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6)] 안누시아성녀 - 독립전쟁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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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의가 피로 물들다
오라비는 1907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일본이 헤이그밀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더 이상 대한제국에서 할 일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오라비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홀로 남아 손주들을 키워야 하는 며느리 볼 면목도 없었다.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거라.”
그렇게 어머니는 아들을 보냈다.
집 나간 오라비 소식을 들은 건 3년이 지난 가을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도시 수분하(綏芬河 쑤이펀허)에서 세관 주사로 일하던 황해도 사람 정대호가 어느날 집으로 찾아왔다. 오라비와 정대호는 진남포 시절 교류하던 사이었다. 나는 승복과의 사이에서 두선과 계선을 낳아 기르며 성당에서 어머니와 만나 회포를 풀었다. 정대호가 온 날 나와 어머니는 올케와 함께 성당에서 홍 신부와 기도하고 있었다.
“중근이 큰 일을 할 모양입니다. 부인과 아이들을 하얼빈으로 데려오라는 부탁을 받았소.”
“도마는 어디 있소.”
어머니의 채근에 정대호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간도로 건너온 중근은 신채호 이상설 선생과 교류하다가 연해주로 건너갔소. 얼마 전에는 의병을 이끌고 함경도를 넘었다가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오라비는 1908년 최재형과 이범윤이 이끌던 의병 연합부대 ‘동의회’에서 참모중장을 맡았다. 그해 6월 의병 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최종 집결지는 함경북도 무산. 오라비도 300명을 이끌고 연해주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중근이 행군하면서 함경북고 홍의동과 산이산에서 일본군 부대와 교전해 포로를 많이 잡았답니다. 그런데 만국공법에 포로를 잡아 죽이는 법은 없다면서 무기를 모두 돌려 보내고 말았어요. 이게 화근이 돼서 일본군의 습격을 자주 받아 산 속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습니다. 먹을 게 다 떨어지자 어떤 이는 자결하자고 하고, 어떤 이는 돌아가자고 하고. 열흘간 주린 배를 풀뿌리로 채운 중근이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내려가보니 일본군 파출소였답니다. 구사일생으로 한 노인의 안내를 받아 두만강을 건넜을 때는 피골이 상접해 동료들조차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붓 한자루로는 다 적을 수 없는 고초를 겪은 게지요.”
정대호의 한마디 한 마디에 올케 언니가 눈물을 쏟았다.
“하는 얼굴 하나 없는 하얼빈에 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너 혼자 아이들 셋을 감당하기는 무리다. 딸 현생은 명동성당에 맡기고 가거라.”
올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생전 처음 고향을 떠나 타국만리로 나서는 그에게 ‘오빠와 만나 기별하면 우리도 따라가리다. 몸 조심하시오’라는 말 밖엔 할 말이 없었다. 올케 언니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기 하루 전. 우리 가문의 운명을 바꾼 대사건이 벌어졌다.

김구 오라버니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건 정대호가 다녀간 지 달포 뒤다. 황해도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이던 오라비가 송화(松花) 읍내에서 환등회 행사를 열던 김구 오빠를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김구는 비로소 중근 오빠가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실을 알았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운칠안’이라는 이름을 본 적은 있으나 그 사람이 중근인지는 오늘 처음 알았고. 응칠이가 큰 일을 했으나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오.”
경찰은 한 달 간 김구를 심문했다. 그러나 김구 오라버니가 10여 년전 청계동에서 잠시 생활한 것 말고는 두 사람의 인연을 캘 수 없었다. 도마 오라비가 노령(러시아)에서 활약할 때 김구는 황해도에서 교육계몽운동을 했다.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온 집안을 뒤지더니 스물 네 살 정근과 스무살 공근도 진남포경찰서로 끌고갔다. 경찰은 김아려도 잡혔으니 모든 걸 실토하라고 닦달했다. 두 동생은 근 20일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두 남동생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11월13일 인천을 거쳐 다롄행 배에 올랐다. 인천에서도 일본 경찰은 두 동생을 심문했다. 일경 3명이 두 동생과 동행해 11월 18일 다롄을 거쳐 뤼순에 도착했다. 뤼순에서도 두 형제는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제 어머니 곁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세 아들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가슴은 타고 또 탔다. 의탁할 곳은 천주 밖에 없었다. 긴 겨울에 두만강과 압록강이 얼 무렵, 정근과 공근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누이. 조선인 변호사를 구해야 할 것 같소. 연해주 한인회에서 비용은 댄다고 하니 빨리 수소문 해주시오. 2월에 재판이 열린다고 하니 서둘러야 합니다.”
