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와 조각배를, 기다리며 기다리며

in #stimcity5 years ago (edited)

좁은 승합차 안에 구겨져 있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공기, 소리, 냄새들 덕분에 조금씩 눈앞이 흐려졌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화장실을 참으며 긴장을 유지한다는 건 고문이다.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무슨 오기인지 차를 세우고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가 노상에 볼일을 보느니 죽기 직전까지 버티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건 길고 고된 오지 여행을 통해 터득한 쓸모 짝에 없는 기술 중 하나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산길 위에서 운전사가 급하게 핸들을 꺾을 때마다 차 안의 사람들은 메트로놈의 바늘처럼 일제히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몇 번이나 아찔한 고비를 넘겼다. 인간 메트로놈이 만들어내는 만드는 박자에 익숙해질 때 즈음, 기이한 모습의 땅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뾰족뾰족 이어진 카라코람 산맥의 봉우리들은 도대체 입체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아서 삼각형으로 오려낸 종잇장을 이어 붙여놓은 것 같았다. 파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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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서스펜션 브릿지가 파수에 있다. 세상의 끝을 찾아 헤매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곳이다. 세상의 끝에는 대체로 아무것도 없다. 그걸 알면서도 배낭을 진 이들은 아무것도 없음을 마주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두 개의 흔들다리를 건너고 빙하를 보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주특기인 내게는 두 가지 모두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까웠지만,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빙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길에서 만난 이정표에는 'Glacier'라고 쓰여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그 모습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차갑고 거대한 덩어리가 나타나는가 보구나 했다. 그런데 협곡에 묻힌 작은 마을의 오솔길 위에서 갑자기 빙하를 만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빙하를 보려면 얼음이 녹지 않는 어떤 높은 곳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생각 없이 오솔길을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과연 가파른 오르막을 기어 오르고 있었다. 길이라고 일러준 곳에는 길이 없었다. 어느샌가 길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가이드도 없이 암벽 등반에 가까운 이 산행을 계속해야 하나 싶었지만,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만큼 지독한 일도 없다. 수가 줄어든 선택지 안에서 경우의 수를 따지는 건 영 수고롭게 느껴진다.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내려갈 수 없으니 올라갈 수밖에. 마른 흙이 발 아래서 계속 부서졌다. 제대로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짧은 동안에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말에 과장은 없다.

한국 배낭여행자, 파키스탄에서 빙하를 보기 위해 암벽을 오르다 실족사하다.

배낭여행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해괴망측한 이유로 죽는 일이 허다한데 실족사는 특별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쨌든 미끄러지던 나의 발 아래 돌부리가 걸렸다. 순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느꼈는데 이 역시 과장이 아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끝까지 올라 그 차갑고 거대한 덩어리 위에서 사진을 찍고야 말았다. 목숨을 걸고 얻어낸 것이라기에는 매우 하찮은 풍경이었지만, 허탈하지는 않았다. 빙하 대신 돌부리를 만났기 때문이다. 발바닥을 밀어 올리던 그 감각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돌부리는 말하자면 신의 뜻이오, 자연의 섭리였다. 덕분에 내려오는 길에는 마음 놓고 온몸을 던져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깨달음을 얻고 환희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말이다. 다 내려와서는 흙투성이가 되어 거의 무릎을 꿇고 울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살면서 죽을 뻔한 경험이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빙하와 돌부리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 날 밤에는 숙소 주인 할아버지가 소름이 끼치도록 맛있는 치킨 카다히를 만들어 줬다. 치킨 카다히에서는 닭볶음탕 맛이 났다.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튀김도 함께 먹었다. 실제로 메뉴판에 '후렌치 후라이 마운틴'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다. '마운틴 후렌치 후라이'였나.


