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3)] 안누시아성녀 - 독립전쟁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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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도를 잃다
원래부터 길이 있었던 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 만주로, 연해주로 누군가 걷고 또 걸어 길이 됐다. 만주와 하얼빈은 같은 장소라도 다른 계절에 가면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가 달랐다. 땅은 같은데 땅 주인도 시시각각 변했다. 제국의 시대였다.
안 씨 가문이 황해도를 뜬 건 오라비가 천주의 품으로 간 지 두 달도 안 된 1910년 5월이다. 식솔들은 북간도를 거쳐 오라비가 단지동맹을 했던 러시아령 연해주 연추(크라스키노)로 망명길에 올랐다. 연추는 두만강에서 150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아 의병의 본거지였다. 최재형 최봉준 선생이 만든 ‘안중근 유족 구제회’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
“안 의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는 살아있으니 모친 뵐 면목이 없소.”
“내 아이가 떳떳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오히려 고맙습니다.”
오십을 넘긴 대동공보 사장 최재형과 주필 이강이 허리를 굽히자 어머니도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안 의사와 두 번의 인연이 있습니다. 한 번은 1908년 경흥·회령 국내진공작전 때 무기와 의복을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하얼빈 의거 때 제 집에서 사격연습을 했습니다. 제가 창창한 청년을 저승으로 내몰았습니다.”
최재형이 아네스 언니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오라비 의거를 막후에서 도운 이를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이강은 연추에 머물던 오라비에게 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정보를 알려준 장본인이다. 1908년 최재형의 후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대동공보는 4만 명을 넘어선 연해주 교민뿐 아니라 시베리아 상하이 하와이까지 몰래 발송됐다. 통감부는 국내로 몰래 반입된 대동공보를 모두 몰수했다. 최재형은 러시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대동공보의 초대 발행인으로 러시아 퇴역장성이자 변호사인 미하일로프를 영입했다. 미하일로프는 훗날 도마 오라비의 변호를 자처했으나 일본의 거부로 재판정에 서지 못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과의 마찰을 극도로 피했던 러시아가 대공보사를 강제 폐간한 건 당연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을 듯 합니다.”
정근의 채근에 최재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가 어릴 때, 집 밖에 나왔다 러시아 선장의 눈에 띄어 6년간 배를 탄 적이 있소. 가난한 나라는 죄다 열강의 먹잇감이었어요. 돈을 좀 모아 연해주에 정착해 이리저리 일을 도모하고 있으나 능력이 부족해 제대로 이룬 성과가 없어 부끄럽습니다. 형제분들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면 러시아어를 배워두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최재형은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오라비보다는 21살이 많았다. 최재형이 아홉 살 때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연해주로 도망쳤다. 망국 직전의 조선은, 백성이 고향을 등져야 할 만큼 살기 힘들었다. 기근보다 더 무서운 탐관오리의 학정에 평민도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강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오라비가 가족들의 안위를 부탁했던 그다.
“연해주도, 만주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철도 운영권을 놓고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전쟁터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소서.”
최재형은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올랐다가 1920년 4월 한인촌 참변 때 일본군에 처형당했다. 최재형은 자신이 죽기 하루 전 가족들에게 “일본이 너희들에게 나를 배반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나는 죽어도 될 나이다. 너희는 살아야 한다. 부디 나를 배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강의 말대로 일본 밀정들은 늘 우리의 주위를 맴돌았다. 김정국이라 불리는 사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어머니와 내가 빨래를 할 때나, 우리 가문의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장구를 칠 때, 밥을 먹을 때, 정근과 공근이 외출할 때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러일전쟁 패전국 러시아는 일본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오라비의 의거에 내심 통쾌해하면서도 안중근 가족으로 인해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빚는 걸 원치 않았다. 러시아 관헌들은 ‘이등박문이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러 하얼빈에 왔다가 변을 당했다’고 변명했다. 우리는 새 터전을 찾아야 했다.
안창호 선생은 만주 목릉으로 가자고 했다. 안창호는 도마 오라비와 여러 번 인연을 맺은 사이다. 1907년 봄 도마는 서북학회의 전신인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해 안병찬 김달하 박은식 이갑 안창호와 교류했다.
두 번째 인연은 일제는 망명하기 한 달 전인 1907년 7월이었다. 당시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다. 또 순종을 윽박질러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그러자 8월1일 제1대대장 박승환이 군대 해산에 반대해 자결했다. 분개한 장병들이 일본군 제51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경성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오라비는 불원천리 달려가 제중원에 머물며 부상자들을 후송했다. 당시 안창호도 그곳에 있었다. 일본의 무력에 무너지는 우리 군을 본 오라비는 계몽운동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망명길에 올랐다.
세 번째 인연은 대동공보다. 1902년 미국으로 이민한 이강은 안창호를 만나 1905년 공립협회에 가입하고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했다. 대동공보와 공립협회의 목적은 다르지 않았다.