변호사가 뭔가. 누구를 구해 변호한단 말인가. 나는 앞이 캄캄했다. 일본놈들이 변호를 한다고 해서 오라비를 살려줄까. 그 말을 어머니께 할 수는 없었다. 남편과 김구를 찾아갔다.
“조선사람 변호사는 손에 꼽을 정도요. 내 한성에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보리다.”
“나도 가보고 싶은데. 예서 여순까진 진남포에서 기선을 타면 금새 도착할텐데.”
김구는 권승복을 말렸다.
“지금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데, 권 선생까지 가면 가족은 누가 돌본단 말인가. 그대는 당분간 여기서 옥바라지를 하는 게 낫겠네.”
어머니가 평양으로 떠났다. 조선 팔도를 탈탈 털어 몇 안되는 변호사 중 안병찬은 사비를 털어 뤼순으로 달려갔다. 안병찬은 오라비가 간도로 망명하기 전 서북학회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이다. 어머니는 ‘안병찬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향을 갔다’는 김구의 말에 안도했다. 그가 매국노 이완용을 돌로 친 이재명을 변호한 사실도 남편에게 들었다.
얼마 뒤 정근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일본이 안병찬 변호사 선임계 거부했습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안 변호사는 형님의 공판을 방청석에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형님이 홍 신부와의 만남을 바랍니다.”
안병찬은 소송 기록을 열람하여 일제가 선임한 관선 변호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일본인 관선 변호사들이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훗날 오라비의 유언 ‘동포에게 고함’도 안 선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910년 2월. 오라비가 편지를 보냈다. 사형수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아든 어머니는 쓰러졌다.
“흐드러진 꽃망을 같은 내 아들이, 말 타고 청계산 오를 때 뿜어내던 불길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누가 우리 아들을 데려간단 말이냐. 이 독한 짐승들아.”
어머니의 가슴은 이미 검게 타 더 태울 재도 없었다. 어머니는 일어났다 또 쓰러졌다. 쓰러졌다 일어서 또 쓰러졌다. 마당에 가서 쓰러지고, 천주교당에서 홍 신부를 잡고 또 쓰러졌다. 아득한 하늘을 보고 쓰러졌다. 꽃이 지듯 스러졌다. 몇날을 정신을 놓았던 어머니가 새벽에 나를 깨웠다. 간신히 아들의 편지를 든 어머니는 다시 눈물에 젖어 편지를 꺼내 소리내어 읽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니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못 드림을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천당에서…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다시 쓰러졌다 일어난 어머니는 날보고 여순으로 가라고 했다.
“가서 오라비에게 전해라.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네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다. 네가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한즉, 딴 맘 먹지 말고… 죽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는다.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오너라.”
어머니는 죽거라하고 살아 오거라를 속으로 삼켰다. 부디 살 수 있으면 살거라하고 말하고 있었다. 살 방도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미는, 부디 이순신 장군처럼 죽기를 각오하면 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미의 애는 마디마디 끊겼다. 나와 남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진남포에서 배에 올랐다. 떠나는 날, 어머니는 오라비에게 줄 백의를 챙겨 권 서방에게 맡겼다.

여순에서 만난 올케 언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잘 살았노라고 했다. 분도와 준생은 두선 계선과 철 모르게 잘 놀았다. 아이들이 웃지 않을 땐 어른들의 한숨 소리만 자욱했다. 오라비 면회를 가겠다고 하자 정근과 공근이 말렸다.
-누이. 형님이 하얼빈에서 잡혔을 때 우리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았소. 면회를 하면 누이도 일본놈들의 억압을 받게 될 게요. 그러면 조카들도 위험하게 되오. 변호사나 만나보는 게 어떻소.
안병찬은 얼굴이 맑았다. 목소리는 탁했다. 가끔 가래가 차오르는 듯 기침을 심하게 했다. 한번 심하게 할 때마다 시뻘건 피가 섞여 나왔다. 울분이 가라앉지 않아 화병이 난 듯 했다.
