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리포트 춘자 _ 08 연결

in #stimcity4 years ago


어떤 장소 혹은 물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당장 핸드폰을 손에 쥐지 않고도 여전히 어떤 사람, 물건, 장소가 보내오는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혼란한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는가? 가로등 불빛이 머리 위에서 깜빡일 때, 유난히 서늘한 바람이 돌연 볼을 쓰다듬을 때, 그것이 전에 없던 일이라는 것을,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대부분 그냥 흘려보내거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들, 문득 떠오르는 이름 혹은 장소, 강한 확신이나 의심, 기시감 같은 것들은 사실 연결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인터스텔라의 머피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연결의 느낌을 낚아채고 싶다. 그것도 일종의 기능이라 쓰면 쓸수록 날카로워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무뎌진다. 내가 아는 티베트 친구는 살면서 몇 번이나 크게 다치거나 죽을 뻔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타나 자신을 구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위험한 물체와 충돌하기 직전 귓가에 '멈춰!'라고 소리치거나 만취 상태로 휘청이며 길을 걷다 다리 아래로 추락할 뻔한 순간 목덜미를 낚아채는 등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의 목숨을 구하는가 하면 꿈이나 환상, 직감과 같이 상징적인 방식으로도 자주 신호를 보내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입을 떡 벌리고 들었다. 그는 그 존재를 'protector'라고 불렀다. 그런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신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수호천사 혹은 미래에서 온 자신일 것이다. 책장 너머 세계의 쿠퍼처럼. 그러고 보면 어쩌면 같은 것을 두고 다들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9년 전 봄, 한국을 떠나며 문득 외할머니에게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항에서 생전 걸지도 않던 안부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으레 하던 일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전화를 걸면서 스스로 기특하다고 여길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문득' 든 생각이 할머니가 내게 보낸 생의 마지막 신호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탑승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라탔고 라다크에 도착하기까지 2박 3일이 걸렸다. 그러니까 나는 2박 3일 동안 할머니가 쓰러진 것도, 돌아가신 것도 몰랐다. 문득 할머니에게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날, 그래서 이례적인 안부 전화를 걸었던 그날, 할머니는 하필 그날 쓰러졌고 나도 모르는 사이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먼 나라 오지로 떠난 나를 굳이 불러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우리 가족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친구가 보낸 메일을 통해 소식을 듣고는 미친 여자처럼 울며 전화방으로 달려가 전화를 걸었을 때 우리 가족은 장을 치르고 막 집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족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몇 날 며칠 울며 지냈지만, 슬픈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써 잊은 것도, 시간의 덕분도 아니다. 나는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할머니의 죽음을 잊었다.

그리고 어느 날에 할머니 꿈을 꾸었다. 우리는 함께 놀이공원에 있었다. 할머니는 긴 줄 끝에 까치발을 들고 선 나의 손을 잡아끌며 이제 그만 밥 먹으러 가자고 성화였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두고 놀이기구에 정신이 팔려 줄을 서고 또 섰다. 그녀는 그런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결국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꿈 이야기를 했더니 그날이 할머니 49재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꺼이꺼이 울었다. 할머니는 노느라 정신 팔린 손녀딸과 밥 한번 먹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어딘가로 떠났다. 이후 외할머니댁 전화번호를 몇몇 인터넷 계정의 비밀번호로 쓴다. 라다크에서는 노느라 할머니의 죽음을 금세 잊고 말았지만, 공항에서 할머니가 보내온 신호, 꿈을 통해 보여준 메시지, 그 연결의 느낌만은 잊지 않고 싶어서 그렇다.


두 번째 이탈에서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미리 생각해 두었던 세 가지, 그러니까 붉은 장미의 섬과 바나나 머핀과 가로등은 떠올릴 새가 없었다. 그보다 먼저 내 곁의 사람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우린 몇 가지 신호를 만들기로 했다. 세 번째 이탈에 성공하여 그들을 방문하게 된다면 오른쪽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거나 왼쪽 어깨를 두 번 가볍게 두드리겠다고 말이다.

이틀이 지나고 세 번째 이탈에 성공했다.

이번엔 잠으로 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진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진동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아침에 한 차례 잠에서 깨어난 후 바로 눈을 감고 내 안의 곳곳을 훑으며 이동하는 젤라틴 같은 에너지 덩어리를 떠올렸다. 진동이 느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원 스위치를 올리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몇 차례 덜컹거리고 나서야 제대로 작동하는 낡은 고철 기계처럼 내 안의 젤라틴 덩어리가 몇 차례 덜그럭(?)거리며 움직이더니 이내 부드러운 진동이 시작되었다. 진동을 감지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바로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누운 채로 허공에 떠 있었는데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두었던 탓인지 마음이 급해졌다. 지난번에 방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까지 성공했으니 이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차례다. 만나고 싶은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창문을 통과했다.

창문을 통과하자 어느 집 거실이었다. 이건 영화에서 보았던 순간이동과 거의 비슷한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을 몰라서 이렇게 이동한 것이지, 길을 알았다면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엄청난 속도로 날아서 찾아갔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서 2m 정도 떨어져 엎드린 채 떠 있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걸레로 열심히 거실 바닥을 닦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마찬가지로 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정수리도 보였다. 남자는 정말이지 열심이었다. 한동안 둘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 남자가 그 사람인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사람들일까?


그 또한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저들은 누구지?


어째서인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뜬 채로 한참 동안 동그란 뒤통수만 바라보다가 현관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 동네 골목길이었다. 나는 땅 위에 서 있었다. 다시 날고 싶었다. 달렸다. 그러다 계단을 오르듯 날아올라 공중을 걸었다. 하늘 위를 사뿐사뿐 걷는 하울과 소피처럼. 공중을 걷는 것도 물론 근사하지만, 아무래도 돌고래처럼 헤엄치는 것이 더 좋았다. 자세를 바꾸어 날았다. 속도가 이전보다 더 빨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지?


질문을 떠올리는 순간 몸으로 돌아왔다. 젠장. 마음이 급했다. 눈을 뜨자마자 만나고 싶다고 떠올린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오늘 쪼그리고 앉아서 거실 바닥을 걸레로 닦았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전에 그런 적이 있어?


그 또한 아니라고 했다.


실패였다. 그렇다면 다시,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