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5)] 안누시아성녀 - 독립전쟁의 목격자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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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족상잔
10월이면 만주는 시베리아와 사할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얼어붙는다. 해삼위에 주둔한 일본군과 압록강 건너 관동군이 조선 주둔 19사단과 합세해 세 갈래로 북간도를 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한인사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정근은 서둘러 독립된 지휘체계 없이 몇 십명 단위로 각계전투하던 소규모 부대를 동도군정서와 동도독립서로 통합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고문도 맡아 독립군 사이의 연대를 강화했다.
“어머니, 저도 만주로 가야겠어요. 가서 빨래도 하고 밥도 하고….”
“어서 가거라. 손주들은 내가 돌볼테니 걱정 말고 가거라. 어여 가거라.”
어머니와 몇 달이라도 헤어진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인 지린성 왕청현에 도착했을 때는 독립군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북적였다. 연해주 신한촌 습격에 이어 간도 토벌이 시작돼 연해주 경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한꺼번에 피신했다.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은 정근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누이. 일본이 드디어 만주에 2만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마적 장강호(長江好)를 시켜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도록 공작하고선, 불령선인과 마적 토벌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군대를 출동시켰어요. 일본과 충동하기 싫은 청의 관헌들은 우리에게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지린성 옌볜 허룽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와 삼도구(三道溝)의 삼림지대로 밀려들었다. 헤이룽장성 목릉현과도 지척이었다.
일본군을 따돌리려면 하루에 백리가 넘는 행군을 해야 했다.
“누이, 고난의 행군을 감내할 수 있겠소? 누이까지 잃으면….”
“내 걱정 말그라. 너보다 늦게 걸어도, 네가 총들고 싸울 무렵에는 도착해 밥은 할 수 있다.”
밥 보다 더 큰 걱정은 추위였다. 10월이면 연해주와 북간도 화룡 용정 도문 훈춘은 살을 에이는 서북풍을 몰고 왔다. 겨울은 길고 추워 박달나무도 얼어터졌다. 한여름 무더위는 잠시 지나가고 낙엽이 흩날리는 10월부터 두만강 하류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12월 중순이면 떵떵 언 강우로 눈보라가 쓸고 다니고 이듬해 4월초에 이르러서야 눈이 모두 녹는다.
나는 딸 셋과 헌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고구려 후손이다. 고구려 땅은 훈춘과 태자하를 거쳐 요녕성과 너희들 큰 아버지가 의거하셨던 하얼빈의 송화강에까지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길림성의 국내성을 순행할 때 악공들이 탄쟁, 국쟁, 공후, 오현금, 생황, 저, 퉁소, 장고, 첨고, 패를 불고 불고 쳤단다. 애미가 훈춘에 갔더니 두만강을 멀리 남으로 바라보며 앉은 고구려 성벽이 있었단다.”
촌각을 다투며 행군한 김좌진 부대는 10월 20일 백두산 기슭 백운평에 다다랐다. 전술의 1원칙은 전면전이 아니라 피전(避戰)이었다. 몇 천명도 안되는 부대로 2만 명이 넘는 일본군과 부딪혔다가 전멸이라도 당하면 항일 무력투쟁은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제2원칙은 매복과 기습이었다. 백운평에 도착한 독립군은 추격하는 일본군을 피해 직소계곡 정상부에 진을 쳤다. 폭이 좁아 한꺼번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전술이었다. 한 시진 동안 콩볶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기다리던 만세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전쟁을 하는 사이 나는 동포들과 주먹밥에 소금을 쳐 치마에 넣어 날랐다. 동포들은 자신들의 겨울 양식을 고스란히 내줬다. 강냉이를 봇짐채 줘야 한 줌 쥘 수 있는 그 비싼 소금도 기꺼이 내놓았다. 그들은 겨울을 버틸 목숨을 모두 내줬다.
“누이, 대승이오. 일본군 200명을 섬멸했소.”
동생 정근이 부상병 몇몇을 데리고 아궁이 주위로 왔다.