다음 날의 미션은 서스펜션 브릿지 건너기. 썩어 가는 나무판자를 연결하여 만든 흔들다리는 열 걸음을 내디디고 당장 끊어져 추락한다 해도 억울할 것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다리의 끝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아래로는 흙탕물이 흘렀다. 이 다리를 건너겠다고 이미 한참을 걸어왔기 때문에 역시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건너가는 편이 나았다. 다리 곳곳에 보수한 흔적이 보였다. 가만히 서서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내가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어지럼증이 일었다. 중간쯤 다다라서는 제법 여유를 부리며 사진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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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뒤떨어져 있던 와히 여인 둘이 어느새 바짝 따라붙는 듯하더니 우리는 마침내 다리의 끝에서 만났다. 파수에는 파미르 고원의 사람들인 와히족이 산다. 그들은 와히어를 쓴다. 파키스탄 공용어인 우르두어나 펀잡어와는 다르다. '안녕하세요'가 '호쉬로이', '사랑해요'가 '뚜뜨마호쉬'였던가. 숙소 주인 할아버지에게 배운 와히말로 인사를 건넸더니 그녀들이 껄껄 웃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자 모두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헝클어졌다. 한 여인이 제 모자를 벗더니 친구의 머리 위에 턱 얹고는 또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아는 말이 '호쉬로이(안녕하세요)'와 '뚜뜨마호쉬(사랑해요)'뿐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뚜뜨마호쉬라고 외쳤는데 그렇게 계속 사랑을 외치다 보니까 급기야는 두 여인을 향한 애정이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끌어안고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그녀에게서는 그리운 냄새가 났다. 두꺼운 모직으로 지어 입은 옷자락이 뺨에 닿아 따가웠다. 두 뺨이 닳아 없어지도록 한참이나 그렇게 비비적거리며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다리의 끝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스몰 쉽' 그리고 '티'라는 단어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티'라고 할 때는 찻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지만, 문제는 '스몰 쉽'이었다. 서스펜션 브릿지를 건너느라 진땀을 빼고 난 후, 다시 이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이미 진절머리가 나는 중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스몰 쉽'이 '작은 배'라고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다. 차를 대접할 테니 자기 집에 와서 차를 마시고, 그 후에는 '스몰 쉽' 그러니까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라고 말이다. 영어를 모르는 와히 여인에게는 작은 배나 큰 배나 모두 '쉽 Ship'일 수 있다고. '보트'라는 단어를 미처 모를 수도 있다고. 이제 이 무시무시한 다리를 다시 건널 필요 없이 여인의 아늑한 집에 가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낭만적인 조각배를 타고 집에 돌아가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치킨 카다히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라고. 세상에. 이런 멋진 제안이라니.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배는 분명 강가에 있어야 하는데 여인들의 걸음은 자꾸만 강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들은 뒤처지는 우리를 챙기느라 자꾸 뒤를 돌아보며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변에 '스몰 쉽'을 탈 수 있는 나루터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대로 발길을 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 끝에 가보는 수밖에 없다. 세상의 끝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여인의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무릎을 모으고 둘러앉은 우리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뚝딱 끓여낸 밀크티와 함께 비스킷 한 봉지가 발 앞에 놓였다. 내 머릿속엔 온통 스몰 쉽 생각뿐이었다.


"스몰 쉽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오두막 뒤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곳에 작은 배 대신 새끼 양들이 음메 음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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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볼 것이 남았다고 보름이 지나 다시 파수를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 다리를 건넜다. 상태는 첫 번째 다리보다 더 엉망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또 길을 잃었고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는 바람에 한참이나 헤매다가 북한이 짱이라고 외치는 파키스탄 젊은이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의 끝에는 여전히 별것 없었다.








쓰다가 만 채로 오랜 시간 버려 두었던 이 글을 굳이 다시 꺼내어 이야기를 이어 썼다. 벌써 12년 전의 여행이다. 내가 만든 흔적들이 시간이 흐른 자리에 쌓였다. 지금은 이 이야기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의 흔적이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는 모양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한 나는 그 말이 영 아득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생각할수록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경험한 그 모든 공간에, 그 영원한 현재에, 쌓이고 중첩된 그 모든 장면에, 내가 있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모양은 그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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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쉽ㅋㅋㅋㅋㅋㅋㅋㅋlamb이라고 해줘....