-오라비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몸은 건강하오. 재판정에서 검사와 재판장을 꾸짖는 그 기백은 이천만 동포에게 희망을 줬소. 그들은 오라비가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했소. 재판부가 정치적 확신범으로 인정해 사형선고를 하지 않을까봐 걱정한거요. 안 의사는 만고의 영웅이오.
-선생님은 변호를 못했다고 들었는데, 변호가 제대로 된 건가요?.
-작년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했을 때도 권총 불발로 실패한 전명운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변호인단이 사형 구형을 받은 장인환의 거사를 애국행위라고 주장하자 재판부는 2급 살인죄를 적용해 25년 금고형을 선고했어요. 불안감을 느낀 일본 정부는 궁리 끝에 외보 변호인의 변론을 제한한 것입니다. 관선 변호사는 형량을 낮춰보려고 안 의사를 ‘자객’이라고 불렀다가 오히려 안 의사한테 혼이 났다오.
무슨 변론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안병찬은 둘러서 했다. 그래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수 백번이라도 오라비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래, 항소는 결정하시었소?”
“어머니가 죽으라 했습니다.”
“과연….”
꽃이 져도 조선인 탓이요, 새가 날아가도 조선인 탓인 시절이다. 하물며 일본의 2인자라는 이토를 죽였으니 살아난 구멍은 없었다.
-선생님. 오라비의 의거를 역사에 남겨야 합니다.
-그건 걱정마시오. 안 의사가 자서전을 쓰고 있소. 곧 ‘동양평화론’도 집필할 겁니다. 내 재판 기록도 줄 터이니 잘 읽어보시고 고이 보관하시오.
일본의 심문과 재판 기록은 꼼꼼했다. 수 백명의 이름이 등장했다. 한 치의 빠짐도 없이 오라비를 기록했다. 나는 한 줄도 빼지 않고 오라비의 행동을 읽었다. 오라비를 바라보는 일본의 증오를 읽었다. 오라비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을 읽었다.

검사 미조부치는 오라비를 암살범이라고 불렀다.
-안중근은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부른다. 그는 일개인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의병의 자격으로 이토 공작을 처단했다고 주장한다. 회령 전투에서 대일본제국 군대에 패배한 안중근은 1909년 연해주 연추에서 11명과 단지를 끊어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 그는 연해주에서 발행되는 대동공보사 이강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공작이 하얼빈을 찾는다는 급전을 받고 드디어 순천(順天)의 기회가 왔다고 스스로 짐작했다. 그해 10월 21일 대동공보사 회계책임자 우덕순과 블라디보스토크 출발했다. 안중근 역시 한때 대동공보 탐방원으로 논설을 쓴 적이 있다. 이강은 안중근에게 여비 100원을 주면서 ‘삼천리 강산을 너희가 지고 간다’고 말했다. 안중근은 ‘이번 길에 꼭 총소리를 내리다’고 말하고 러시아령 해삼위에서 하얼빈까지 780㎞를 기차를 타고 당도했다. 10월 22일 밤 하얼빈역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하얼빈 국민회 회장 김성백 집에서 하룻밤 보내고 이튿날 양복을 구입해 중국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안중근은 짙은 회색 양복에 조끼를 입었다. 안중근은 이토 공작을 살해하기 전 시를 지어 가방에 보관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때를 만드는도다/천하를 내려다봄이여, 어느 날 대업 이룰꼬/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 뜨겁도다/분개하여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도적 이토여, 어찌 기꺼이 목숨을 비기겠는가/어찌 이에 이를 줄 헤아렸으리요, 사세가 진실로 그러하도다/동포 동포요, 빨리 대업을 이룰지로다/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10월 26일 아침기도를 한 안중근은 하얼빈역사 내부 찻집에서 이토 공작을 기다렸다. 그는 이토 공작의 얼굴을 몰랐다. 기차에서 내린 이토 공작이 환영 나온 인파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자 안중근이 총알 세발을 발사했다. 실상 안중근은 석탄장사를 하다가 망한 자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못해 형제와 처자를 버리고 떠돌던 자다. 실추된 위신을 세우기 위해 이토 공작을 살해한 과대망상증 환자다. 안중근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오라비 도마에겐 아내와 어린 삼남매가 있었다. 그는 셋째 준생이 태어나던 해 러시아로 망명했다. 장녀 현생이 다섯 살, 둘째 분도가 두 살때였다.
