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4)] 안누시아성녀 - 독립전쟁의 목격자

in #kr6 years ago

https://steemit.com/kr/@kjhumane/1
https://steemit.com/kr/@kjhumane/2
https://steemit.com/kr/@kjhumane/3

4.단장지통(斷腸之痛)
3·1만세운동은 해외 한인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만주의 무장투쟁도 거세졌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는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에서 자주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의 헌병분소를 공격했다. 지휘관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싸우던 무장투쟁도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신흥무관학교와 무관양성소에서 꾸준히 장교들을 배출했다.
어머니도 중국과 러시아를 이동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군자금 모금에 열심이었다. 독립신문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조마리아 여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수로 이동하며 동포들의 민족 양성사업에 종사했다’고 썼다.

그해 정근은 소왕령에서 벼농사에 성공해 처음으로 200석을 수확했다. 막 추수를 마칠 즈음 상해에 있던 안창호가 정근을 불렀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3·1 만세운동에 고무돼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군이 가져다 준 독립신문에 ‘안정근 임시정부 내무차장 임명. 적십자사 부회장 피선’이라는 기사가 났다.
둘째 동생 공근도 곧 김구의 부름을 받고 상해로 달려갔다. 외교를 통한 독립 노선을 견지한 임시정부는 공근에게 러시아 정부로부터 독립자금을 받아오라는 임무를 맡겼다. 황해도에서 교사를 하던 공근은 연해주로 망명했을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1912년 6월부터 짧은 기간이지만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공근은 특히 안중근의 동생이라는 강점도 있었다.
두 남동생네가 떠나고 연해주에는 어머니와 올케 언니네, 우리 가족만 남았다.

나와 남편 승복은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두선 계선 봉선은 오라비가 여순 감옥에서 죽기 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아들 헌은 오라비가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쏜 해 뱃속에 있었다. 큰 딸은 소왕령에서 독립군에게 시집보냈다. 두선을 주지 않으면 우물에 빠져 죽겠다고 객기를 부리는 그 아이와, 청계동성당에서 혼례를 치르던 승복이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승복은 1911년 목릉에 정착했을 때부터 양복점을 운영했다. 한인 가운데 불란서 양복을 사 입을 정도로 넉넉한 이는 드물었다. 양복보다 독립군복을 만드는 시간이 더 많았다.
소왕령에서 승복은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이 내놓은 군자금을 모아 총과 탄약을 구입해 독립군에게 보급하는 일을 했다. 때론 비밀문서를 들고와 나에게 ‘어디 갖다 놓으라’고 하고선 사라졌다. 그 문서의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랐다.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밀정은 늘 우리의 주변을 눈에 보였다. 밀정은 또 다른 밀정을 심기 위해 한인을 매수했다.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른 승복은 내게 ‘군복이 따뜻해 아주 좋아한다’는 공치사를 하곤 이튿날 새벽 떠났다.
북만주 독립군 부대는 세 갈래로 나뉘어 경쟁했다. 김좌진 장군이 대종교 지도자 서일과 손잡고 만든 북로군정서는 목릉과 가까운 두만강 너머 길림성 왕청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구한말 좌의정까지 지낸 이시영과 이동녕 이상용은 압록강 건너 서간도에 서로군정서 기지를 창설했다. 홍범도 장군은 백두산 자락 봉오동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

상해로 갔던 정근이 1920년 5월 소왕령에 잠시 들렀다. 북간도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라는 특명을 받았다고 했다. 정근은 ‘독립’이라는 간판이 붙은 북간도 30여 개 단체를 통합하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요즘 왜놈들의 성화가 보통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에 이어 시베리아 내전이 일어난 틈을 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함과 병력 7만 명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신한촌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곧 북간도에서도 일본과 큰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는 넓은 땅만큼 죽을 기회가 많았다. 일본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군대 7만 명을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파견했다. 명복은 자국민 보호였으나 만주에 대한 지배권 강화와 함께 자원이 넘쳐나는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볼세비키 적군과 제정러시아 복원을 외치는 백군의 전쟁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일본의 국권침탈에 앞서 연해주에 정착한 노래민(老來民) 가운데 일부는 적군에서, 일부는 백군에 가담해 총을 들었다. 해삼항(블라디보스토크항)에 군함까지 보낸 일본은 연해주 독립군의 씨를 말리려 했다.
봉오동 전투가 있기 3개월 전인 1920년 3월. 일본은 해가 뜨기도 전에 연해주 신한촌을 공격했다. 독립군이 숨겨둔 총 70정과 탄환 1만발을 압수하고 300명 이상의 한인들이 체포해 한민학교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오라비가 단지동맹을 했던 연추(크라스키노)에 머물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도 새벽에 체포돼 처형됐다.
날이 밝자 신한촌에는 큰 마당과 거리에 주검이 산과 같다.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몇몇 한인은 집집마다 들러 금붙이를 약탈하고 해삼항에 정박한 상선 수십 척도 탈취했다.
연해주 한인 동포들은 ‘원수가’를 부르며 이를 갈았다.

