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2)] 안누시아성녀 - 독립전쟁의 목격자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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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무용지물(無用之物)은 없다

남편은 중근 오라비와 황해도 신천에서 함께 자란 동무다. 둘은 산으로 들로 잘도 어울려 다니다 기분이 맞으면 밤새 취했다. 술기운에 용기를 얻은 승복은 오라비와 한 방에서 코를 골고 자다 여명이 밝을 때쯤 슬며시 일어나 내 방문에 작은 돌을 던졌다.
“누시아, 넌 내 사람이다. 딴 맘 품지 말라.”
황해를 건너온 바람은 늘 황해도 신천 청계동의 천봉산 망대산 청계선 중턱에 비를 뿌렸다.
중근은 뿌연 안개에 숨어 노루를 기다렸다. 화포총이 불을 뿜는 날이면 청계동에선 잔치가 열렸다. 취한 산포군(山砲軍)들의 무등에 업힌 오라비는 “초패왕 항우가 장부라면 나 또한 장부 아닌가”라며 놀았다.
승복은 말이 적었으나 사람 살리는 재주는 있었다. 하루는 중근이 화승총에 박힌 불발탄을 빼내려고 총구에 쇠꼬챙이를 넣어 쑤시다가 화약을 건드렸다. 승복은 산중턱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중근을 업고 마을까지 내달렸다. 집에 머물던 산포수들이 피가 철철 흐르는 팔에 물을 붓고 파편을 빼내자 혼례 치른 지 얼마 안된 올케 언니 김아려가 혼절했다.
-제수, 나 때문에 과부 안된 줄 아시오.
눈치 없는 승복의 눙에 아네스는 눈을 흘겼다.
-제발 남편 좀 말려주시오. 나가기만 하면 사고를 치니, 애간장이 다 녹겠소.
아버지 안 진사는 그때도 혀만 찰 뿐 오라비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라비는 혼례 전 벗들과 어울려 말을 타길 즐겼다. 마음이 맞다면 당장 의형제를 맺고 몇날 몇일을 놀았다. 그 옆에는 항상 승복이 있었다.
-중근이 한번은 기생들에게 큰소리쳤어요. 너희가 자색을 갖추었으니 호걸남자와 혼인한다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답겠느냐?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돈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고 정신을 잃어서 염치를 돌보지 않는구나. 오늘은 장 씨, 내일은 이 씨를 상대로 맞아들이나와 혼인하지 않았다면 양반집 자제로 편히 살았을 그다. 니 금수와 같은 행동이 아니겠느냐 하고. 맞는 말이지만 기생집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오.