20여 명이던 우리 가문은 1911년 4월 연추를 떠나 중러 접경지인 동청철도 동부선상의 만주 지린성 목릉현 팔면통에 정착했다. 서북출신 이주 집단촌인 데다 드넓은 평야 탓에 농사를 짓기 알맞았다. 무엇보다 러시아령 조계지(租界地)여서 일제의 직접적인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정근과 공근은 목릉에 정착하자마자 러시아 귀화 신청을 했다. 정근은 제정러시아 군대에 입대해 보병으로 근무했다. 러시아 국적 취득은 최재형의 뜻이기도 했다.
그해 여름. 우리 가문에 크나큰 변고가 닥쳤다. 오라비의 장남 분도가 죽었다. 도마 오라비 의거 때 통역을 했던 유동하의 동생 동선이 안부 인사를 왔을 때다. 목릉강변에서 가재잡이를 하고 자맥질을 하던 분도가 배를 끌어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 엄나, 아이고 배야.
올케 언니가 거품을 물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분도를 흔들었다.
-얘야, 어찌된 일이냐. 낮에 멀쩡하다가 왜 이리 되었니.
-웬 조선 사람이 낚시질을 하며 과자를 주길래 먹었는데 배가 너무 아파요.
내가 기별을 듣고 도착했을 때 분도는 이미 숨이 끊긴 상태였다. 일본 밀정이 안 씨 가문의 대를 끊기 위해 독이 든 과자를 줬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연추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김정국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도가 죽은 해 일제는 목멱산(남산)에 조선신사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신과 일본왕을 모시는 사당을 경성 한복판에 짓겠다는 걸 조정 대신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친일신문들은 ‘일본이 열강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했다. 이제 조선을 문명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두 나라를 합쳤다’는 이완용의 말을 그대로 실었다.
목릉에서 나와 남편이 재봉틀로 옷을 만들 때면 계선과 봉선이 헌을 업고 다녔다.
-멀리 가선 안된다. 모르는 사람 보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줄행랑치거라.
분도가 죽자 어머니는 아이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장손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했다.
-내, 저승가서 도마를 어찌 볼까. 도마가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군복은 야밤에 수레에 실어 운반했다. 겨울에는 중러 국경을 흐르는 수분하(綏芬河)나 송화강이 얼어붙는 바람에 수레를 되돌려 오기도 했다. 만주의 추위는 그만큼 독했다. 우리의 군복이 늦으면 독립군의 수염에는 고드름이 더 길게 앉았다. 산골짜기에 숨어 일본과 싸우는 독립군에게 의복은 밥만큼 중요했다.정근은 장사 수완이 있었다. 잡화점 점포를 냈는데 그럭저럭 생계를 꾸릴 만 했다. 올케인 정근의 내자 이정서의 도움이 컸다. 이정서의 부모는 황해도 신천군의 만석지기 갑부였다. 정근의 장모 왕재덕(王在德)은 인편을 통해 사위에게 거금을 보내왔다. 올케가 몰해 귀국해 허리춤에 거금을 갖고 오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도 어머니를 뵈러 많이 찾았다. 만주로 망명하거나 연해주로 가는 길에 꼭 들렀다. 목릉에서 한달간 머물렀던 춘원 이광수는 독립신문에 우리 집의 풍경을 소개하기도 했다.

목릉에 정착한 이듬해 겨울, 이갑 선생이 이웃으로 왔다. 시베리아에서 몹쓸 괴질에 걸린 그는 안창호의 도움으로 미국에 치료받으러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하고 다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그는 반신불수 상태였다. 한인 동포들이 우리에게 이갑을 돌봐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수시로 그의 의식과 건강을 챙겼다. 군인 출신인 그는 몸은 망가져도 눈은 총명했다. 달 밝은 날이면 승복과 나는 이갑과 저녁을 함께 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갑은 마루에 누워 별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이갑 선생께서 열 한 살에 과거에 급제했단 소리가 진짜요?”
도마 오라비보다 두 살 많은 이갑은 평안남도 숙천 사람이다. 11살 대 나이를 15살이라고 속여 식년진사에 급제했을 만큼 영민했다. 이갑 가문의 영화는 구한말 민 씨 일족으로 세도가였던 민영휘가 평안감사로 부임하면서 부서졌다. 이갑이 나이를 속여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유를 들어 땅 20만 평을 빼앗았다. 이갑의 부친은 홧병으로 죽었다.
“내 부친이 죽고 독립협회에 가담했다가 유학길에 올랐소. 그때는 정신이 깨지 못해 일본이 조선 근화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다오. 미친 게지.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령(參領)으로 보임한 1906년 안 의사와 인연을 맺었답니다. 서북학회와 신민회에서 활동했소. 그때 안 의사는 참 혈기가 방자했소. 거칠 게 없었지. 이듬해 일본이 선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걸 보고 내 크게 깨달았소. 내가 침략자 일본을 위해 총을 들었구나…. 지금도 안 의사 볼 면목이 없소.”