동포여 동포여 잊지말라 너의 원수를
단군의 혈손이 우리의 애민(愛民)
천오백년의 원수 너의 원수
고국의 대원수를 너는 잊지말라.

반만년이래의 조국과 자유
탈취한 원수 삼생(三生)의 원수
산천리 금수강산의 양토(良土)를
왜노의 그 원수를 너는 잊지 말라.

부모형제 자손자매 등
일어나는 심정 솟는 치를 집결하여
차고 때리는 부릅 뜬 눈을 볼 때
천오백년 단군의 원수를 너는 잊지 말라
해삼위 한인을 학살한 일본군

일제가 러시아가 내전으로 정신없는 사이 조계지인 간도에도 유난히 군대를 자주 보내 한인 정착촌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국경 도시에서 무역을 하는 보따리 장수들도 ‘일본이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찾는다며 집집마다 들쑤셔댄다’고 입을 모았다.
“올해 독립군들이 벌써 30번 넘게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일제가 독이 오를대로 오른 게지요. 언제든 만주와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그놈들이 온다면 틀림없이 우리 가문부터 사단을 낼 겁니다. 부디 몸조심해야 합니다.”
정근의 걱정에 어머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밥 세끼 꼬박꼬박 먹고 지내는데, 이런 호강이 버겁다. 독립군 보거든 권 서방 잘 지내는지나 물어보거라.
정근이 북간도로 떠난 지 얼마 안돼 백두산 자락 봉오통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복이 집에 들렀다. 세달 만이었다. 나는 그 세월 내내 두려웠다. 오라비 중근이 죽고, 오라비의 장남 분도가 이미 죽었다. 나는 세 달 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할까봐 내내 가슴 졸였다.
-나, 왔소.
한 밤중 사립문을 열고 달빛에 등을 기댄 그가 움푹 꺼진 볼을 내밀었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소. 옷이 썪고 헤져 흙이 서 있는 줄 알았소. 하얀 이빨이 아니었다면 귀신이라고 소리 칠 뻔 했소.
몇 개월만에 보는 남편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단단한 어깨에 먼지처럼 피곤이 묻어 있었다.
-잘 있었소, 누시아. 아이들은.
-어서 들어가세요. 어머니가 기다리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승복이 내 어머니, 조마리아를 끌어안았다.
-신수가 훤하네, 자네.
-원래 사위가 동안(童顏)이라 안 그렇습니까.
-왜놈들 감시가 심했을 텐데 용케 목숨줄 부지했구나.
-곧 떠나야 합니다. 먼 길 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정근이 왔다고 하던데 어디 갔소?
내가 밥상을 들고 오자 승복이 서둘러 숟가락을 집었다. 총각무를 사위의 숟가락에 올리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 만나러 갔다. 독립군을 통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구나.
승복과 같이 온 상거지들이 아무렇게나 마당에 엉덩이를 붙였다. 밤이 늦도록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무슨 노래요?
열린 방문 너머로 시선을 돌리던 남편이 말했다.
-‘날으는 홍범도가’라우. 한번 들어보시구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행야, 에행야, 에행야, 에행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물이 돈다
에행야, 에행야, 에행야, 에행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승복은 집에 온 이튿날 행장을 꾸렸다. 무기를 사러 러시아로 간다고 했다. 독립군은 러시아나 마적에게 총을 샀다. 마적은 한인 마을 덮쳐 끼니를 해결하고 무기를 팔아 이문을 남겼다. 마적 중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그들이 길잡이였다.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쓰고 남은 무기가 넘쳤다. 무기상은 돈만 주면 어떻게든 군수품을 빼돌려 팔았다.
-해삼위를 거쳐 이만가지 다녀오려면 달포는 걸릴 것 같소.
-그 먼 길을 어쩌나. 몸도 좋지 않은데.
