 눈물 두 바가지 안 흘렸어?”
“말도 마이소. 이게 나라가 맞는지. 진짜 울화통이 터질 뻔 했다 아입니꺼.”
맞다. 이게 정상적인 나라일리 없지. 방 할머니를 만났을 때도 그런 생각을 수 십 번 했다.
“신문사에서 여 뭔데까지 우짜 왔노.”
“독립운동가 후손들 취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좀 들어도 되겠습니까?”
방 할머니의 남편은 1931년 대구에서 일본군을 실어 나르는 열차에 폭탄을 던져 전복시키려다 붙잡혀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애 아부지가 풀려났을 때 몸뚱이가 성한 곳이 없더라. 얼마나 맞았는지. 해방되니까 친일파들이 득세하데. 그 꼴 보기 싫다고 죽을 때가지 말을 안하더라. 얼마나 기가 찼으면….”
남편이 남긴 재산은 없었다. 독립유공자의 가족'이라는 자부심만으로는 가난을 해결할 수 없었다. 먹고 살기 빠듯해 방 할머니의 4남매 가운데 두 딸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장남은 중학교 2학년 때 가출해 전국을 유랑하다 폐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여기 아파트로는 언제 왔어요?.”
“경북 청도에 살다가 전쟁 통에 피란왔다. 온천장 하천에 움막 짓고 살면서 니아까 행상으로 먹고 살았지. 1993년에 나라에서 영구임대주택에 자리 났다고 하데. 애 아부지 덕 아이가.”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이 기자는 방 할머니의 사연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독립지사 미망인과 서른 넘은 장애인 아들이 10평 남짓 아파트에서 동거. 소득은 보훈연금 월 91만 원. 두 딸은 초등학교 졸업 전 돈 벌러 나섬. 장남은 가출했다가 폐병으로 요절. 유족들은 정부를 원망하지 않음.’

“빨리 마감하고 술이나 빨까?”
광복 60주년 기획 취재에 나선 게 5월이다. 독립지사와 그 유족 200명을 인터뷰하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주신’인 신 선배가 목이나 축이자며 가방을 챙긴다. 오늘도 새벽별을 볼 것 같다. 안주도 나오기 전에 폭탄주를 말던 배 기자가 열을 낸다.
“연좌제라는 게 북한에만 있는 줄 알았더만 우리나라에도 있었답니다. 해방이 되도 떵떵거리던 친일파들이 정부와 경찰 조직을 장악해 독립지사 가족들을 감시했다 안합니까. 취직도 막고, 그러니 못 배우고, 또 가난하고.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 한더만 진짠기라요.”
“우리가 만난 1세대 독립지사와 유족 중 혼자 사는 비율이 12%나 되더라. 아들이나 손자들 생활이 어려워 할아버지를 몬 모시는기라.”
신 선배도 한마디 보탠다. 임시정부의 자금줄이던 백산 안희제 선생 후손들도 고초를 겪었다.
“안 선생 장남 안상록도 좌익으로 몰려 사회생활을 아예 못했어요. 안상록 선생 자녀 7남매 가운데 장남만 대학 갔답니다. 이승만 정권이 김구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선생과 각별했던 백산 선생의 유족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기 때문인거 같아요.”
안상록 선생은 부친의 유지를 떠받들어 김구 선생을 보좌했다. 1948년 김일성과의 남북회담 때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을 찾었다. 안희제 선생이 국립묘지 대신 고향인 경남 의령의 선산에 묻힌 것도 친일파 때문이라고 했다. 몇몇 친일파들은 한국전쟁의 혼란한 시기를 틈 타 독립운동을 했다고 과거를 세탁했다. 그들 대다수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안희제 선생의 후손들은 국립묘지 이장을 거부했다.
“하기사, 어떻게 안희제 선생을 매국노들과 한 공간에 모실 수 있겠노.”
이 기자가 입맛을 다시자 배 기자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오늘 독립지사 오항선 할머니를 인터뷰 하다가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이 안성녀라고 합디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왔다가 1954년 영도에서 사망했답니다. 오 할머니는 90이 넘었는데, 안성녀의 며느리라고 합니다.”
술자리는 그걸로 파했다. 편집국으로 돌아와 안 의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남동생은 정근과 공근. 안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안성녀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안성녀는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일본 경찰이 1909년 11월 5일 안정근을 심문한 조서였다. 정근은 ‘아버지는 태훈, 어머니는 조 씨, 중근·정근·공근의 3형제이다. 이밖에 누님 한 분이 있었는데 황해도 진남포의 권승복에게로 출가했다(父ハ泰勳 母ハ趙氏 重根·定根·恭根ノ三人兄弟ナリ外ニ姉一人アリテ鎭南浦ノ權承福ニ嫁シ目下同居セリ)고 진술했다.
“정근·공근 형제도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했다 아이가. 그런데 안성녀의 생애는 알려진 게 전혀 없네. 배 기자, 내일 당장 같이 가보자.”