“도마 오라비 때문에 옥고를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일제가 신민회 인사들을 배후인물로 지목하고 모조리 헌병대로 끌고 가더이다. 3개월 만에 풀려난 나는 신민회 간부들과 만주로 망명을 했소.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이회영 이시영 최석하 선생과 내가 만주와 미국 러시아에서 독립군 기지 개척 사업을 맡기로 의기투합했소.”
“과연 국권을 되찾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일본의 세력이 나날이 커져만 가니 걱정이 큽니다.”
승복은 자신에게 묻고 싶은 말을 이갑에게 했다.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신념이 필요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하나는 국외에서 한인촌을 건설하는 겁니다. 독립군의 하부 토대가 바로 우리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연해주뿐 아니라 북만주 길림성 밀산(密山)에서도 토지를 매입해 개척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다른 하나는 학교와 무관양성소 설치입니다. 이미 신한촌은 한인 자치, 꼬뮌 단계까지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일본에 유학을 간 건 독립운동 때문이 아니라 민 씨 가문에 빼앗긴 가문의 땅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천만 동포가 조선을 내 땅, 양반의 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주권을 찾게 되리라 믿소.”
1913년 국내에 있던 이갑 선생의 부인과 딸이 압록강을 넘어 이갑과 상봉했다. 그해 러시아 한인 동포사회는 이갑을 위한 의연금 모집 발기회를 결성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에 나섰다.
“세상에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은 나라의 지사며 제일 귀중한 것은 지사의 생명이라. 이러므로 그 나라의 지사는 한번 나면 국민이 다 숭배하고 사랑하며 그 지사의 생명이 위태한데 이르면 국민이 다 보호하고 구호하나니 슬프다. 사랑하는 동포여, 나라를 건설할 지사로 하여금 죽음이 가한가 삶이 가한가. 재정을 모아 유감없이 치료하는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니 여러 동포들은 의연금을 속히 거두어 보내심을 천만 바라나이다.”

1914년 서방에서 분 전쟁 바람은 만주까지 덮쳤다. 아시아로 침탈의 발톱을 세우던 영국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가 충돌하는 사이 일본은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요동지방 다롄에서 장춘을 넘어 하얼빈·목릉까지 공공연히 군대를 보내 동청철도에 대한 장악력을 과시했다. 이제는 밀정이 아니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헌병들이 대놓고 가택수색을 했다. 그들은 ‘멀리서 조선의 불령선인들이 너희 가족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내는 걸 알고 있다. 조선인 세력의 중심인 점을 잘 알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해 두 동생이 처음으로 손에 피를 묻혔다. 이삿짐을 싸두라고 말하고 집을 나선 정근과 공근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밀정 김정국을 처단했소, 누이. 분도의 원수를 갚았으니 어서 뜹시다.
달이 먹구름에 가린 그날 밤 이갑 선생과 안 씨 가문의 20여 식솔은 급히 연해주의 소왕령(蘇王營·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으로 피신했다. 자던 아이들은 수레에 오르자 신이 나 떠들었다.
소왕령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같았다. 러시아는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 동맹국인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사실상 금지했다. 권업회가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도령(正都領)과 부도령으로 선출하자 탄압은 거세졌다. 권업회가 발행하던 ‘권업신문’을 정간하고 독립운동가를 감금했다.
러시아와 일제를 피해 상해와 북경에서 활동하던 이상설은 1916년 중병에 걸려 니콜리스크에서 요양했다. 한인 동포들은 이상설의 문장을 인쇄해 그의 집 앞에 걸고 쾌유를 빌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이 문안 갔을 때 이상설은 생의 심지가 거의 탔음을 아는 듯 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 감으면 도마도 땅을 칠게요. 부디 일어나세요.
어머니 조마리아의 애원에 이상설은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나는 오라비의 스승이 이상설임을 안병찬 변호사로부터 들었다. 안병찬은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 여순감옥까지 불원천리를 뛰어갔던 지사다. 조선통감부 촉탁경시 사카이가 이상설에 대해 신문하자 오라비는 ‘포부가 크고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 한 명에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이라고 평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찍이 “이상설은 원래 대한 학문학의 제일류(第一流)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가 심독(深篤)하여 동서학문을 실개통효(悉皆通曉) 연정(硏精)”하다고 평가했다.
“안 의사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여순에 묻혀 있는데 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게 됐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내 죽거든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겠소.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시구려.”
수이푼 강가에서 이상설의 유해가 불타 올랐다. 1894년(고종 31년)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해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성균관 관장까지 올랐던 그가 망명한 지 11년째 되던 해다. 장례를 마친 어머니는 허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종일 혼잣말을 했다.
-왕이 을사늑약을 거부하고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면…. 이상설이 올린 상소처럼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렸으면 이천만 민중이 일제의 머리를 깨뜨리고 쓸개를 찢을터인데.”
이상설의 서거 소식을 들은 이갑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6월 니콜리스크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이 41세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나는 고통도 없고, 공포도 없소’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