승복은 기침이 심했다. 폐병을 의심했으나 치료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삶을 버텼다. 그는 양반이 나라를 망쳤다고 했다. 양반이라서 부끄럽다고 했다.
“총을 잡을 수 없으니 짐꾼이라도 해야겠지요. 한창 농사철인데도 농꾼들이 짐꾼을 자처했습니다. 일본이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해 복수를 노리고 있습니다. 빨리 무기를 구입하지 못하면 홍 장군이나 김좌진 장군 부대 모두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떠나기 전 떡을 했다. 오랫동안 흙바닥에 뒹글던 연자방자에 나락을 넣고 찧었다. 뽀얀 쌀가루가 제 모습을 드러낼 즈음, 남편을 재촉하는 동지들이 보였다.
“다 됐어요. 사흘은 넉넉히 먹을 양이니 잘 넣고 가시오.”
이제 열 한 살인 아들 헌이 아버지의 저고리에 매달린다.
“아버지도 총 쏠 줄 알아요? 봉오동에서 일본놈들 막 무찔렀어요?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였어요?”
승복은 어린 아들의 까까머리를 어루만진다.
“아버지가 몇 밤 자고 올 것이니, 네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잘 보살펴야 한다. 알았느냐?”
남편은 7월 중순에 왔다. 갈 때 걸어갔던 그는 올 때는 말에 실려 왔다. 말 안장에 배를 깔고 가로로 누운 남편은, 죽은 지 오래됐다. 날파리가 피 냄새를 맡고 그의 살점에 올라앉아 떨어질 줄 몰랐다. 김좌진 부대에서 온 정근이 나를 안고 위로했다.
“매형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았소, 누이. 연해주에서 무기를 싣고 오던 일행이 흑룡강성 동녕(东宁)과 연해주 국경지점에서 일본군 정찰대와 마주쳤답니다. 총격전에서 매형이 가슴에 총탄을 맞고….”
동녕은 우리가 사는 목릉현과 한나절 거리다. 집에 거의 다다른 남편을, 해삼위에 또아리를 틀었다던 일본 헌병들이 죽였다. 아들 헌이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구슬피 울었다. 계선과 봉선이 저고리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닦았다.
“죽기 전에 유언은 듣지 못했다니?”
정근을 따라온 짐꾼이 내 손을 잡으며 통곡했다.
“권 선생이 총을 맞고도 후미에서 끝까지 기관총을 쐈습니다. 일본군 정찰대가 겁을 먹고 철수하지 않았다면 시신도 수습하기 어려웠을겁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우리만 살아와서….”
나는 아궁이에 불을 때 가는 사람 잿밥을 지었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얼마나 배고팠을까…. 먼저 가 계시오. 나 곧 따라갈테니. 문지방 꼭 쥐고 기다리다가 내 가거든 버선발로 뛰어오시오.”

남편의 상여는 작았다. 나무판에 목관을 올려 곡을 하다가 땅을 파 묻었다.
북로군정서 대대장 김규식이 추모사를 잃었다.
-권승복 선생은 안중근 대장과 같이 죽지 못해 평생의 한이라고 했습니다. 권 선생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마차에 실린 기관총으로 불벼락을 내려 독립군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권 선생은 무기를 수송하는 독립군이 퇴각할 때 가장 마지막에 서서 적의 추격을 뿌리치다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동지들이 가까스로 그를 부축해 후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그의 유언은 듣지 못했으나, 평소 내가 죽어 친구인 안중근 대장 곁으로 가더라도 우리 처자를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김규식은 나보다 한 살 적었다. 188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는 대한제국 부위(중위)로 근무하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쫓겨 1912년 만주로 망명했다.
초상을 치른 날 달이 밝았다. 마루에 걸터 앉은 정근이 나지막히 시를 읊조렸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 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