부산 남구 대연동 대연우체국을 지나자 작은 빌라가 보였다. 오항선 할머니의 아들, 안성녀의 손자 권혁우가 빌라 입구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미 배 기자와 안면을 튼 권 선생은 이 기자에게 ‘기자가 두 명이나 왔나. 내 나이 60에 신문에 나겠네’라며 눙을 쳤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 할머니가 안방에 누워 있었다.
“우리 어무입니다. 안성녀 여사의 며느리 오항선.”
권혁우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누군가의 장례식 사진이다. 여자 다섯과 남자 다섯이 영정 사진을 가운데 두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두 사내와 콧수염을 기른 사내도 보였다.
“안중근 의사의 차남 준생의 장례식 사진이라카네. 피란 왔다가 부산에서 돌아가셨거든. 어무이, 설명 좀 해주이소.”
아들의 재촉에 오 여사가 마른 손가락으로 소복 입은 한 여자를 짚었다.
“우리 어무입니다. 야들 할머니. 이 짝이 권기옥 언니, 이정서, 정옥녀. 오른 짝이 안웅호, 안춘생, 손원일, 한 사람은 누군지 기억이 안나고, 그 옆에 콧수염 기른 이가 내 바깥사람입니다. 이름은 권헌.”
전율이 흘렀다. 권기옥이라니.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이 준생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니.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장면이었다. 안정근의 부인 이정서, 안준생의 아내 정옥녀와 그 아들 웅호를 한 사진에서 보다니. 무엇보다 믿을 수 없었던 건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과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빈소를 찾았다는 것이다. 사진이 찍힌 날짜는 1952년 11월 부산 중앙성당. 안준생의 사망연도와 일치했다. 배 기자가 녹음기를 꺼냈다.
“할무이. 안성녀 여사님 이야기 좀 해 주이소.“
“우리 어매? 참 이뻤어요. 배차(배추) 잎 뜯어먹고 살면서도 그래 예뻤어요.”
“안성녀 여사님도 독립운동을 했습니까.”
“그때 조선사람은 다 했어요. 앞잽이를 빼고. 아부지가 싸우면 아들 딸도 같이 싸웠어요. 나도 아부지 심부름 많이 했거든. 독립군한테 문서 가져다 주고 총 같다주고. 그러다가 어무니를 만났어요. 내보고 자꾸 시집 오라고 청혼 넣대. 나는 그때 한 번 결혼했었거든요. 남편이 왜놈들한테 총 맞아 죽었어요. 안중근 가문이면 맘 편히 독립운동 하겠다 싶어 또 시집갔어요.”

  1. 제국의 시대
    제국은 어둠이 빛을 가리듯 무엇이든 집어삼켰다. 저벅저벅 이방인의 발자국 소리가 여명을 깨고 사리문을 두드릴 때, 나는 새악시처럼 문고리잡고 가슴만 조릴뿐이었다.
    흙을 파던 괭이와 낫으로는 제국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조선 왕은 무기력했다. 오라비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자 순종은 놀라 까무러쳤다. 왕실은 오라비를 사직을 위태롭게 한 광자(狂者)로 취급했다.
    순종은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실의 후예들이 고난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일본 천황이 조선 왕실을 폐지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순종은 이토의 시신에 참배하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다롄에 보냈다. 왕 자리를 보전하려면 일본에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선왕제 고종은 자신이 내린 ‘거병(擧兵) 밀지’가 통감부 손에 들어갈까봐 노심초사했다. 고종은 밀지에 고무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왕실의 보존이었다.
    나는 약탈의 시대에 살았다. 전쟁은 한 국가가 총동원된 약탈의 역사다. 예수나, 천주나, 천황을 믿는 문명국 정치인들이 약탈에 앞장섰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이 다른 나라를 수탈하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자와 독재자,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 그들이 신봉하는 이념 때문에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선 안 된다고 믿지 않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만주는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전쟁터였다. 시베리아 철도와 이어지는 동청철도 운영권은 그들에게 가장 큰 먹잇감이었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동청철도 운영권을 담판 짓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간도와 연해주에 정착한 독립군과 한인들을, 열강들은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 버렸다. 조선과 조선 민족은 그들에게 사냥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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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되는 글입니다. 팔로우해서 구독할게요. 자주 올려주세요 :)

감사합니다. 저도 처음 쓰는 글이라 정신이 없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