이토를 쏜 도마는 거사일 밤 러시아헌병파출소에서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감옥으로 이송됐다. 도마는 이곳에서 10월 30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미조붙이 다카오 검찰관의 조사를 받았다. 일제는 청국 땅인 동시에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속지로 러시아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하얼빈이 아니라 청일전쟁으로 점령한 중국 뤼순(여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청 모두 일본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 역시 일본과 외교갈등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올케는 분도와 준생을 데리고 하얼빈역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정거장에 러시아 헌병과 일본 경찰이 많아 다소 의아했을 뿐 오빠가 이토를 저격한 사실은 상상도 못했다. 자신이 타고 온 기차의 맞은 편에 서 움직이지 않는 기차가 바로 이토가 탔던 기차란 걸 알지 못했다. 올케가 남편을 잃을 수 있다고 직감한 건 김성백의 집에 도착하고나서였다. 그날 밤 도마가 거사 전 묵었던 김성백과 통역을 맡았던 유동하가 붙잡혔다. 우덕순 조도선 탁공규 김형재 김성옥 김려수도 체포됐다. 올케도 잡혀갔다가 3일 만에 풀려났다.
관선 미즈노 요시타로와 가마다 마사하루 변호사는 도마를 ‘자객’ ‘암살범’으로 몰았다. 안병찬 선생은 반대했으나 그들은 “도마의 형량을 낮출 수 있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이토를 쏜 도마가 의인으로 불리길 원치 않았다. 의거가 아니라 살인이라고 불렀다.
도마는 아려 언니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천당에서 다시 만납시다. 큰 아들 분도은 신부로 키워주시오.”
도마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혼례를 치르고서도 그는 말을 타고 망대산을 달렸다. 빌렘 신부를 따라 황해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천주교를 전도했다. 경성으로 가서 뮈텔 주교를 만나 천주교 대학을 세우자고 호소했다.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면 신앙에 좋지 않다”는 뮈텔 주교의 말에 도마는 “천주교는 믿어도 외국인은 믿을 게 못된다”고 땅을 쳤다.
도마는 아버지의 죽음도 지키지 못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이 가속화되던 1905년 6월. 도마는 일가족 해외 이주를 위해 상하이와 산둥을 찾았다. 그때 황해도 재령본당의 곽원량(르각) 신부를 만났다. 홍콩에 들렀다 다시 조선길에 오른 곽원량 신부는 “그런 식으로 다 떠나버리는 게 원수가 바라던 바”라고 호통쳤다. 스스로 힘을 길러 싸울 힘을 키워해 했다. 도마도 동의했다.
도마가 귀국했을 때 아버지는 사망한 뒤였다. 청계동 무덤에서 통곡하던 도마는 대한이 독립할 때까지 술을 끊겠다고 맹세했다. 진남포 용정동 36호에 양옥 한 체를 지어 가족의 새 거처를 마련했다. 도마는 1906년 재산의 일부를 털어 집 한켠에 삼흥학교를 세웠다. 올케 언니의 오빠 김능권이 1만5000냥을 들여 30여 칸의 기와집을 지어 교사로 제공했다. 진남포 해관 주사 오일환이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도마는 프랑스인 방소동(포리) 신부가 세운 돈의학교에는 재정을 지원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진남포 해관 주사 정대호는 훗날 올케 언니를 하얼빈으로 데려갔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정대호는 임시정부 임시정원 의원을 지냈다.
황해도의 유명인사들과도 교류했다. 1907년 봄 훗날 서북학회로 이름을 바꾼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해 김달하 박은식 안창호와 교류했다. 도마의 의거를 듣고 한 달음에 여순까지 달려간 안병찬 변호사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다.
진남포 시절 도마는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다. 처남 김능권의 후원을 받아 미곡상을 운영했으나 실패했다. 간도로 망명하기 한 달 전에는 삼흥학교 교장 한재호와 평양에 무연탄 판매회사 삼합의를 설립했다가 곧 문을 닫았다.

정근과 공근이 오라비와 마지막 면회를 했다. 나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갔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오라비 낯빛은 어떻더나.
-빛이 돌았습니다. ‘안응칠 역사’를 다 썼다고 합니다.