“모두 매형 덕이요. 우리가 매복한 걸 알고서도 기껏해야 화승총이나 쏠 줄 알고 올라오던 일본놈들이 러시아에서 구한 신형 무기에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소.”
정근이 데려온 독립군은 발이 꽁꽁 얼어 있었다. 누군가 물을 끓여 언 발을 그 곳에 넣으려 했다.
“안되네. 동상을 그렇게 하다간 다리가 부러지고 말아. 찬물을 갖고 오게나.”
나는 아이들의 발을 물에 담그고 손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미지근해지는 물에 조금씩 조금씩 뜨거운 물을 넣었다. 30여 분이 지나자 딱딱해졌던 발에 혈색이 돌았다. 겨울철 독립군이 올 때마다 이렇게 해야 동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체득했다.
같은 시각, 일본군은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했다. 홍 장군은 예비대를 편성해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한 밤에 양쪽에서 탄환이 쏟아지자 천지분간을 못한 일본군은 반대편 계곡에 있던 아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공격하다가 자멸했다. 전투가 끝나자 일본군 시신 400구가 뒹굴었다.
10월 23일 새벽,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천수평(泉水平)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을 기습했다. 북로군정서가 산악 고지를 점령해 총탄을 퍼붓자 일본군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에 진을 친 일본군 기마부대를 습격했다.
연전연패에 약이 오른 일본군은 어랑촌에서 5000명의 대부대를 동원해 김좌진 부대를 공격했다. 아무리 고지에 있다고 해도 두 배 이상 많은 병력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뜰 무렵 시작된 전투가 한 나절 이상 계속됐다. 해가 질 무렵 구원병이 나타났다. 완루구에서 대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이 적의 후미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7일 동안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10차례의 전투에서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이 손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밤에 산속을 암행하며 신고(辛苦)를 겪었소. 우리의 연통을 받은 홍범도 장군 부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 했소.”
수염에 고드름을 달고 온 정근이 내 손을 잡았다.
“보아라, 아낙네의 치맛자락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게 보이지? 총탄이 비오듯 하는 데 감자를 삶아와 어린 독립군의 입에 넣어주는 저 노인네의 손을 꼭 기억해야 한다. 동포가 살아야 독립도 있다.”

청산리전투는 제 2의 이산(離散)을 만들었다. 일본은 청산리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닥치는대로 불을 지르고 학살했다. 경신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한인촌을 궤멸시켰다. 불에 놀라 뛰어나오는 노인의 허리를 자르기도 하고, 손발을 자르고 목을 졸라 죽이고, 도끼로 찍어죽이고 생매장했다. 솥에 삶기도 하고 몸을 갈갈이 찢기도 하고 배를 따기도 하고 눈알을 뽑기도 하고 사지에 못을 박았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죽었다. 지아비를 죽여서 지어미에게 내보였다. 포대기에 아기를 안고 도망치는 산모를 죽였다. 포대기에 쌓인 아이는 몇날 며칠 혼자 울다 늑대의 밥이 됐다. 엄마 무릎에 누워 예쁜 머리칼 땋으며 응석도 부려야 할 아이들이 일본의 총검에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었다. 일제는 독립군에 대한 두려움을 광기로 풀었다.
무간지옥(無間地獄)과 같았다. 옥졸이 죄인의 가죽을 벗기고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실어, 훨훨 타는 불 속에 죄인을 집어 넣어 몸을 태우며,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졌다.
독립군의 하부 토대는 하루 아침에 불에 탔다. 한인들의 정신적 기반이자 공동체의 중심이던 학교가 30여 개 불탔다. 독립군은 이제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다. 일제는 간도를 넘어 하얼빈까지 살상의 영역을 확장했다. 청의 군대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독립군은 러시아 망명을 택했다. 볼세비키 정부가 소수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다. 소비에트가 연해주를 한인 자치주로 인정하려 한다는 소문도 퍼졌다. 당시 러시아의 한인 독립운동은 대한국민의회가 주도하고 있었다. 3·1운동 직후 해삼위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는 1920년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한인 무장부대들을 아무르주의 자유시에 집결시켜 조직을 통합하려 했다. 그해 4월 신한촌 참변을 겪자 적군의 지원을 받겠다는 계산이었다.