청계동은 요새였다. 백두에서 뻗은 산맥이 파도처럼 동네를 감싸 안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개화파에 몸 담은 아버지는 해주를 떠나 청계동으로 몸을 숨겼다. 300석을 추수하는 논밭은 넉넉한 인심을 풀어놨다. 아이들은 맷둥 뗏잔등에서 깨벗고 놀다 배암 잡으러 방죽을 헤집고 다녔다. 20명이 넘는 포수 식객들은 늘 오라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취해 잠들었다.
갑오년에 오라비의 총구는 노루가 아니라 사람을 겨눴다. 고부민란으로 봉기한 동학군이 임금을 불안하게 했다. 황해도 접주 원용일은 해주 감영과 옹진 수영(水營)까지 들이닥쳤다. 양반들은 사병을 일으켜 동학군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려 했다.
아버지 안 진사도 군사를 모았다. 포군과 장정 200여 명을 모아 봉우리마다 망을 세웠다. 원용일은 어느새 청계동에서 10리 떨어진 박석골까지 들이닥쳤다. 관군은 쟁기를 들고 죽기살기로 덤비는 동학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청이 간섭하자 일본군도 신식 무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 동학군은 근거지를 찾아야 했다. 청계동은 족히 수 년은 항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중근아. 우리는 200이고 동비(東匪)는 1000이 넘는다. 야밤을 틈 타 기습하는 수밖에 없다.”
안 진사는 박석골로 포군 40여 명을 보냈다. 중근은 정찰조에 편성됐다. 새 언니가 화승총을 매고 나서는 오라비와 승복의 뒤꽁무니를 야속하게 바라봤다.
“내 큰 전공을 세우고 오겠소.”
열 여섯 오라비는 고집이 세고 배짱이 두둑했다. 아버지의 명령을 듣지 않은 적도 많았다. 두 살 터울의 나를 이제 아홉 살도 안된 남동생 정근과 공근 다루 듯 했다.
“오라버니. 동학군 하는 말이 틀리지 않소.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린 그들 사연도 애닳지 않소. 부디 피 흘리지 마시오.”
“황해도 감사의 거병 요구가 있었다.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가문은 역적이 된다. 내가 올 때까지 언니를 지켜주거라.”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나선 오라비와 승복은 다음날 새벽 살아왔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은 미처 잠이 덜 깬 새벽녘 포수들의 탄환 세례에 혼비백산하다가 오라비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뒤늦게 반격했다.
“후발대가 제 시간에 도착했으니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수레에 나와 중근이 시체가 실렸을게야.”
승복의 무용담에 새 언니는 도 까무라쳤다. 오라비는 동학군이 해주 감영을 습격했을 때 탈취한 군량미 1000포대를 빼앗아왔다.
오라비가 생환하자 아버지는 ‘아기 접주’라 불리던 해주 사람 김창수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가 바로 훗날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김구 선생이다.
“동학군이 청계동을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동학군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안 진사께서 말씀하시었소. 지난 일은 잊고 평화조약을 맺는 게 어떻소.”
김창수는 해주성 공략에 나섰다가 일본군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우리는 동포요. 언젠가 안 진사를 뵙고 싶다고 전해주시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2월 김창수가 청계동으로 왔다. 그는 훗날 이름을 김구로 바꿨다. 아버지는 포수 30명을 해주 텃골로 보내 은신 중이던 김창수의 부모를 모셔왔다. 내 어머니 조성녀(趙性女)와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이때 처음 만났다. 두 분은 훗날 상해에서 재회한다. 김창수의 불같은 성격은 오라비를 보는 것 같았다.
김창수가 청계동으로 온 지 몇 개월 뒤인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졌다. 김창수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치자고 했다. 안 진사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했다. 김창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밤마다 그는, 오라비가 낮에 오르던 그 산에 올라 가슴을 쳤다. 어둠 너머에 있는 적이 빠르게 움직일 때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날개를 펴지 못했다. 말이 드물던 그는 내가 곽낙원 여사의 거처를 돌볼 때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네 모친이 자신의 이름을 네게 물려주셨구나. 조 씨 성의 여자와 안 씨 성의 여자. 어머니가 넉넉하니 너 또한 못지 않으리.”
“어디로 갈 것이오.”
그는 거병이 무산되자 청계동을 떠날 채비를 했다.
“더 이상 식충이 노릇은 못하겠네. 내 두 발로 서 있어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두 손이 있어도 아무 것도 도모하지 못하는 신세지 않나.”
“당치 않습니다. 저 나무들 보세요. 곧게 자란 놈들은 잘려 나가 목재가 되고 굽은 나무는 선산을 지킵니다. 세상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없는 법. 어디를 가시든 바퀴벌레처럼 열 발 디디고 있으면 뜻을 펼칠 시간이 올겁니다.”
나는 김창수에게 아버지를 변명했다.
“안 진사는 6형제 중 셋째지만 가장 역할을 하고 있소. 부양해야 할 식솔이 많아 경거망동할 수 없소. 우리 가문을 용렬하다고 비난치 마오”
“비난이라니…. 다만 양반이나 권세가들이 일본을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네. 임진년 때보다 더 강해졌으니 조선을 삼키는 건 시간 문제 아닌가. 나라 잃은 백성이 되고 싶지 않거든 안 진사나 중근이나 청계동을 벗어나 총을 들어야 할 터인데.”
김창수는 데면데면하던 중근 오라비의 마중을 받으며 청계동을 떠났다.

중근 오빠가 빼앗아온 동학군 군량미는 청계동의 불씨였다. 세도가 민 씨 일족이 사람을 보내 쌀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절반은 탁지부대신 어윤중의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전 선혜청당상 민영준이 수확한 것이니 지체 없이 돌려주시오.”
“병을 일으켜 동비를 토벌했더니 지금 토사구팽하는 것이오?“
민영준이 보낸 사람은 면박만 받고 돌아갔다. 그러자 민영준은 ‘황해도 사는 안태훈이 사병 수천을 거느리는 것은 음모를 꾸미기 위함이니 즉시 군대를 보내 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급히 상경한 아버지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천주교 종현성당(명동성당)에 숨어 들어 프랑스 신부에게 몸을 의탁했다. 자신의 구명과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세력을 넓히던 천주교가 필요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김창수가 말한 망국의 서막을 보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됐다. 몇 개월 뒤 중근 오라비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다
“김창수가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명성황후의 복수를 한다며 한 일본인을 때려죽여 옥에 갇혔습니다.”
1896년 10월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문회의를 소집했다. 가문이 살 길은 손에는 ‘교리문답’이 들려있었다. 아버지는 이듬해 1월 황해도 안악군 마렴본당의 프랑스인 홍 신부를 청계동으로 초청해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어머니는 마리아, 중근은 토마스, 정근은 시실로, 공근은 요한, 새 언니는 아네스, 나는 누시아였다. 홍 신부는 그해 4월 청계동성당에 부임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