-남긴 말이 있더냐.
-연해주의 이치원의 집에 맡겨둔 단지(손가락)를 찾으라 당부했습니다.
정근은 1911년 단지동맹원 백규삼에게서 단지와 태극기에 大韓獨立이라고 쓴 혈서를 넘겨받았다. 정근의 부인 이정서가 해방이 될 때까지 단지를 보관하다가 잃어버렸다. 도마가 단지를 자른 건 아무런 일도 이룬 것이 없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의병 연합부대의 국내 진공작전에 놀란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한인들의 의병활동을 전면 금지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 지도부 역시 최재형파와 이범윤파로 나뉘어 갈등이 심했다. 최재형이 이범윤 세력에게 저격당하기도 했다. 일제와 러시아의 감시 속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도마는 들끓는 울분에 약지를 끊고 훗날을 도모했다.
도마의 재판은 불과 2주 만에 끝났다. 1910년 2월 7일 1차 공판이 시작돼 검찰은 2월 14일 6차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그해 3월 7일 홍석구 신부가 뤼순에 도착했다. 그는 천주교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한국 천주교는 오라비를 살인자라고 했다. 홍 신부는 신부직을 걸고 오라비를 찾았다. 오라비는 종부성사를 원했다. 홍 신부님이 도마를 마지막으로 면회하고나서 일주일 뒤 오라비는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다.
오라비의 사형이 집행된 3월26일. 그 날은 온종일 비가 퍼부었다. 나와 두 동생은 사형 장면을 볼 수 없었다. 빨간 벽돌로 지은 뤼순 감옥 밖에서 오라비의 시신이 나오길 기다렸다. 두선 계선을 맡길 곳이 없어 데려갔다.
일제는 죽은 오라비를 두려워했다. 그의 무덤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미초부치는 오라비를 뤼순 감옥 뒤편 야산에 묻었다. 오빠는 김성백의 집 옆에 있는 하얼빈 공원에 자신의 시신이 묻히길 원했다. 두 동생에게 ‘해방된 조국으로 내 시신을 이장하라’고 유언했다. 일제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오라비가 숨진 지 얼마 안 돼 연해주에서 안중근 추모회가 만들어졌다. 오라비의 삶을 다룬 연극이 한인학교와 교회에서 상영됐다. 영화감독 정기탁은 1928년 안중근을 다룬 ‘애국혼’을 상해에서 상영했다. 이재명은 오라비가 죽은 그해 을사오적 이완용을 습격했다. 이완용은 그때 죽지 않았다. 칼을 셋방 맞고도 목숨을 살렸다. 안병찬 선생이 이재명을 변호했으나, 이재명은 살지 못했다. 죽어야 될 자는 살고 살아야 될 자가 죽은, 그런 시대였다.

오라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일제의 감시는 말로 못할 만큼 삼엄해졌다. 거의 매일 헌병과 순사들이 대문을 두드리고 출입자들을 탐문했다. 옥리가 죄수를 감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순사들이 두 동생을 없애버리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우리는 물론 안 씨 가문과 인연을 맺은 가문은 모두 감시 대상에 올랐다. 오라비가 세운 학교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었다.
“어머니. 여기를 뜹시다. 일본 순사 등쌀에 견딜 수가 없소. 우리도 형님의 유지를 받들어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달 넘게 두문불출하던 정근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괜찮다만, 누시아와 권 서방 가문은 어찌한단 말이냐. 우리 가문 때문에 권 씨 가문이나 며느리 가문까지 고초를 겪게 됐구나.”
나도 더 이상 진남포에 머물 수 없었다. 남편도 이미 도마의 길을 가겠다고 맹세한 상태였다.
“어머님. 우리도 같이 갈 겁니다. 중근의 한을 제 손으로 풀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겠소. 가서 독립군 의복이라도 만들고 싶소. 중근의 의거를 도왔던 사람들 만나 인사라고 해야겠소.”
이제 가문을 이끌어야 할 정근이 길을 잡았다.
“일제의 손이 미치지 않는 연해주로 갑시다.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습니다. 형님이 의거를 준비하신 곳이니 동포들도 우리를 홀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연로한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이 고행길을 버텨낼지.”
“내 걱정은 말거라. 재산을 처분하면 순사들의 귀에 들어갈 터인즉,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기거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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