일본이 적군과 대립하는 백군을 돕고 있어 한인 독립군 가운데 상당수는 적군 편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국민의회는 그해 5월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고베셴스크에 본부를 뒀다.
나는 독립군을 따라 나섰다. 중러 접경지이자 한인들의 신개척지이던 밀산에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독립군 부대 사령관들을 불러모았다. 서일은 통합 독립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가 노령으로 갔을 때 한 세력이 되지 못하고 중구난방한다면, 노령 역시 우리를 무시할 것이오. 이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 장군의 총군부, 안무 장군의 국민화군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통합하는 게 어떻겠소.”
서일의 주장은 타당했다. 청산리 대첩에서 대승한 독립군은 이제 노령 정부의 지원만 받으면 국내진공작전에서 대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서일이 나를 연단으로 불렀다.
“나, 안중근 의사의 누이동생 누시아요.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이 가깝다 하였소. 비록 아녀자이기는 하나, 독립에의 의지는 2000만 동포 누구나 같소. 뜻을 하나로 합친다면 못할 게 없소.”
1921년 1월 국경을 건넌 대한독립군단은 밀산에서 국경을 건너 아무르주의 자유시로 이동했다. 우수리강을 건너 연해주와 이만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며칠을 이동해 마침내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아무르강(흑룡강)이 흐르는 자유시에 닿았다. 자유시의 원래 이름은 알렉세예프스크다. 볼세비키 적군과의 승리에서 대승을 거두자 도시 이름을 자유라는 뜻의 스보보드니로 이름을 바꿨다.
나도 모처럼 평온한 시간을 누렸다. 러시아군의 간도 독립군에 대한 대우는 좋았다. 별 할 일 없을 때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하강을 산책하곤 했다.
“어머니! 어머니!”
독립군들은 나를 어머니라 불렀다. 어느 청년이 저 먼 곳에 뛰어왔다. 원청일, 내 사위였다. 큰 딸 두선을 주지 않으면 우물에 빠져죽겠다고 했던 그 청년.
“어머니!”
콧수염을 거뭇하게 기른 그가 날 와락 껴안았다.
“내 사위. 얼굴 좀 보세, 내 큰 사위!”
청일은 러시아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던 러시아 지역 의병대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러시아 의병대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니콜라옙스크항에 근거지를 둔 박일리아가 이끄는 이항(尼港)군, 오하묵의 자유대대, 박그레고리의 독립단군으로 제각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박일리아는 적군에 의뢰해 독립군 부대에 러시아인 교관을 배치해 새로운 전술 전략을 습득할 수 있게 도왔다.
“그래, 두선은 잘 있나?”
“일본놈들이 신한촌을 습격해 쑥대밭으로 만든 건 알고 계시죠? 그때 간신히 살아남아서 연해주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집 떠나온지 오래돼서…. 그래도 여기서 어머님을 뵈니 천군만나를 얻은 것처럼 힘이 납니다.”
청일은 아직 남편 승복이 죽은 걸 몰랐다. 그 소식을 들은 사위는 대성통곡했다. 제야강에 노을이 졌다. 나는 사위와 손을 잡고 그 강변을 조용히 걸었다. ‘김알렉산드라를 기억하라!’ 강 기슭 나무에 조잡하게 만든 팻말이 걸려 있었다.
“두 해 전 숨진 여성 혁명가입니다. 이름은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러시아 적군들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대우하는 것도 실상 김알렉산드라의 노고가 컸다고 합니다.”
김알렉산드라는 함경도 경흥 출신인 김두서의 딸이다. 1896년 러시아-중국 장과 단판 끝에 동청철도 건설에 착공하자 김두서는 한인과 중국인들을 감시하는 관리자로 취직했다. 김두서가 철도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위해 애써준 대가로 중국 노동자들이 감사의 말을 새긴 우산을 선물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알렉산드라는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가 우리 민족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1917년 목재 생산 노동자들의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을 만들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이념이 아니라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으로 이해했다.
