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신령(화산)전투) 6-2. ‘신령 영천전투(1984)’, 과 이대용 장군의 기록의 내용 차이

in #leedaeyong6 years ago (edited)

이대용 장군은 신령전투에서 야간 공격을 하게 된 것은 김용배 대대장의 결심때문이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당시 3중대는 화산까지 올라가는 통로를 개척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어서 화산으로 올라간 이후에는 제대로 공격작전에 투입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용배 대대장은 3중대를 화산 지역의 오른쪽에 있는 고지에 보내서 대대의 측방을 보호하도록 했다. 김용배 대대장은 항상 측방에서 적으로부터 기습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이대용 장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정면대결로는 불리했다. 변칙적인 기습공격이 아니면 적군을 격파하고 화산을 점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김용배 중령은 야간 공격을 결심했다.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다가 적군의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으며 전진을 하지 못하고 고전중이던 제1중대와 제2중대를 대대 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철수시킨 김용배 중령은 제2중대를 대대 지휘소 부근에 예비대로 남아 있으라고 명하고, 제1중대는 야음을 이용해서 동쪽으로 돌아 화산의 적군을 측방에서 기습공격하라고 명했다.

제3중대는 화산 능선에서 동남남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고지에서 적군과 교전중에 있었다. 제1중대 장병들은 저녁식사로 나누어주는 주먹밥 한 덩어리와 고추장 한 수저를 받아 먹은후,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동쪽으로 돌아 아주 은밀하게 전진했다. 불과 3킬로미터의 거리를 침투해 들어가는데 무려 6시간이나 걸렸다.

‘신령 영천전투(1984)’에서는 야간 공격을 하게 된 것을 이대용 장군의 건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17:00 쯤, 대대장은 중대장과 참모들을 모아 놓고 목표 탈취 방책을 모색하기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틀 전 제5육군 병원에서 자진 원대 복귀한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지형과 적정을 고려하여 야간 공격을 건의하였다. 대대장은 그 방안이 자신의 복안과 일치되고 있는 점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다음과 같이 야간 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p.132)

한편 ‘신령 영천전투(1984)’는 제2중대는 대대 지휘소에 예비대로 남겨 놓고 제3중대를 화산 오른쪽에서 측방을 보호토록 했다고 한 이대용 장군의 기록과 달리 화산 공격에 2중대와 3중대가 같이 야간 공격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 1대대의 야간 공격 계획

제1중대 : 공격 선봉중대로서 31일 일몰직전에 행동을 개시하여 목표 서쪽으로 우회한 후 다음날(9월 1일) 03:00 정각에 돌격을 개시한다.

제2중대 및 제3중대 : 18:00 부터 목표 정면에 대한 양공을 실시하면서 대치한 적의 관심을 끌어 들인 뒤 21:00에 공격 개시선을 통과하여 목표 정면 8부 능선으로 진출하며, 제1중대가 돌격을 개시하면 일제히 공격한다.

한편, 제1중대가 단독으로 야간 공격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대용 장군의 기록과 ‘신령 영천전투(1984)’의 기록이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신령 영천전투(1984)’는 제1중대가 우회해서 적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포로를 잡았고 그래서 야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이대용 대위가 애초 정해진 시간 보다 일찍 돌격을 명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용 장군의 기록에는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말도 없고 적에게 들킬 상황도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냥 계속 야간 공격을 계속해서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오전 3시경 적진 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북한군이 경계를 소홀히하고 있어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오전 3시경 제1중대는 적진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주간에 우세했던 적군은 제1중대의 우회 야간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 병사들은 졸고 있었다. 제1중대는 일제사격을 가하며 화산 제일 높은 곳으로 돌격했다. 허를 찔린 적군은 혼란이 일어나 전사자를 남긴채 산밑으로 도주해 버렸다.

사소한 부분같지만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한국군이 작성한 당시 한국전쟁사의 상당부분이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전사를 마치 소설처럼 구성해 놓아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특히 한국전쟁사를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하게 되면서 사실과 허구가 많이 섞인 듯한 느낌을 지을 수 없다.

한편 화산지역에서 전투한 부대들에 대해서도 ‘신령 영천전투(1984)’의 내용은 이대용의 기술과 차이가 있다.
이대용은 화산지역에는 제7연대 제1대대만 작전을 수행했다고 기술했다. 화산 오른쪽에는 개활지였고 그 개활지 오른쪽에 제3중대를 보내 측방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산지역에는 다른 부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령 영천전투(1984)’에는 제7연대 제1대대 우측방에 제15연대 제1대대와 제3대대 그리고 제8연대 제1대대까지 화산지역으로 진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날 14:00 제7연대 제1대대 우측방에서는 사단에 배속된 제15연대의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주봉 동쪽 봉우리-637 고지를 연결하는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제8연대 제1대대는 인접 제8사단과 부대배치 간격에 형성된 공간지대를 경계하기 위하여 646 고지 북쪽 무명고지 일대로 진출 중에 있었다.

한편, 제7연대 제2대대도 화산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음날(2일) 제7연대 제2대대가 화산 주봉 북서쪽 1.7 km 지점의 725 고지를 탈환하자,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상호지원할 수 있는 방어진지를 편성했다(p.134)

그러나 이대용의 기술에 의하면 제2대대는 화산의 전투가 모두 끝난뒤 이대용이 있던 화산지역에 와서 진지를 인수받았다고 한다.

‘신령 영천전투(1984)’는 화산전투에 관한 기록에 제15연대와 제8연대 제1대대의 증원에 관해 약 4쪽에 걸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 화산의 주봉과 이어진 남쪽지역의 고지에대한 전투 기술이다.

그런데 이대용 장군은 나중에 현지를 답사하면서 자신이 싸웠던 지역이 화산이 아니라 화산을 지나서 북쪽에 있는 고지군들이었다고 증언을 했다. 당시에는 그냥 화산이라고 해서 화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직접 다시 현지를 가서 보니 자신이 전투를 했던 주 전투장은 화산 성벽과 성문이 있는 횡격실의 고지군이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과 같이 전투를 했던 생존자의 증언도 동일했다.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 발간된 화산전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소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심스럽게 전사기록이 이상하게 기록된 이유는 아마도 전공과 관련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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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전투는 소설이었군요.

보클하고 갑니다.😄

사람이 하는일이다보니 이런일도 생기는군요..
오늘도 디클릭!

전사 역시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소설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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