알렉산드라는 열 두 살 많은 임시정부의 이동휘를 선생님으로 모셨다. 이동휘가 인생의 스승이었다면 알렉산드라는 이동휘에게 계급투쟁에 대해 가르쳤다. 이동휘는 1918년 5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김알렉산드라는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으로 적군과 백군이 대결하던 그해 아무르강에서 백군에서 총살당했다. 청일은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이곳에서 총살되기 전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면 조선독립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기 전에 열 세 발자국을 걷도록 해다오. 부친에게 듣기로 내 고향이 13도로 돼 있다고 하더라’는 유언을 남겼답니다.”
그녀 사후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외형은 커졌으나 내용은 변질됐다.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와 같은 쓸데없는 논쟁으로 종파와 계파만 생겼다.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는 모두 민족의 독립을 위한 수단일뿐이다. 왕정을 부활하자는 복벽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유롭게 살고 자유롭게 꿈꾸는 건 모든 이념의 공통분모 아닌가.”
나는 두려웠다. 러시아 백군이나 일본군보다 고려공산당의 종파주의가 더 무서운 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세. 만둣국에 떡이라도 해서 우리 사위 먹여야지.”

대한독립군단은 볼세비키 정부의 도움을 얻어 빨리 만주로 돌아가려 했다. 러시아 의병대 지휘관의 한 사람인 오하묵이 주선해 군사협정이 체결됐다. 서일 총재가 그 내용을 설명할 때는 목소리에 떨림과 감격이 느껴졌다.
“마침내 소비에트국이 한국의 노예 상태를 해방시키기 위해 독립군 양성을 약속했소. 소비에트 영토 내에서 자유와 자치로운 행동도 인가했소.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무관학교를 건축함은 물론 한국 군인 양성 기간에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피복 5000벌, 포탄 3000발과 소총탄 10만발, 말 50필을 지원한다고 약속했소.”
독립군 사이에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청산리 전투 때 불렀던 ‘독립군가’가 울려퍼졌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이제 국내 진격만 하면 된다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문제는 마지막 조항이었다. 러시아군은 독립군이 모든 훈련을 마친 4년 뒤 일본 정벌을 개시하겠다고 했다. 그 이전에는 반혁명군인 백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서달라고 했다. 독립군을 적군에 편입시키라는 요구였다. 조선과 수천㎞ 떨어진 자유시에서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김좌진 장군은 분개했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여기에 왔지, 다른 나라 전쟁을 대리하러 온 것이 아니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김좌진은 자신을 따르던 몇몇과 온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내분도 표면화됐다. 독립군의 지휘체계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서로 군사통제권을 갖겠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이 무렵, 북경에서는 일본의 주중 공사 방택(芳澤)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차카 반도의 어업권을 둘러싼 협상이 한창이었다. 방택은 카라한에게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 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지장이 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는 일본군 7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해삼위는 일본의 점령도시였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아직 국정이 안정되지 않은 소비에트 정부는 백군을 돕고 있는 일본과 전면전만은 피해야 했다. 일본 역시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면서 투입한 군대를 철수하려면 한인 독립군 토멸과 어업권 확보하는 명분을 얻어야 했다. 독립군 지휘부는 ‘러시아와 손잡아야 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놓치고 있었다. 볼세비키 혁명이 완수되면 독립군이 적군에게 계륵이 될 수 있다는 걸 예견하지 못했다. 어제 전쟁을 했던 러일이 오늘은 손을 잡고 동맹국이 되는 시대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밥을 짓고 있을 때 청일이 급박한 사정을 알렸다.
“어머니, 큰일입니다. 우리끼리 전쟁이 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막판 담판을 한다고 합니다만, 워낙 불신이 커서 두렵습니다.
자유대대를 이끌던 오하묵과 니항군 지도자 박일리아의 반목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1921년 초 박일리아는 재러시아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해 한인 독립군 군권을 장악했다. 이때 박일리아의 군대와 간도 독립군 다수가 사할린 의용대에 가입했다. 군정위원장에 임명된 박일리아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를 무장해제시켰다.
그러자 오하묵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국제 공산당 동양비서부와 접촉해 고려군정의회를 조직했다. 러시아 공산당은 군정의회에 한국인 무장군을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러시아는 우리 독립군이 하나의 지휘체계를 갖기를 바랬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할린 의용대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만주 방면의 독립군 부대가 무장해제를 해야 할 판이었다.
서일과 김좌진 홍범도는 동족 상잔을 막으려 분주히 오하묵과 박일리아를 설득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김좌진은 일부 독립군을 인솔해 만주로 회군했다.
그해 6월27일. 자유시의 독립군 지도자와 1500여 명의 사할린 의용대는 자유시 외곽 수라세프카의 체스노코프역에서 최종 담판을 했다. 상해파 이동휘와 문창범이 양측의 입장을 조정을 했다. 안무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500여 명은 자유시 내로 들어가 주둔했다.
-고려군정회의를 독단적으로 만들어 독립군을 분열에 빠뜨린 오하묵과 김하석 최고려를 제거하시오. 우리 독립군이 생명을 내걸고 싸운 것은 독립을 위해서입니다. 만약 적군이 끝까지 우리의 무장해체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만족치 못한 무장이나마 몸에 지닌 이대로 만주 땅으로 돌아가 독립 전쟁을 전개하겠소.
사할린 의용대의 요구였다.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소. 사할린 의용대는 군정회의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회담은 결렬됐다. 군정의회 측은 다음 날 새벽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장갑차를 앞세운 제2군단을 끌여 들여 자유시 외곽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인 사할린 의용대를 총공격했다.
개죽음이었다. 독립군의 소총으로 그들의 장갑차와 기마병을 당해낼 수 없었다. 독립군 300여 명이 죽고 250여 명이 행방불명됐다. 900여 명은 포로로 잡혔다. 일부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을 헤엄쳐 건너려다 저 멀리 만주를 보면서 깊은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차마 전우에게 총을 겨눌 수 없어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대원도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독립군의 옷을 더 무겁게, 피를 더 붉게 만들었다.
바로 어제 만나 아들 소식, 동네 소식을 묻던 우리 아이들이, 어렵게 구한 채소에 고추장 버무려 김치를 나누던 우리 아이들이 총탄세례를 받았다. 그곳엔 숨을 곳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는 생각한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숨을 뱉어내는 아이도 있었다. 불꽃처럼 살다가, 낯선 이방인의 땅에서, 순결한 그들의 피가 뿌려졌다.
포로로 잡힌 나는 수용소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청일아, 청일아, 내 사위, 청일아.
나는 다시는 사위를 보지 못했다. 그가 제야강을 건너거나 부디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포로가 된 나는 임시정부와 애국단체의 외교적 활동으로 수 십명의 독립준 장교들과 함께 석방됐다. 나머지 독립군은 소위 심사 과정을 거쳐 군정 의회군에 편입됐다. 400여 명은 반혁명주의자로 분류돼 악형·노역·기아의 온갖 고초를 겪다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사위뿐 아니라 그들의 생사도 알 길이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자유시 참변을 핑계로 한국 독립군의 만주 출동 계획을 부득이 중지한다고 밝혔다. 또 독립군과 맺은 협정을 파기하고 독립군을 적군에 편입시켰다. 김좌진은 만주로 탈출했으나 홍범도 장군은 적군에 편입됐다. 군정 의회도 해산됐다. 독립을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났던 독립군의 꿈은 비극으로 끝났다.
-자유시로 가지 않았다면, 독립이 빨라졌을까? 오라비가 구천에서 얼마나 원망할까. 아무 쓸 데 없는 군권을 잡으려 외세의 힘을 빌려 아군을 공격하다니, 이 죄를 어이 씼을까.
나는 ‘왜 우리는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라비의 심정이 이랬을까? 나는 만주로 돌아오는 내내 안병찬 변호사에게서 들은 오라비의 절규를 꼽씹었다.
“오늘 내가 당하는 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내가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천번 만번 생각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아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혼자 말했다. 나는 정말 죄인이다. 내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어질고 약한 한국 국민으로 태어난 죄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